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 공지사항

E.

기록의 빈칸, 문서가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다.

차가운 화살표 속에 숨겨진 기억 수집 프로젝트

2026.03.10 | 조회 649 |
0
|
from.
ArchMuse
기록과 사회의 프로필 이미지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사진 1.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 ArchMuse
사진 1.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 ArchMuse

1. 전쟁사 기록의  '여백'

아키비스트의 서가는 고요하지만 치열합니다. 수만 건의 ‘전쟁·군사 기록물’ 을 정리하다 보면, 문득 설명하기 어려운 정적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지도 위를 가쁘게 오가는 화살표와 좌표, 빼곡하게 적힌 병력 숫자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기록들 사이에는 사실 거대한 ‘빈칸'이 존재합니다.

공식 기록은 '무엇(What)'이 일어났는지 그 전개 과정과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담아냅니다. 하지만 수치와 좌표로 치환된 그 정연한 기록은, 그 순간을 견뎌낸 인간이 '어떠한(How)' 마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전쟁사는 대체로 작전문서를 뼈대 삼아 정리되고, 그렇게 공식 역사로 굳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단단한 기록의 행간 사이에서 늘 되묻게 됩니다.

사진 2. 국군 제9사단 작전명령 제85~90호(1952.10.6.~10.15. 백마고지 전투) / 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2. 국군 제9사단 작전명령 제85~90호(1952.10.6.~10.15. 백마고지 전투) / 출처: 국가기록원

“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그 안의 희생을 저 정연한 문서로 다 보여줄 수 있을까? ”

 

전쟁의 참혹함은 숫자가 아닌 삶을 통해 느껴야 하는 것이기에, 2020년부터 저는 참전용사분들을 만나 그들의 구술(증언)’을 기록해 왔습니다. 혹자는 주관적인 기억의 불확실성을 말하며 구술의 객관성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파편화된 기억들이 모여 교차 검증될 때, 구술은 공식 문서의 경직성을 깨고 역사의 빈틈을 메우는 강력한 실체적 증거가 됩니다. 구술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문서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현장의 구체성과 맥락을 복원하는 핵심 사료이기 때문입니다.

 

2. 훈장에 갇혀있던 ‘긴 침묵’을 깨우다.

사진 3. 전쟁기념관 참전용사 구술채록 리허설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사진 3. 전쟁기념관 참전용사 구술채록 리허설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전쟁기념관에서 구술채록, 유물기증 업무 등으로 만난 100여 명의 참전자분들은 70여년 세월의 무게만큼 노쇠해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목소리에서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날의 기억만큼은 훈장의 각인된 태극 문양처럼 선명하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참혹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 수첩에 적었다가도, 그 내용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스스로 수첩을 태우기를 반복했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저는 기록되지 않는 역사의 무게를 실감했습니다. 그 무게를 보여주는 한 참전용사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최초 K-군번 카투사 1기, 류영봉 이등중사>

사진 4. 류영봉 기증사진(1952년 부상병을 진료했던 벙커 앞 기증자 모습)
사진 4. 류영봉 기증사진(1952년 부상병을 진료했던 벙커 앞 기증자 모습)
사진 5. 류영봉 기증사진(1952년 부상병을 진료했던 벙커 앞 기증자와 동료 모습)
사진 5. 류영봉 기증사진(1952년 부상병을 진료했던 벙커 앞 기증자와 동료 모습)

류영봉 선생님은 한국전쟁 당시 카투사(KATUSA) K-군번 1기로 UN군에 배속되어 활약하면서 인천상륙작전부터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등을 직접 경험하고, 전후에는 미8군 병원에 근무하며 평생 환자를 돌보면서 봉사하셨습니다.

2021년 7월, 구술채록 사업으로 만난 류영봉 선생님은 저를 마주하자마자 둘둘 말린 지도부터 펼치셨습니다. 선생님의 손가락은 지도의 굽이진 선들을 따라 움직였고멈추는 지점마다 그곳에 맺힌 기억들을 담담히 읽어 내려가셨습니다.

사진 6.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사진 6.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ArchMuse

“1950년 8월 16일 오전, 학교 가던 길에 경찰관들에 의해 강제 징집되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일본으로 건너가 3주간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지.

내 나이 고작 열아홉, 머릿속엔 오직 어머니 걱정뿐이었어.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매일 아침 절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하셨다더군.”

 

사진 7.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사진 7.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지도 속 화살표는 단순히 부대의 이동 경로가 아니었습니다. 구술로 다 담지 못한 소년의 두려움과 그리움, 전쟁의 실상이 응축된 삶의 궤적’ 그 자체였습니다이어 선생님의 손가락은 지도 위 낯선 이름 하나에 멈췄습니다. 전쟁터에서 형제처럼 자신을 돌봐준 미군 의무장교 에드워드 가이였습니다.

전쟁 직후 소식이 끊긴 지 60년의 세월. 하지만 간절한 기억은 2011 SBS 다큐멘터리 <군번 K, 최초의 카투사를 만나다>를 통해 기적을 만들었고, 마침내 미국에 살고 있는 에드워드 가이와 그의 가족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어. 그 시절 나를 지켜준 그 따뜻함을 잊을 수 없었거든.   

                이분을 다시 만나고 나서야, 내 전쟁의 기억이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어”

 

사진 8.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사진 8. 류영봉 참전용사 자택 방문 사전 인터뷰 사진(2021) / 출처: ArchMuse

다큐멘터리 링크: https://programs.sbs.co.kr/culture/sbsdocum/vod/52256/cu0389f0010200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리던 노병들의 모습은, 공식 기록이 미처 담지 못한 '가장 뜨거운 전우애'였습니다. 이처럼 전쟁을 통과해 온 인간의 심장을 복원하는 구술 채록은, 전쟁의 외형만을 기록해 온 아카이브의 빈칸을 채우는 소중한 작업입니다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비극이기에, 우리는 살아있는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것이 후대를 위한 가장 정확한 전쟁의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3. 기억의 수집, "국가가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약속"

사진 9. 구술영상 본 촬영 당시, 류영봉 참전용사와 함께 찍은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사진 9. 구술영상 본 촬영 당시, 류영봉 참전용사와 함께 찍은 사진(2021) / 출처: ArchMuse

우리는 자료를 모으는 일을 수집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참전용사들의 생애를 채록하는 일은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섭니다

 

역사는 불충분한 문서와 부정확한 기억이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

 

아키비스트인 제가 기록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충분한 문서에 참전용사의 기억을 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전쟁의 실체에 대한 가장 단단한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10. 한국전쟁 70주년 행사 류영봉 참전용사 사진(2020) / 출처: 국가보훈부
사진 10. 한국전쟁 70주년 행사 류영봉 참전용사 사진(2020) / 출처: 국가보훈부

이 작업은 전쟁의 주체였다가 점점 잊혀간 이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70여년 전, 지도 위의 차가운 화살표가 되어 전선을 누볐던 이들이 이제는 아카이브의 따뜻한 문장이 되어 우리 곁에 영구히 머물 것입니다. 기록의 빈칸을 채우는 이 여정은 결국 한 가지 약속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삶은 잊히지 않았으며, 우리는 당신을 끝까지 기억하겠다.”

 

그들의 마지막 증언이 전쟁기념관에 안착할 때, 비로소 호국 영웅들을 향한 우리의 예우는 완성될 것입니다.

사진 11. 전쟁기념관 유엔군 전사자명비 사진(2021) / 출처: 전쟁기념관
사진 11. 전쟁기념관 유엔군 전사자명비 사진(2021) / 출처: 전쟁기념관

4. 구술영상 바로 보기

사진 12. 구술영상 본 촬영 메인 사진(2021) / 출처: 전쟁기념관
사진 12. 구술영상 본 촬영 메인 사진(2021) / 출처: 전쟁기념관

 

** 위 본문은 <전쟁기념사업회 웹진 3월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기록과 사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