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보고서와 작별을 고하다?
2026년 3월 24일, 행정안전부 보도자료 게시판에 조용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행안부의 보도자료 게시글 첨부파일 영역에 평소처럼 자리를 지키던 HWPX와 PDF 아래에, 뼈대만 앙상한 마크다운(MD) 파일이 끼어든 것이다. 정부가 공식 보도자료를 MD 형식으로 배포한 것은 행정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이 낯선 파일의 등장은 단순한 포맷 추가만을 뜻하지 않았다. 보도자료의 내용 자체가, 대한민국 행정의 패러다임이 '상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에서 '기계가 소화하고 학습하는 데이터'로 이동시키겠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1]
행안부의 이번 지침은 단순히 보고서를 AI로 편하게 쓰자는 제안이 아니다. 보고서 자체를 AI의 훌륭한 '사료'로 만들 수 있도록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드디어 수십 년간 우리의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해 온 아래아한글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일까?
아래아한글, 우리가 사랑한 국산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이 한국 사회에서 독보적인 생명력을 유지해 온 비결은 단순히 관공서의 고집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종이 문서를 디지털 공간에 완벽하게 박제해 낸 스큐어모피즘 (Skeuomorphism)적 가치 덕분이었다. 작성한 문서를 종이로 인쇄하여 반드시 철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신명조 13포인트, 줄 간격 160%, 좌우 여백 10mm"라는 세밀한 규격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한국 행정 조직의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는 일종의 '문화적 약속'이었다.
워드프로세서의 원류가 전자 타자기에 있었던 만큼, 아래아한글은 한국식 문서 서식을 재현하는 '디지털 타자기'로서의 소명에 충실했다. 문서의 형식이 곧 조직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격자형 표 구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정갈한 지면 배치를 구현하는 한국적 보고서의 미감을 아래아한글만큼 탁월하게 지원한 도구는 없었다. 문서 형식에 그토록 집착하는 일본이 정작 '엑셀'로 문서를 만드는 기행을 벌이며 고통받을 때[2], 우리는 다행히도 아래아한글이라는 전용기를 타고 조판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물론 비판도 적지 않았다. 국제 표준(ISO)인 DOCX나 PDF를 놔두고 왜 HWP를 고집하느냐, 이건 대한민국 사용자들에게 유료 소프트웨어 구매를 강요하는 '로컬 진상질' 아니냐는 냉소도 존재했다. 그런데 기술의 역사를 복기해 보면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표준이란 것이 그리 정의로운 것만도 아니다. 초기 PDF가 리더기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설마 이것도 없어? 깔아서 읽든가"라며 들이밀던 과정이나, MS 워드가 시장을 장악한 과정 역시 거대 자본이 주도한 전 지구적 규모의 '진상질'이었다. 아래아한글이 받는 비난은 기술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강요의 규모가 한반도라는 로컬에 머물렀기에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던 탓이 크다.

<공연법 시행규칙 제정에 따른 공연자 등록 사무처리>, 1967.9.13., 서울특별시 내무국 시민과

엑셀의 기본 목적과 달리, 엑셀 방안지의 각 항목에 입력된 정보는 데이터베이스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AI 시대에 만난 HWP의 암초
시대의 축이 '인쇄'에서 '학습'으로 옮겨가며 상황이 반전되었다. 인간의 눈에는 정보를 정갈하게 분류해 주던 '복잡한 셀 병합'이 AI에게는 정보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암초가 되어버렸다. 행정안전부가 내린 "셀 병합 금지"령은, 그동안 우리가 공들여 쌓아 온 '형식의 품격'이 이제는 '혁신의 장애물'이 되었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한 예쁜 표가 AI에게는 '읽씹'하고 싶은 스팸 메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기술은 언제나 답을 찾아왔다. 구글은 Gemini의 Workspace 유료 플랜에서 HWP·HWPX 파일을 직접 업로드하고 분석하는 기능을 공식 지원하기 시작했다. 2026년 4월 현재, 챗GPT 역시 HWP 및 HWPX 파일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3] 아직 모든 LLM이 HWP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폐쇄적 포맷의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는 신호는 분명하다.
최근 한국의 개발자 에드워드 킴(edwardkim)이 주도하는 'rhwp 프로젝트'[4]는 더욱 대담한 미래를 꿈꾼다. Rust와 WebAssembly를 기반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HWP 파일을 읽고 편집할 수 있는 오픈소스 뷰어·에디터를 구현하려는 시도다. 프로젝트는 "모든 사람, 모든 AI, 모든 플랫폼에서 한글 문서를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게 한다"는 비전을 내걸고 있으며, 이미 브라우저에서 바로 작동하는 웹 데모[5]와 크롬 확장프로그램까지 갖췄다.
이 프로젝트는 HWP를 AI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기계가 구조를 즉각 파악할 수 있는 유연한 데이터 자원으로 전환하는 것을 지향한다. 만약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HWP는 특정 회사의 독점 제품을 넘어 하나의 '공공 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다. 비록 한컴과의 라이선스라는 거대한 법적 파도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갈등마저 HWPX라는 포맷이 폐쇄적 성벽을 넘어 광활한 데이터 생태계로 진입하는 관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제 표준 포함 여부와 관계없이, HWPX는 기계 친화적인 포맷으로 재탄생할지도 모른다.

모두의 한글?
HWP 논란은 도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도구가 설계된 목적(인쇄)과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데이터)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되었다. 아래아한글은 한국의 특수한 문화를 지탱해 온 유능한 도구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최고의 생산성을 보장하는 위지윅 워드프로세서다. 다만 이제는 '종이에 갇힌 행정'을 넘어, 데이터로서의 투명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숙제를 안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디지털 타자기의 시대'가 저물고 진정한 '데이터 행정의 시대'가 개막하는 거대한 문화적 변곡점 위에 서 있다. HWP의 미래는 아래아한글의 단순한 기능 업데이트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십 년간 신성시해 온 '종이 위의 질서'를 스스로 허물고, 형태 없는 데이터의 바다로 뛰어들 용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국제표준의 폭력을 견뎌내며 살아남은 이 로컬의 강자가, 스스로 그 견고한 성벽을 허물고 데이터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지가 바로 HWP의 미래를 결정짓는 관건이다. 도구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안에 담긴 조직의 문화적 유전자가 어떻게 진화할지를 지켜보는 일 또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각주
- [1] 행정안전부, "보고서 꾸미는 시간에 민생 현장으로, 행정안전부, ‘AI친화 행정문서 혁신’ 시범 실시", 행정안전부 보도자료, 2026.03.24, https://www.mois.go.kr/frt/bbs/type010/common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08&nttId=124638 (접속일: 2026.04.17).
- [2] 「Excel方眼紙」(엑셀 방안지) 문화는 2016년 고노 타로 행정개혁담당대신이 전폐를 선언하고 2020년 총무성이 공식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만큼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 [3] 김현아, "챗GPT, HWP 파일 직접 읽는다…변환 없이 업로드·분석 가능", 《디지털데일리》, 2026.04.17, https://www.ddaily.co.kr/page/view/2026041714314616215 (접속일: 2026.04.17).
- [4] rhwp 프로젝트 깃허브 리포지토리 : https://github.com/edwardkim/rhwp
- [5] RHWP 웹 데모 프로그램 링크 : https://edwardkim.github.io/r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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