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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뻘 아카이브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들

2026.04.28 | 조회 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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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

지도 위에서 지워지는 이름, 빼뻘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캠프 스탠리(Camp Stanley) 후문에 위치한 빼뻘마을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그대로 품은 장소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가 주둔하며 형성된 이 마을은 6, 70년대 기지촌으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사라질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마을 이름이 빼뻘이 된 유래부터 흥미롭다. 뺑쑥이 많아 뺑벌이라 불렀다는 이야기, 기지촌에 한 번 들어오면 뻬도 박도 못해서 빼뻘이 되었다는 설이 분분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실제 도로가 있는 자리가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끈적끈적한 뻘과도 같은 땅이었다는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곳이 오랫동안 행정적인 주소(지번)’조차 부여받지 못한 무적(無籍)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고 수도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은 곳. 국가의 행정망조차 닿지 않았던 이 지도 밖의 장소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빼뻘마을 주민들과 부대끼며 빼뻘을 기록하고 있는 두 예술작가의 아카이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빼뻘마을 지도 (*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빼뻘마을 지도 (*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찰나의 존재 증명: 1달러 지폐와 벽면의 낙서

 2019년 빼뻘마을로 들어간 김현주, 조광희 작가가 주민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버려진 공간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주한 흔적들은 자연스럽게 아카이브로 연결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기록은 마을의 폐쇄된 클럽 천장과 벽면에 남겨진 1달러 지폐와 벽면의 낙서들이다. 미군들이 자신의 이름과 고향을 적어 붙여둔 1달러 짜리 지폐, 욕설과 성적 농담, 그리고 전쟁에 대한 무의식이 투영된 낙서들은 그 자체로 생생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1달러 지폐와 벽면의 낙서(*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1달러 지폐와 벽면의 낙서(*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김현주 작가는 이 지폐와 낙서들을 보며 "누군지도 모르는 떠나간 미군들의 낙서들을 보관해야 할까? 보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 끝에 그냥 치울 수는 없는 …… 일단을 우리가 갖고 있어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 앞에 또 하나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낙서가 새겨진 벽면이 석면 소재라 철거가 권고되는 상황이었다. 사진과 영상 기록만 남기고 원형을 포기해야 할 순간, 조광희 작가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냈다. “가벽을 만들고 창문을 내자!” 기존의 벽면을 훼손하지 않은 채 가벽을 세워 평소에는 닫아두고 기록을 보고 싶을 때만 창문을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는 기록보존의 원칙과 현장의 특수성을 절묘하게 결합한 새로운 발상이었다.

"가벽을 만들고 창문을 내자!"(*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목소리로 되살아나는 기록: ‘낭독의 방’

 아카이브 결과물을 공유하는 방식 또한 예술가들다웠다. 작가들은 주민들의 구술 증언을 증언집이라는 책자의 형태로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낭독의 방이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장에 실제로 낭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관객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주민들의 이야기를 읽게 한 것이다. 이 목소리는 전시장 내부 뿐 아니라 미술관 밖 스피커를 통해서도 흘러나와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낭독의 방(*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낭독의 방(*출처: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작가들은 낭독이라는 행위를 타자의 서사를 내 몸 안으로 들여와 성대를 거쳐 다시 내뱉음으로써, 사람의 몸을 하나의 기록 장치로 삼아 타자의 삶을 감각하고 그 서사를 새롭게 확장하는 예술적 아카이빙 실천으로 보고 있었다. 낭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자신의 몸으로 통과시키는 경험은 기록의 향유자가 곧 기록의 공동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통찰을 선사했다.

 

 

기록은 사라진 후에도 우리를 연결한다

 빼뻘을 기록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라짐을 막는 행위가 아니라, 사라진 후에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비록 지번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삶이 머물렀던 곳, 빼뻘. 우리가 이 마을을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라지는 공간을 막을 수는 없어도,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존엄은 기록을 통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의 수많은 공간들이 말을 걸고 있다. 다만 우리가 멈춰 서서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빼뻘 아카이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

     

 

뺑쑥과 관련한 빼뻘마을 사람들의 고유한 놀이 문화, 두 작가와 빼뻘마을과의 인연, 빼뻘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카이브다>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 뻬뻘아카이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의정부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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