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가 되면 늘 드는 생각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어쩌다 이렇게 내 순번은 빨리 돌아오는 걸까?’라는 묘한 억울함. 이번엔 어떤 주제를 풀어볼까 고민하다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이 생각나 나름 흥미진진했던 ‘국회의원실 기록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부드러운 직선’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다면, 그냥 웃으며 넘어가 주시길 바란다.
첫 만남: 복도에 널부러진 ‘기록물 더미’
2016년 5월 30일, 제20대 국회가 새로 시작되던 날이었다. 당시 국회를 배경으로 한 ‘어셈블리’라는 정치 드라마가 유행한 후였고, 나 역시 드라마 속 웅장한 국회 풍경과 사뭇 진지함 가득한 첫 출근길을 은근히 기대했다. 마음 속에는 이미 잔잔한 배경음악이 재생된 상태였고, 굳건한 각오로 문을 열면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과 법안 자료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기대를 비켜가는 법. 의원회관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뜻밖에도 ‘기록물 더미’ 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국회의원실에서 일하며 기록관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앞으로 ‘기록’이라는 세계가 내 삶 깊숙히 들어올 것이라는 어떤 운명의 신호였을까? 아니면 필연의 신호였을까?
마주한 ‘기록물 더미’에는 인사청문회 자료, 국정감사 보고서, 예산안 검토자료와 같은 주요 기록물들이 복도를 무질서하게 점령하고 있었고, 훗날 알고 보니 이러한 풍경은 이례적인 풍경이 아니라, 국회의원 교체 시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이러한 기록물들의 운명 또한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각 층을 가득 채운 ‘기록물 더미’들은 청소노동자의 손길을 거쳐 지하 4층 문서 세단실로 이동한 뒤 파쇄기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아쉬워하거나 문제 삼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여기는 대한민국 국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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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문자: “답변하지 마세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2017년부터 국회감시어벤저스(정보공개센터, 좋은예산센터, 세금도둑잡아라, 뉴스타파)라는 이름으로 국회감시 활동을 진행하며, 300개의 국회의원실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한 적이 있다. 국회의원실의 기록관리 실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소속된 정당의 보좌진협의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보좌진 전원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단체문자를 발송했다.
허허, ‘돌출행동’이라니! 마치 작전 수행 중인 비밀 요원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
‘친절한’ 회보의 등장
기록관리 문제의 정점을 찍었던 사례도 있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나라가 시끄럽던 2017년 6월, 국회 사무처에서 ‘국회 문서관리 및 파기에 관한 회보’를 배포했다. 내용은 이랬다.
이렇듯 회보는 너무도 친절했다. 기록물 파기 방법까지 정성껏 안내하며 보좌진들이 ‘효율적 파기’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으니. ‘기록물은 남기지 말고 파쇄기로!’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이 회보는 기록관리에 대한 국회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회의원실 기록관리: 혼돈과 무질서의 장
국회의원실 기록관리의 현실은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이다. 기록물은 쏟아지듯 생산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의원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대다수 보좌진들이 외장하드나 클라우드에 자료를 쌓아두며 “내가 맡은 건 내가 알아서”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한다.
어떤 보좌진은 텔레그램 방을 자료 저장소로 쓰기도 하고, 몇 년 치 문서를 개인 USB에 저장해 두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보좌진 개인의 업무스타일이나 인식에 따라 기록관리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기록물을 보좌진 또는 국회의원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는 현실은 기록관리의 단절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기록물 폐기 과정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공공기관에서는 엄격한 기록물 폐기 절차가 적용되지만, 국회의원실에서는 이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전무하다. 보좌진들은 자료가 너무 쌓여 감당이 안 되는 순간이 오면 기분 전환 삼아, 그리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쇄를 한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기록물 폐기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변질된 상황은 국회의원실 기록관리가 얼마나 방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록관리, 왜 ‘팔자 좋은 소리’로 여겨질까?
국회의원실의 기록관리 부재로 보좌진들의 업무 효율성이 심각하게 저해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과거 자료를 찾기 어렵고, 자료를 재활용하지 못해 업무가 초기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퇴직한 보좌진의 기록은 주요 기록이라 할지라도 접근이 어려워지고, 같은 자료를 여러 번 요청하거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비효율성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국회 업무의 연속성을 해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보좌진들에게 기록관리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 기록관리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그거 팔자좋은 소리 아니냐”는 반문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보좌진들이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국회의원실은 일상적으로 바쁘고, 업무의 정형화가 부족하며, 인적 교체 또한 빈번하다.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추가 업무로 여겨지는 데다, 무엇보다 기록관리에 대한 법적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국회에서 「국회의원 기록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려는 여러 움직임과 노력도 있었지만, 어느 기록전문가의 표현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회기록보존소의 노력에도… 현실의 벽
이렇듯 혼돈의 국회의원실 기록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기록보존소는 국회의원실 기록물의 체계적 생산과 수집을 돕고, 이를 입법부의 역사적 사료로 남기기 위해 제도적 정비는 물론,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특히 「국회의원 기록관리 매뉴얼」을 통해 국회의원실 기록물의 생산, 등록, 정리 절차와 더불어 기록물을 기증하거나 활용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있으며, 국회 대(代)가 바뀔 때마다 국회의원 의정활동 기록을 수집하기 위한 노력 등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국회기록보존소가 마주한 현실은 만만치 않다. 기록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의원실의 협조가 필수적이지만, 국회기록보존소가 추진 중인 교육과 홍보도 의원실의 바쁜 업무 환경 속에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국회의원실에서의 기록관리는 그저 ‘팔자 좋은 소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기록관리, 이제는 체계로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국회의원실 기록관리를 체계적으로 바꾸려면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통합적인 기록관리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국회의원실의 업무특성을 고려하여 실제 의원실에서 쉽게 접근,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또한, 법적 근거 강화도 중요하다. 국회의원실 기록관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어야 기록이 단절되지 않는다. 국회의원실은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인 만큼, 기록관리가 개인적 선택이 아닌 법적 책무로 자리 잡아야 한다.
여기에 더해, 보좌진과 국회의원의 인식개선도 중요하다. 기록관리를 시간 낭비가 아닌 업무 효율성과 연속성을 위한 필수 도구로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분산된 개인 기록에서 벗어나 공적 기록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회의원실 기록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다. 국회의 역사를 보존하고, 국민과의 약속을 기록하며, 후대에 정치적 지혜와 교훈을 전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이제 기록관리를 단순히 ‘팔자 좋은 소리’로 여기는 현실에서 벗어나, 국가적 자산으로 인식하는 환경이 만들어 지기를, 그리하여 국회의원이 남긴 발자취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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