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대한민국의 공공행정은 이미 거대한 '데이터 발전소'다. 디지털 전환(DX)이 가속화되면서 정부와 지자체의 대국민 서비스부터 내부 의사결정까지, 이제 대부분의 공공행정 업무는 개별 행정정보시스템을 통해 수행된다. 국민의 민원 접수부터 정책의 실행, 예산의 집행에 이르는 모든 일련의 과정과 결과가 개별 시스템 내부에 ‘행정정보 데이터세트’라는 살아있는 데이터로 고스란히 각인되는 시대인 것이다. 더 이상 행정의 궤적은 전자문서시스템이나 업무관리시스템을 통한 결재문서와 그 붙임문서에만 머물지 않는다.
법·제도 역시 데이터 중심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2020년「데이터기반행정 활성화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직관과 관행이 아닌 ‘데이터에 기반한 과학적 행정’을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려 하고 있다. 올해는 이 법이「인공지능·데이터기반행정법」으로 확대·개정되면서, 단순한 데이터 활용을 넘어 인공지능이 즉각적으로 읽고 학습할 수 있는 ‘AI-readable’ 데이터의 생산과 체계적 관리가 공공부문의 핵심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시스템 운영부서의 ‘서류 심사관’으로 전락한 아카이브
하지만 공공기록 관리의 현실은 한참 뒤쳐져 있다. 행정업무의 본체는 이미 행정정보시스템 속 데이터세트로 거의 옮겨갔고 법·제도마저 AI 시대를 향해 내달리고 있지만, 정작 이를 영구히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기록관리’는 아직도 결재문서 중심의 프로세스에 멈춰 있다. HWP나 PDF 박제된 완결형 텍스트 문서 이관에만 목을 매는 사이, 이미 데이터세트는 기록관리의 통제권 밖에서 행정안전부의 정보화부서의 주도하에 ‘공공데이터포털’이라는 거대한 데이터 서비스 플랫폼을 십 수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왜 이런 지체 현상이 벌어질까? 아카이브(영구기록물관리기관)에서 이루어지는 데이터세트 기록관리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현재 아카이브의 역할은 철저히 ‘수동적인 행정 행위’에 그치고 있다.
관할기관의 시스템 운영부서나 기록관에서 "우리 시스템이 관리대상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해 오거나, 작성한 ‘행정정보 데이터세트 관리기준표’를 보내며 확정 여부에 대한 협의를 요청하면, 아카이브는 그 공문을과 붙임문서를 받아들고 책상 위에서 검토하는 역할에 머문다. 데이터세트는 고정된 문서와 달리 스키마(Schema) 구조, 테이블 간의 관계, 데이터의 생성 맥락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생명체다. 그럼에도 아카이브 단계에서 시스템에 접근해 데이터세트의 구조와 맥락을 실제로 분석하거나 파악하는 과정은 완벽하게 실종되어 있다. 행정정보 데이터세트 관리기준표라는 '서류'만 보고 데이터의 보존 가치를 따지는 탁상행정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관 없는 기록관리, 증발하는 데이터
분석과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필연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바로 아카이브로의 ‘데이터세트 이관’이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기록관리의 본질은 생산기관의 손에서 떠난 기록물을 아카이브의 안전한 통제 하로 이관하여 무결성을 보장하고 장기보존하는 데 있다. 하지만 지금의 체계에서는 행정정보시스템이 고도화되거나 차세대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순간, 가치있는 정보를 담고 있는 데이터세트들이 맥락을 잃은 채 시스템 폐기와 함께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다.
아카이브로 이관되지 않은 데이터는 역사적 증거로서의 진본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인공지능·데이터기반행정법을 제정하며 아무리 공공데이터 개방과 AI 학습을 외쳐도, 그 데이터의 뿌리가 되는 과거의 행정 데이터세트가 아카이빙되지 않는다면 사상 누각에 불과하다.
수동적인 검토자가 아닌 '초기 설계자'로 나서야
AI가 공공행정을 보조하고 앞으로는 주도할 이 시대에, 데이터를 빼놓은 기록관리는 위태롭다. 아카이브는 이제 수동적 검토자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시스템 구축 단계에서부터 아카이브가 개입하는 사전 대응 전략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결재문서의 경우 기록관리기준표 등을 통해 생산 단계부터 통제하듯이, 관리 대상 유형에 해당하는 시스템이라면 설계 단계부터 향후 아카이브로 이관되어야할 데이터세트를 식별·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시스템이 개발되고 난 뒤에 행정정보 데이터세트 관리기준표라는 서식으로 사후통제하는 방식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미 개발되어 운용되는 시스템이라면 향후 시스템을 개편할 때라도 적용해야한다. 그 전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해당 시스템을 기록화 차원으로 접근하여 시스템의 기능과, 보존 가치가 있는 이관 대상 데이터세트를 식별해 내어야 한다. 이렇게 사전에 관리대상을 식별하고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개발 이후 시스템이 아무리 변경되어도 이미 관리대상으로 선정된 데이터들에 대한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맺으며,
시스템 개발 단계부터의 개입하여 사전에 관리 대상을 선정하고, 이후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설계가 필요한 이유는 결국 보존가치가 있는 데이터세트가 아키으브로 안전하게 인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공공데이터포털에서 데이터세트를 수집하여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기록관리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현재의 활용가치를 기준으로 발굴된 것이다. 공공기록관리의 관점에서는 주요 공공행정을 증거하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기록을 선별해야하므로, 당장의 활용도 중요하지만 오래 축적되었을 때 비로소 가치를 발현하는 것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나서 법령까지 개정하며 AI 기반의 행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기록관리 분야가 대응할 차례다. 결재문서 중심의 레거시에 갇혀 고립되어선 안된다. 데이터 중심 행정의 신뢰를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우리 시대의 공공기록은 결재문서 창고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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