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더비와 살기

2026년 6월 16일

2026.06.16 | 조회 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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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이른 아침, 쩌렁쩌렁한 함성에 나는 잠에서 벌떡 깼어요. 그러나 사위는 이내 다시 고요해져, 꿈이라도 꿨노라 생각하며 다시 달콤한 잠에 길게 빠져들었지요. 느지막이 일어나 산책에 나서자 함성의 기원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월드컵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튀르키예는 호주에게 패배했고요. 붉은 응원복을 입은 관중들은 그길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다는 듯 야외에 진을 치고 앉아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어요. 나는 살면서 스포츠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싫어하지요. 스포츠 얘기를 듣는 것만큼 고역도 없고요. 그러나 이 나라에 온 후 쉬페르리그 스케줄을, 아니 적어도 이스탄불 더비 매치 스케줄만큼은 꿰고 살아요. 원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일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기 때문이지요.

 

쉬페르리그는 튀르키예 전국 프로 리그로, 시즌마다 총 열여덟 팀이 겨뤄요. 그중 이스탄불 연고의 세 팀에는 많은 이들의 귀추가 주목되지요. 바샥셰히르라는 신흥 팀이 꽤 부상했지만서도, 보통 이스탄불 더비라 함은 전통적인 세 팀을 일컬어요. 갈라타사라이Galatasaray, 페네르바흐체Fenerbahçe, 베쉭타쉬Beşiktaş. 이들의 홈구장에서 더비 매치가 열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경기장 근처에 가지 않는 편이 좋아요. 그 구장과 가까운 지하철역이나 선착장에도 발 들이지 않는 게 이롭지요. 모든 경로는 구장 근처를 피해 가는 방식으로 재고해야 해요. 내가 사는 집에서 페네르바흐체 홈구장까지는 도보로 십 오 분 걸려요. 처음 이사를 와서 페네르바흐체가 뭔지도 몰랐을 때, 근처를 돌아보다 이삼백 미터 정도 줄을 선 사람들을 발견한 적 있어요. 그곳이 구립 종합운동장 같은 체육 시설이라고 여긴 나는, 무언가 경기를 보러 가는 관중인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관중들의 복장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남녀 비율은 1:1로 거의 비슷했고, 히잡을 쓴 여성들도 많았어요. 모두 검거나 흰옷을 입었고요. 그들은 하나같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매우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한참 후에야 나는 그 사람들이 더비 매치 이전 출근하던 안전요원들임을 알게 됐어요. 축구 경기에 그만큼이나 많은 안전요원이 필요하단 사실에 깜짝 놀랐지요. 그도 그럴 것이, 이스탄불 더비 매치는 긴장도가 팽팽하기로 악명 높지요. 팬 간에 살인 사건까지 일어난 적 있었으니까요. 더비 매치가 열리는 날이면, 우리 동네에는 정오 무렵부터 페네르바흐체 응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요. 상징색인 남색과 노란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팬들은 삼삼오오 일찍부터 근처 펍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지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응원가를 목 놓아 부르는 사람, 북을 치는 사람, 공원에서 불을 지펴 무언가를 태우는 사람, 어디론가 바삐 뛰어가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별별 사람들이 다 등장해요. 모두 매우 고양된 상태를 유지하고요. 늦은 시간에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잠에 들 수도 없어요. 페네르바흐체 구장에 울려 퍼지는 오만명의 함성이 침실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에요.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카네티의 《군중과 관력》 표지를 청각화한다면 이 소음을 따다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곤 해요.

 

튀르키예어로 팀을 타큼Takım이라고 해요. 이 단어는 팀이라는 뜻 외에도 한 벌, 한 무리 등 다양한 뜻을 지녀요. 무슨 타큼을 따르세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나요. 잡화점에서 비누를 사려는데, 또는 구둣방에 수선을 맡기려는데 다짜고짜 그렇게 묻더군요. 무슨 팀을 물어보는 것 같은데,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스포츠 얘기를 하고 있었나? 지금이 올림픽 기간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종목 게임이 진행 중인가? 별별 생각이 머리에 스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타큼 질문은 일반적으로 축구팀에 관계된 것이었어요. 내가 당연히 축구를 볼 것이라는 전제하에 어떤 축구팀 팬이냐고 물은 거지요. 그러나 그 질문은, 단지 어떤 축구팀을 지지하냐는 물음만은 또 아니었어요.

 

내가 여기 살며 관찰한바, 쉬페르리그의 팀들 - 특히나 이스탄불 더비 팀들은 그냥 축구팀이 아니에요. 시민의 삶에 깊고 치밀하게 파고든 사회 기반에 가깝지요. 세 팀이 어떤 상징을 지니는지 찬찬히 볼까요? 이스탄불 유럽 지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갈라타 탑을 들어보셨겠지요. 탑이 세워진 갈라타는 중세에 제노바 상인들이 정착한 지역이었어요. 사라이는 궁정이라는 뜻을 지니지요. 갈라타 지역에는 15세기, 한반도로 치면 조선 성종쯤에 궁정 학교가 하나 지어졌어요. 갈라타사라이라 이름 붙은 이 학교는 이후 근대 엘리트 교육 기관으로 발전하지요. 이 학교 학생들이 1905년 창단한 축구 클럽이 바로 갈라타사라이 클럽의 시초였어요. 갈라타사라이 졸업생들의 연대감과 소속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요. 갈라타사라이는 오늘날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나뉘는데, 고등학교는 탁심 광장 한복판 노른자 땅에 위치해 있어요. 내가 아는 한 졸업생 어르신은 칠순에 이를 때까지도 모교 앞에 있는 술집에 가기만을 고집하셨어요. 그러면 정말로 동년배 졸업생들이 하나둘 나타나, 이거, 이을마즈 아닌가? 하고 어르신을 알아봤다고 하지요. 갈라타사라이를 졸업한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예요. 갈라타사라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학교가 몇 년도에, 무슨 술탄에 의해 지어졌으며, 졸업생 중 유명인사는 누가 있고, 줄줄이 학교 연혁을 읊지요. 이들이 이만큼의 자부심을 부리는 것은 단지 감상적 차원에서가 아니에요. 보통 사람들은 갈라타사라이 스포츠 클럽에 가입하려면 어마어마한 가입비를 내야 하는데, 졸업생들에게는 상징적인 금액만이 부과되지요. 말하자면 졸업생들은 거의 프리패스로 스포츠 클럽에 가입할 수 있는 거지요. 이렇게 성골로 가입한 층과, 학연과는 상관없이 유입된 진골 회원 간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맴돈다고 해요. 갈라타사라이는 축구 이외에도 농구, 배구, 수영, 육상, 조정 등의 스포츠팀을 가지고 있어요. 회원에게는 이 경기들을 먼저 관람할 수 있는 우선권이 부여되지요. 티켓 금액도 할인되고요. 또한 회원들은 갈라타사라이가 이스탄불 전역에 지은 스포츠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요. 수영장, 헬스장, 요트와 조정 시설 등 엄격히 관리된 체육 시설에 출입할 수 있는 거지요. 뿐만이 아니에요. 갈라타사라이는 보스포루스 한복판에 아예 자기들의 섬을 따로 갖고 있어요. 그 인공섬 안에 따로 수영장을 지어놔 보스포루스의 기가 막힌 풍경을 프라이빗하게 감상하지요. 레스토랑과 라운지 등 사교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회원들은 거기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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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네르바흐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김연경 선수가 오래 뛴 여자 배구나 농구, 복싱, 심지어는 e-스포츠팀까지도 갖고 있지요. 사실 종목 수로만 따지면 갈라타사라이보다도 더 많은 종목 팀을 운영해요. 우리 동네에는 페네르바흐체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스포츠 시설이 산재해 있어요. 페네르바흐체라는 것이 통상 지명인데, 집에서 요트 마리나를 지나 페네르바흐체 공원까지 쭉 걷다 보면 그 다양한 시설들이 하나둘 나타나지요. 그 길을 따라 러닝을 하는 페네르바흐체 소속 선수들도 가끔 보이고요. 선수들을 위한 특수 시설이 주를 이루지만, 클럽 회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생활 시설도 매우 많아요. 튀르키예는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생활 인프라가 늦게 발달했어요. 따라서 이런 회원제 스포츠 클럽들이 자체적으로 시설을 짓고 회원들을 유치해 운용해 왔지요. 간혹 이스탄불 더비 팀들을 비교해 놓은 글에서, 갈라타사라이 클럽은 세속주의적이고 엘리트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그 라이벌인 페네르바흐체는 보수적이고 서민의 지지를 받는 클럽이다, 이렇게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튀르키예 정치 구도는 매우 복잡해서 좌-우, 세속-보수의 이분법적 잣대가 적용되지 않아요. 페네르바흐체는 어떤 측면에서도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고요. 차라리 다른 클럽에 비해 더 대중적이며 기업과의 관계가 깊은 팀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이를테면 2025년까지 클럽 회장을 지낸 알리 코치는 튀르키예 제1의 재벌, 코치Koç가의 핵심 인물이지요. 또한 튀르키예 출신으로 미국에 가 유제품 기업을 차린 억만장자 함디 울루카야가 파격적 스폰서쉽을 제안해 경기장 명명권을 사들였지요. 따라서 현재 그의 기업 초바니Chobani가 페네르바흐체 홈구장 이름을 장식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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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쉭타쉬에 관해서는 최근 들어 약간의 흥미가 생겼어요. 베쉭타쉬로 이적한 오현규 선수 덕분이지요. 우리에게 베쉭타쉬라는 이름이 생소한 만큼(베식타스보다는 베쉭타쉬가 현지어에 가깝답니다), 튀르키예인들에게 오현규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매우 어려워요. 대부분의 친구는 내게 오, 너무 잘하더라···오, 항, 그···하고 말을 줄이지요. 우연한 기회로 나는 최근 베쉭타쉬 클럽 회원인 친구 부르카를 만날 수 있었어요. 부르카와는 에게해 닷차에서 처음 알게 됐어요. 소르본 대학을 자퇴하고 닷차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그는, 파리에서는 좌파·반파시즘적 색채가 강한 레드 스타를 지지했다지요.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레드 스타가 창설된 해, 1897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어요. 닷차에서 이스탄불은 버스를 타고 열세 시간 정도 걸려요. 가는 길도 평탄하지 않고 험준하지요. 부르카는 그 길을 오직 베쉭타쉬 선거만을 위해 오간 적 있다고 운을 떼어요. 해외에 사는 팬들은 가족 얼굴도 볼 새 없이 선거만을 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요. 만수르 같은 구단주가 맨체스터 시티를 거느릴 수 있는 것과 달리,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스탄불 클럽들에서는 투표와 회장 선출, 이사회 구성 등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요. 회장 후보들은 텔레비전에 나와 토론을 벌이고 공약을 내걸기도 하지요. 선거 날은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소속 선수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에 축제 같은 분위기가 난다고 하더군요. 나는 부르카에게 언제부터 베쉭타쉬 팬이 됐냐고 물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아빠도,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야. 뼛속부터 베쉭타쉬! 부르카가 처음 본 축구 경기, 처음 유소년 농구를 뛴 팀, 처음 가입해 본 클럽, 모든 게 베쉭타쉬로 시작되었다지요. 베쉭타쉬 팬클럽을 차르쉬Çarşı라고 불러요. 차르쉬에게 베쉭타쉬는 승패에 따라 애정도나 충성도가 달라지는 한낱 스포츠팀이 아니라, 이기든 지든 결국 한솥밥 먹고 한 지붕 아래 자는 가족이라지요. 또한, 베쉭타쉬 팬들은 운동가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도 해요. 2013년 이스탄불에서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때 차르쉬가 주축이 되었다지요. 부르카의 설명에 의하면, 베쉭타쉬 팬들은 경기 때 사용하는 그들만의 수화가 있다고 해요. 따라서 시위 때 그 수화를 사용해 더 효과적이며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지요. 단합력은 빛을 발했고요.

베쉭타쉬 클럽 회원증. 주민등록증처럼 생겼고 특이하게도 아버지 이름을 쓰는 칸이(!)
베쉭타쉬 클럽 회원증. 주민등록증처럼 생겼고 특이하게도 아버지 이름을 쓰는 칸이(!)
베쉭타쉬의 상징 검/흰 저지를 입은 부르카. 그가 그려준 엽서에는 ‘이게 베쉭타쉬지! 신재에게, 부르카가.’
베쉭타쉬의 상징 검/흰 저지를 입은 부르카. 그가 그려준 엽서에는 ‘이게 베쉭타쉬지! 신재에게, 부르카가.’

부르카는 차르쉬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분야와 관계없는 사람들과 그토록 우정과 연대를 쌓아갈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해요. 그와 헤어지며, 그가 이스탄불을 또 방문할 때 베쉭타쉬 경기를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했어요. 부르카는 ‘오‘가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그날 술값 걱정은 붙들어 매도 되겠다고 함박웃음 지었어요. 온 차르쉬 사람들이 내게 공짜 와인을 돌릴 거라면서요. 정말 그럴 날이 올지요. 온다면 그 이야기 또한 당신께 전해드리도록 하지요.

 

하칸 알툰, 자페르 알괴즈 <베쉭타쉬 뎀바바 응원가>

세네갈 출신 선수 뎀바 바가 베쉭타쉬에서 한창 활약할 때, 팬들은 한 곡을 개사해 뎀바 바에게 헌사했어요. 영상에서 이들은 세네갈에 있는 차르쉬들에게 바친다며 뎀바 바의 이름을 줄곧 외치지요. 곧 이 곡은 베쉭타쉬 팬들 사이에 유명해져 경기장에서도 이 노래가 울려펴지곤 했다지요. 흥 빼면 시체인 이곳 사람들에게 찬사의 대상은 인종과도 국적과도 관계 없는 듯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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