3. 검푸른 계곡

2026년 3월 24일

2026.03.24 | 조회 192 |
0
|

 

첨부 이미지

 

 

시간이 흘러서야 불현듯 이해되는 일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요? 편의상 이걸 검푸른 광야라고 칭하기로 해요. 검푸른 광야로 당신을 이끌고자, 오늘은 아나톨리아에서 벗어나 옆 동네 캅카스로 가요.

출장 차 트빌리시에 일주일간 머무른 적이 있어요. 베를린에서 대학에 다니며 뮤지션들의 부킹 에이전트로 일할 때였지요. 그즈음 일렉트로닉 바디 뮤직(EBM) 장르가 부흥해 성행했는데, 내가 담당하던 이란계 캐나다인 아티스트는 화학 무기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방독면을 썼어요. 공연 도중 갑자기 그라인더로 철근을 절단하기도 해, 뒤에서 지켜보던 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아티스트였지요. 그의 팬층은 특정 도시에 집중 분포해 있었어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테네, 마드리드···. 흥미롭게도 트빌리시가 그중 한 군데였어요. 당시 유럽 내 조지아 클럽들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어요. 조지아의 유럽연합 가입이 목전에 다가왔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던 시기였지요. 조지아 공연장이나 페스티벌과 협업할 일이 잦아지자, 관계자들을 만날 겸 나도 그 화학 무기 뮤지션의 투어에 동참하기로 했어요.

 

듣던 대로 트빌리시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파티가 이어졌어요. 평일임에도 바와 공연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어서, 소련이 어제 막 해체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요. 와인을 마시지 않은 건 딱 하루였는데, 그날에는 성 삼위일체 대성당을 방문했고 안나 카리나가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어요. 아니, 안나 카리나가 죽었기에 파티에 합류하는 대신 대성당엘 갔었던가요. 성당 가는 길 지하도에서 나는 연필처럼 얇은 자주색 양초를 한 움큼 샀어요. 사고도 그걸 어찌할 줄 몰라 손에 덜렁 쥐고는, 성당 뒤편에서 합창단원들만 우두커니 구경하다가 그대로 들고 왔지요. 지금도 내 침대 밑에는 그 한 움큼의 초가 보관되어 있어요.

 

첨부 이미지

조지아를 떠날 날이 다가오자 고민되기 시작했어요. 남은 연말을 어디서 보내야 좋을까? 마음 같아선 캅카스 3국을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넉넉지 않았어요. 게다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관계는 첨예해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입국하려면 무조건 조지아나 이란을 거쳐야 한다더군요. 조지아에서 일정을 시작한 이상 세 나라를 모두 돌아보는 건 비효율적이었지요. 그러니 나는 골라야만 했어요. 아르메니아냐, 아제르바이잔이냐. 

 

당시 나는 학교에서 새로운 노이즈를 찾아서라는 교양 세미나를 듣고 있었어요. 수업 중 알게 된 소련의 아방가르드 음악가, 아르세니 아브라모프에 심취해 있던 참이었지요. 그의 대표곡 ‘사이렌 심포니‘ 얘기를 내가 한 적 있던가요? 아브라모프는 전통적 악기 대신 기관차, 뱃고동, 사이렌의 굉음과 노동자들의 함성이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지도록 곡을 구성했어요. 노이즈 음악의 효시로 꼽히는 이 곡은 1922년 당시 소련이던 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초연되었어요. 하지만 그랬다는 사건이 기록되었을 뿐, 녹음본은 전해지지 않아요. 세미나를 진행하던 일본인 교수는 첫 수업 때 도식에 가까운 악보 하나를 스크린에 띄웠어요. 아브라모프의 바쿠 연주회 이후 등장한 노이즈 음악이란 전부 가치 없는 복제이자 모조입니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입을 뗐는데, 그렇다면 세미나 이름은 왜 그렇게 지었으며 우리들은 무엇을 찾아야 했던지 의문이었지요. 무얼 찾아야 할까? 캅카스 여행에 임하던 내 자세는 자못 구도적이었어요. 성스러운 것을 좇다 보면 무얼 찾아야 할지 절로 깨닫게 되리라 믿었지요. 나는 성물을 전위前衛에 두기로 해요. 눈과 귀에 담기 어려운 파편을 골라 축성했음은, 내 비겁함에 말미암았지요. 증거마저 소실된 소음의 전적을 따라, 나는 바쿠까지 육로로 넘어가리라 결심해요.

 

첨부 이미지

 

내가 가끔 얼마나 무모한지 당신은 알고 계셔요.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당장 트빌리시 자유 광장으로 가 국립박물관을 둘러보고, 현대미술관에 들러 눈에 꼭 담고 싶었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1]​의 콜라주 작품을 관람했어요. 예레반 파라자노프 박물관에 갈 수 없는 아쉬움을 그렇게나마 달래고 싶었지요. 그 후 나는 푸쉬킨 공원 맞은편에 위치한 여행자 센터를 찾아갔어요. 거기서 대뜸 아제르바이잔까지 가는 버스가 있냐고 물었어요. 직원은 자카탈라행 버스를 타야 한다며 쪽지를 하나 적어 쥐여주었어요. 거기 쓰인 대로 난 도시 외곽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지요. 버스라고는 했지만 마쉬루트카라 불리는 노란 승합차들만 잔뜩 주차되어 있었어요. 소련 잔재인 그 승합차를 타고 내가 넘어야 할 곳은 조지아와 다게스탄 공화국, 아제르바이잔이 면한 대캅카스산맥이었어요. 

 

조지아 최동단, 라고데키 검문소에 다다른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어요. 산마루에 오르자 운명을 다한 듯 승합차 시동이 탁 꺼졌지요. 나 포함 대여섯 승객은 기사의 지시에 따라 하차했어요.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고산의 선득한 밤공기가 콧잔등을 스쳤어요. 우리는 각자의 짐가방을 직접 끌고 대형 주유소처럼 생긴 검문소를 향해 걸었어요. 여권을 보여주고 게이트를 통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리도 간단히 조지아를 떠날 수 있었지요. 게이트에서 나오자 빛 한 점 없는 돌계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기서부터 아득한 내리막이 펼쳐졌지요. 36리터짜리 캐리어를 둘러메고 불균일한 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이번에는 계곡이 등장했어요. 다게스탄 고산에서 흘러들었을 검은 물은 새하얀 거품을 게걸스럽게 내뿜으며 다리 아래를 질주하고 있었어요. 계곡을 건너는 게 얼마나 공포스러웠던지, 그 경험은 내 어느 소설 습작에 ‘라고데키, 죽음의 계곡‘이라는 챕터로 박제되어 있어요. 폭 좁은 다리를 아슬아슬 건너며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요. 

ㄱ) 여기 빠지면 한국 대사관에 연락은 갈까?

ㄴ) 그런데 이 계곡은 어디 관할일까? 주조지아 대사관? 주아제르바이잔 대사관?

ㄷ) 무얼 찾아야 할까?

가까스로 아제르바이잔 검문소에 들어섰을 땐 거의 저승에 떨어진 심정이었어요. 그 심정이 정녕 현실화된 건 검문 이후예요. 총을 든 무슬림 군인들은 승객 모두의 입국을 허가했지만, 비자 준비가 미비했던 나만은 조지아로 도로 추방되었어요. 죽음의 계곡을 다시, 게다가 이제는 홀로 건너가야 했지요. 다리까지 나를 바래다준 신출내기 아제리 군인의 연민 어린 표정이 아직도 생생해요. 영어를 전혀 못 하던 그는 여기까지가 동행 가능한 지점이라는 듯, 다리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등을 돌려 자신의 땅으로 돌아갔어요. 

 

꼴 좋게 조지아 검문소로 복귀한 나는 사무실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고개 푹 떨군 마녀의 백발 같은 조지아 전통 크리스마스 장식, 치칠라키 앞에서 벌게진 얼굴로 차인지 술인지를 마시던 공무원들은 핀잔을 늘어놓았어요. 그나마 나를 긍휼히 여긴 그들은 택시를 불러주며 비수기에도 문을 연다는 호텔 몇 군데를 일러주었어요. 라고데키는 캅카스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 보호 구역이라오. 살펴 가쇼. 긍지에 찬 택시 기사가 내려준 호텔에 들어서자, 비대한 러시아인 모녀가 프런트에서 카드를 치고 있었어요. 그 일대 공기를 중화시켜야 할 의무라도 지듯 입에는 독한 담배를 문 채였지요. 흡연에 관대한 주인 덕인지 호텔 전역에는 유구한 악취가 풍겼어요. 캅카스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 보호 구역에 하룻밤 묵는 날, 하필 내가 들어선 곳은 비보호 구역이었지요. 그게 어찌나 억울했던지 눈물이 다 날 뻔했지만 꾹 참았어요. 

 

이놀라 구르굴리아 <기념비처럼 나를 덮어주오>

캅카스 여행 중에는 조지아의 가수이자 시인, 이놀라 구르굴리아ინოლა გურგულია 음악을 홀린 듯 매일 들었어요. 그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감전된 듯 몸이 떨렸던 게 기억나요. 지점에서 과감히 이탈했다가, 미세한 조정을 통해 조화로운 자리를 찾아가는 그녀의 재능에 충격받았었지요. 구르굴리아의 곡에는 치밀한 구획도 원대한 설계도 없어요. 가용한 범주 안에서 활개 치는 자유만이 담겨있지요. 그 자유가 어떤 전쟁 무기의 굉음보다 전위에 근접함을, 나중에서야 나는 깨달아요. 강령과 이데올로기가 부재한 자리에는 그녀의 정아한 힘만이 오목이 고여있어요.

 

각주

  1. [1] 이미지·민속·종교적 상징으로 영화를 만든 독창적인 소련 영화 감독. 아르메니아 혈통이지만 조지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우크라이나에서 활동을 시작했지요. 작년 한국에서도 <석류의 빛깔>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아나톨리아 편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6 아나톨리아 편지

유럽이며 아시아고 지중해권인 이상한 땅에서

뉴스레터 문의minor.historia@proton.me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