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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관리와 인격(personality)이라는 서먹한 관계
한국의 기록관리는 주로 행정영역에서 자생해왔다. 공공의 의사결정과 정책 집행 과정이 온전히 기록되고 또 공개되어 국민의 알 권리를 신장하고 의사결정 과정의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목적이다. 이 과정에서 기록학 연구자와 실무자들은 기록관리에서 ‘사람과 주관의 영역’, 즉 인격을 배제하려고 했다. 자동적, 무의식적, 수행적인 축적을 앞세워 인간이 가지는 가변적이고 자의적인 속성, 혹은 목적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속성으로부터 기록의 신뢰성과 증거성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이는 법정에서의 증거력과 관계가 있다).
기록학에서 줄곧 상용된 ‘유기체’(Organism)라는 은유는 이러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보존 대상인) 기록이라는 ‘살아있는 존재’는 기록 생산자나 관리자의 인격과 별개로 자생한다. 기록이 축적되어있던 ‘원질서’(original order)를 고스란히 보존한다면 장기적으로 언제든 기록을 생산한 업무활동과 행위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근대 초기 기록학에서 아키비스트는 수호자(‘keeper’)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물리적 기록 그 자체라기보다 기록군(group)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유기성’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보존 대상으로서 기록은 문화적으로 상용되는 의미보다 더 엄밀하고 엄격하게 규정한 반면, 법과 표준을 앞세워 기록관리자의 존재감은 최소화해왔다.
국회기록원 설립과 인격이라는 변수의 부상
한편 사회적으로 기록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대상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일찍히 기록관리가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또 계승하기 위한 문화적인 역할까지 도맡아 왔다. 국내 기록관리는 이러한 문화적 기능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이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두드러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정치영역이다. 2000년대 초 국회기록보존소가 설립된 이후부터 국가적 의사결정 과정을 담고있는 정치영역 의정활동기록 개념이 논의되었고 특히 입법자(lawmaker)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기록이 주로 다뤄졌다. 해당 기록의 속성과 기록화 전략, 최근에는 좀더 면밀하게 의정활동기록의 출처나 기록관이 기록 생산자인 의원/보좌진과 어떤 관계를 모색해야 하는지까지 그 관심의 범위를 넓혀왔다. 그리고 올해 초 국회의원과 정당 기록관리를 주요 기능으로 앞세운 국회기록원이 설립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기존 행정영역에서 준용되던 기록시스템의 자동화·표준화, 혹은 수행적인 기록 생산의 틀은 정치영역과 부조화했고 여전히 삐걱대고 있다(기록시스템을 통해 ‘이관’된 국회의원 기록은 미약한 수준이다). 과거에도 기록관리자는 의원과 보좌진이라는 주요 기증자이자 기록 생산자에게 기록을 기증해주길 읍소하고 일일이 설득해왔지만 많은 경우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법이라는 강제할 수단이 없어서였을까? 그런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신뢰 여부’라는 커다란 벽이 의회기록 체계의 한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들어서서 기록시스템의 자동 수행을 불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주요한 변수는 의원과 보좌진이라는 ‘자율적 인간’과 인격일 수 있다. 의정활동기록의 생산부터 활용까지 이러한 요인이 뗄 레야 뗄 수 없이 깊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과 보좌진, 그리고 하나를 덧붙인다면 정당이라는 인격이 정치영역 기록관리의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 언어와 기록 언어의 차이
기존 공무원들만을 대상으로 했던 기록관리를 넘어, 이제 국회의원과 그 보좌진들을 기록 생산자로 새로 포섭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기록 언어와 의원/보좌진의 언어는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결합할 수 있는지, 여기서 ‘사람의 영역’ 혹은 ‘마음과 인격의 영역’은 어떻게 수용되고 기록관리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지 재고해야 할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앞서 제기한 것처럼 당연하게도, 정치영역 기록 생산자의 언어와 기록의 언어는 구분된다. 정치는 기업과 같이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삼는다. 반면 기록은 동시대 대중 혹은 후대를 대상으로 큐레이션하는 영역으로 나아간다. 정치는 의정보고서처럼 의정활동을 자신의 성과로만 소모하며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입지와 재선출을 호소하지만, 기록은 이러한 현재적 의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조건에서, ‘외부자들’에게 기록이 가진 가치와 의미에 대한 해석권을 상당 부분 이양한다.
정치 언어와 기록 언어의 차이는 생산자가 여전히 기록 해석의 키를 쥐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그 키를 동시대와 후대의 이용자에게 이양하는지, 서사를 통제하고 기록을 통해 의원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국민의 참여를 독려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기록이 각약각색 다양한 서사의 재료로 쓰이도록 장려하는 것을 종착지로 삼는지의 차이다. 이런 점에서 기록으로 보존한다는 것의 의미는 기록의 주인을 뒤바꾸는 것까진 아니라 할지라도, 기록 생산자의 통제 바깥으로 기록이라는 배를 띄어보내며 해석의 독점을 점진적으로 해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영역 기록관리의 난점들
여기서 정치영역 기록관리의 난점이 두드러진다. 첫째, 정치활동의 취약성이다. 기록은 누군가의 행위를 경유한다. 다만 특히 정치영역의 행위는 의원과 보좌진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조급한 평가와 취사선택에 노출되어 있다. 의정활동기록의 단기적 수요자가 의정 평가와 감시, 수사를 앞세운 시민단체와 언론, (전)검찰—공수청과 경찰이라는 점이 단적인 사례다.
의원과 보좌진은 자신의 행위를 자기 서사와 관점에 안전하게 가둬두길 선호한다. 그만큼 그 행위는 타인의 의도나 정치적 프레임(framing)에 의해 오용, 오해, 왜곡되거나 짜깁기, 남용되어 향후 의원 자신의 정치 행보에 영향을 줄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영역에서 이미 모든 주체의 행위는 그 본연의 의미를 넘어 과장되게 넘치거나 과소평가되기 쉬우며 기록이 재현하는 행위는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쉽게 독점되고 또 오염되어, 우리가 보고자 하면 할 수록 그 내부의 의미를 덜 보게 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한다(이런 점에서 어쩌면 정치영역에서의 행위가 (매개)행위 자체로 존재하고 또 해석되기 위해서는 몇 십년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두 번째 난점은 인격이라는 변수다. 의정활동 기록의 특성은 그 생산자가 살아있을 뿐더러, 여전히 현역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 이용자와 해석자, 심지어 관리자의 자율성에 제동이 걸린다. 클라우드와 같은 스토리지(storage)와 업무도구(tools)를 제공하는 등 기록 생산자가 의정 업무를 수행하는 데 유용함을 제공해야 하는 실리적 측면 외에도 생산자의 품위, 명예, 정치적 목표, 그 사람의 만족감과 같은 정서적 측면이 상당부분 기록관리 전체 프로세스에 우선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기증자 및 생산자와 신뢰 어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기증자 및 생산자에게 어떤 측면이든 효용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적어도 그들에게 익숙한 틀이나 서사(구조)로 자신의 역사를 회고, 정리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쯤은 마련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기록을 외부로 책자, 전시 등의 형태로 큐레이션하거나 교육자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하는 등 이용자 관점으로 기록을 재배치하고 기록 향유층을 넓히는 아웃리치(outreach) 과정을 지연시키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혜택(?)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역설의 구조를 만든다.
마지막 난점은 기록 생산 맥락의 복잡성이다. 하나의 의정활동기록을 외부의 누군가에게 설명하고자 하면 상당한 내외부 배경 지식을 끌어와야 한다. 내부 지원 기관은 물론 외부관계자의 영향을 받고 이를 매개하는 의정활동의 특성상(이원영, 2004*) 이러한 맥락의 지도를 구축하려면 의원과 보좌진 등 기록 생산자뿐 아니라, 행정부, 정당, 시민단체, 국민을 비롯해 해당 의원의 의정활동에 영향을 준 다양한 이해관계자로부터 폭넓은 맥락을 기록 수집과 동시에 확보하고 기술(discription)해둘 필요가 있다.
정부기능분류(BRM)와 같이 이미 업무 맥락이 상당부분 표준화된 행정 영역과 달리, 매 의원마다 의원의 의정활동이 가지는 고유한 업무 맥락(보좌진의 업무 분장이나 파일링 구조 등)을 의원이나 보좌진 등으로부터 확보하고 탐구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관련된 시민 여론과 사회 변화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기록과 함께 남겨야 한다(이로서 정치영역 기록관리에서 수집단계가 가장 핵심적이면서 품이 많이 드는 단계일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햇볕 정책 그리고 외교의 길
이러한 난점들이 정치영역의 기록관리에 산재해있다. 자신의 활동을 승리와 선전의 기록으로 남기려는 정치의 언어와 그 전권을 동시대 이용자와 후대에 이양하려는 기록의 언어는 앞으로도 경합할 것으로 보인다. 그 간극은 어쩌면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이 성공적이려면 그리고 지속 가능하려면 정치영역의 기록관리는 이 두 언어 모두에 능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외교라는 방식을 도입해볼 수 있다. 외교란 알다시피, 두 요인이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고, 완전한 합의를 이루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관계는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기술이다. 상대의 존재양식과 수요에 맞춰 ‘적절한 언어’로 말하는 방식을 체득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정치 언어’와 협상하고 교섭하며 ‘공동의 언어’를 개발해가면서도 분명한 원칙을 앞세우고 기록관리의 전문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의회 구성원에게 의정활동기록의 가치를 환기하고 기록원 안팎의 다양한 방식의 보존을 촉진하고 권장하면서도(그게 꼭 국회기록원일 필요는 없다!), 기록원의 지식자원과 기술(technology), 각종 베네핏 제공을 통해 자발적 기증을 유도하는 일종의 ‘햇볕 정책’을 펼 수도 있다. 물론 외교의 길이란 쉬운 길이 아니고 아주 까다롭고 지난한 길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다소 두서없는 논의를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정치영역 기록관리 전반에 ‘인격의 영역’과 정치 언어를 기록 자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이로부터 혁신적인 외교 전략을 마련해갈 필요가 있다. 단, 외교란 이해관계가 다른, 서로 독립한 두 주체를 전제한다. 이는 국회사무처, 국회예산정책처와 같이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기능에 국한된 다른 소속기관과 국회기록원의 역할을 구분짓는다.
요컨대 정치영역 아키비스트는 지금 살아 숨쉬는 기록 생산자의 존재양식과 언어를 이해하고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면서도, ‘기록 생산 행위’ 외부에 있는 동시대 기록 이용자와 후대의 언어를 가늠하고 이 둘을 중재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이원영 (2004). 의회기록의 특질과 종류. 기록학연구 9. pp.11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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