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베스님의 글입니다.
1. 기록연구사, 가슴 뛰는 시작
원고 청탁을 받고 나면 여유를 갖고 나의 생각과 성찰을 오롯하게 반영할 수 있는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곤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감 전날 밤 부랴부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생활이란 분주하지만, 그럼에도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더 늦기 전에 거의 20년 동안 소위 '기록전문가'로서 일했던 시간을 정리하고 싶었다. 두 번째 이유가 더 큰데 그간의 경험들이 비록 우왕좌왕,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었더라도 기록공동체에 도움이나 공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미약하지만 말이다.
2005년 처음 기록연구사로 중앙행정기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뜨거운 가슴으로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공공기록물법>을 나침반 삼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법령에 따라 전 직원을 교육하고, 지침을 만들고 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나만의 사명에 취해서 혼란스러워하는 직원들의 눈빛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차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빈번하게 경험했고 깊은 고민과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양보나 협상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통탄과 번민 속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기억들이 많다. 국가기록원 등 관련기관 출장 후 복귀하는 길에서는 언제나 업무중에 겪는 좌절, 어려움을 다른 기관의 연구사 동료들과 '격렬하게' 나눴고, 그 과정에서 목소리가 커져 주변 승객들로부터 종종 시끄럽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편이 아니었지만, 기관에 단 한명밖에 없는 '특정직'으로서 늘 외로웠던 우리는 서로 나눌 이야기들이 매번 넘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려움과 좌절을 이야기하는 중에도 늘 그 중심에 기록관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었다. 투박하고 요령은 없었지만, 순수하고 열성적으로, 수십년간 체계가 없던 기록관리 업무의 루틴을 만들고, 전직원 교육, 업무 매뉴얼 등을 제작하며 열심이었다.
당시 '초짜' 기록연구사로서 일했던 나의 모습과 관련되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기록연구사로 일을 시작한지 3년 후 쯤 기관에서 무섭기로 소문났던 국장님을 퇴직 후에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국장님은 나를 기억했고, 딱히 연관될 게 없던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고 해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국장님은 퇴직을 준비하며 통상적으로 그렇듯 엘리베이터 앞에 버릴 책, 문서 등을 폐기하려고 두셨는데 새파랗게 젊은 직원이 와서 "무단파기하면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셨다. 내 기억에는 없는데 당시의 나는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기록관리 전사' 같은 모습이었나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열정의 파고만큼 현실의 벽과 좌절은 깊었다.
새롭게 기록전문가로 일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는 처음의 열정은 고요히 가슴에 품되, 내 조직의 분위기와 직원들에게 익숙해질 수 있게 더 정성과 시간을 쏟기를 권한다. 기록관리 일의 결과나 성과는 오래 걸려 겨우 눈에 보이는데, 나의 열정만 앞서면 나만 지치기 때문이다.
2. 조직의 통폐합을 겪으며
겨우 조직과 동료들에 익숙해질 즈음 조직의 통폐합을 겪게 되었다. 갑자기 거대한 기관의 기록연구사가 되며 점차 기록관리 업무는 실제 기록물은 보지 못한 채, 행정 업무만 하고 있었다. 적절한 규모의 기관에서 기록물을 다루며 작업을 하다, 온라인으로만 기록물 작업을 하기에도 바쁘다 보니 점차 업무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다시 업무에 재미를 느끼게 했던 방법이 정책연구과제 수행이었다.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을 발견했고 개선안은 찾고 싶은데 여건은 안되고, 자료를 보거나 분석할 시간이 없으니 답답하던 때에 우리 기관 맞춤으로 전문가들을 통해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안을 찾아갈 수 있으니 나에게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매년 수행하면서 달콤한 열매만큼 행정절차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 전체 노력의 50% 이상을 행정처리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갈등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좀 더 의도적으로 매년 정책연구과제를 수행했던 것 같다. 조직에서는 나눌 수 없었던, 업무 과정에서의 고민을 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원들과 이야기하는 과정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나에게는 정책연구과제가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년 반복되고 고민이 많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충전방법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3. 생활속의 기록
외국에서 잠시 살 기회를 갖게 되면서 기록관리를 업무가 아닌 시민의 관점에서 접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 대부분 다양한 나라의 이민자들로 구성된 캐나다에서 장년들의 소일거리는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공공도서관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기록관을 찾아 조상들의 흔적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으러 왔다가 익숙하게 기록관도 이용하는 그들을 보면서 시민들의 접근성을 고려하면 도서관과 기록관이 함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업무에 대한 부담없이 접하는 기록은 개인의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해주는 것이어서 대학원 시절 초심의 감성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는 업무 특성상 큰 변수가 없는 한 퇴직할 때까지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기회가 된다면 긴 직장생활 중에 잠시의 휴식과 환기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기록을 다른 관점과 태도로 보며 여유를 얻는 일은 삶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다.
4. 기록관리가 아닌 다양한 업무를 접하며 깨달은 것
나에게 기록관리 업무 중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새로 오신 과장님께 나의 업무를 보고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직장 생활을 했다면 대부분의 직원들에게 이미 익숙한 운영지원과(서무행정) 업무와 다르게 기록관리는 용어부터 생소한 게 사실이다. 현안을 보고하면서도 그것이 왜 현안인지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한 단독 업무의 특성상 옆 자리 동료와 공유가 되지 않아 업무의 애로사항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어려웠다. 왜 내가 바쁜지, 나는 왜 동료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지 그들은 잘 알지 못했다. 당연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공감하기 어려웠고 나는 지칠 때가 많았다.
기록관리 업무만 전담할 때는 나의 이런 상황에 대해 주변만을 원망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작년부터 예산결산, 국회, 국정감사 등의 업무를 맡게 되면서 조직의 관점에서 기록관리업무가 어느 정도 중요한지 넓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기록관리가 전부이고 제일 중요하지만 조직과 운영에서 봤을 때는 예산이나 국회 관련 일이 더 큰 게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넓은 관점에서 보니 나의 상태와 현안을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용어와 관점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이해했고 고민했으며 조금씩 효과를 보고도 있다.
그리고 업무라는 것이 오직 일, 과업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산의 활용, 조직의 상황에 대한 판단, 주변 동료들의 협조 또한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기록관리 업무만 할 때는 보안업무 담당자와의 협력이 어려웠지만, 보안 총괄을 하게 되면서 그들과 협업하여 대외비 생산, 활용, 재분류 후 기록관 이관까지 통합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대부분 1인 단독 업무라는 한계와 '고독' 속에서 우리는 업무에 대한 이해나 협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기록관리 업무를 기관 안에서 확산시키고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과 소통이 '분명' 있음을, 그리고 그런 주변 장치를 활용하기를 권한다.
5. 미래에 대한 계획?
기관내에서 기록전문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법령과 제도를 바꾸는 일은 지난하고, 상시적이고 필수적인 일에조차 여러 변수가 개입하여 지연되거나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동료들이 기록관리를 조금씩 알게 되고 그들의 업무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며 조용한 보람을 느낀다.
미래에 대한 계획? 과연 계획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뒤에 올 사람을 위해 내가 일하는 동안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한계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싶다. 예를 들면 과거에 생산한 기록물에 포함되어 있던 비전자 문서를 현재 시점에서 찾는 현안 등 여건적인 한계가 분명한 일들이 그것이다. 최선을 다해 추진하되 시간이 흘러도 처리할 수 없는 미정리 과제들에 대해서는 그 연혁과 한계를 아는 담당자로서 마무리를 짓고 싶다.
두서없는 글을 쓰며 지나온 시간들을 다시금 생각하다 보니 힘들었던 기억보다 도움받고 격려 받았던 고마운 기억들이 많이 떠오른다. 나에게 기록관리의 길을 안내해 주신 교수님, 힘들 때마다 함께 고민하고 격려해 준 기록공동체의 동료들, 미우나 고우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기록원 직원 등. 빈틈투성이인 내가 이 길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에는 그들의 도움이 컸다. 특히 각자의 자리에서 이 과정을 함께 겪은 기록전문가 동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 이것 역시 기록의 효과인 것 같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지난날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들은 '폐기'하고 나의 경험과 지식들을 잘 '선별'하여 우리 기관만의 특성을 고려한 기록관리 안내서를 만드는 것이 나의 마지막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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