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행위로서 특정한 장소에 추모객들이 방문해 기억될만한 물품을 남겨놓고 가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더이상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참사나 비극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발생한 장소에서 혹은 임의로 지정한 기념의 공간을 마련해 무어간 두고 가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사와 마음을 드러낸다. 물건이나 행위에 제약은 없다. 간단한 글귀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꽃을 헌화하는 것일 수도 있고 편지와 같이 지극히 개인적 의미를 담은 물건을 두고 가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 참사 이후에 이러한 기념 행위의 결과물이자 참사의 증거물들을 기록화하는 것이 아키비스트들에게도 중요한 사명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대대적으로 기록화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아무래도 '4.16 기억저장소'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모든 기록을 기억하기 위해 당시 벌어진 사건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록뿐 아니라, 이후 벌어진 일들과 유가족들의 이야기, 추모의 행위들에 대한 기록들도 모두 모았다. 그 후로도 슬픈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졌고, 4.16 기억저장소가 선례가 되어 이를 기록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지속적으로 힘을 얻었다. 그렇다면, 비극 이후를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베트남 참전용사 메모리얼(VVM)
1982년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몰에 건립된 <베트남 참전용사 메모리얼(Vietnam Veterans Memorial, 이하 VVM)>(1982)은 공공기념물의 대안적 기능을 제안한 새로운 사례이다. VVM의 건립 과정과 공공미술에 미친 영향, 설립된 이례로 수많은 이 조형물을 사람들이 방문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살펴보면, 비극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기록화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지속된 베트남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비난 받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반전운동을 심화시켰다.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으나 결국 미국은 패전국이 되었고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가해자와 패배자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맞닥뜨리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가운데 1970년대 후반, 본인이 베트남 참전 군인이였던 얀 스크러그스(Jan Scruggs)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사회에 융화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공공기념물을 세우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VVM은 기존 전쟁기념물(monument)과는 달리, 승전이 아니라 패전에 관한 기념물이었으며 그 목적 또한 처음부터 승리를 자축하거나 전쟁 영웅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추모와 치유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memorial). 따라서 전통적인 기념비처럼 인물의 형상을 근엄하게 표현하거나 높이 솟은 세로형 권위주의적 구조물을 건립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VVM 건립을 위한 디자인 공모전이 열렸고, 당시 예일대학교 건축학과에 재학중이던 중국계 미국인 21세 마야 린(Maya Lin)의 간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
마야 린의 작품은 기존과 다른 파격적인 형식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했지만, 건립 이후에는 사회적 화합의 상징성으로 인해 호평을 받게 된다. VVM은 위에서 보면 커다란 V형을 이루는 거대한 검은 대리석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검은 벽에는 베트남전쟁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군인들의 이름이 사망(실종)한 날짜 순서로 정렬되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방문객들은 가운데로 갈수록 지면 아래로 침잠하는 대리석 벽을 따라 걸어내려가면서 벽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벽면에 비추이는 자신의 얼굴을 겹쳐 볼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의 메모리얼(추모조형물) 제작 양식과 건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005년에 독일에 건립된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유럽의 살해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에서는 2,711개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기둥(비석)이 격자 형태로 배치되었다. 기둥 높이는 각기 다르게 설계되어 그 사이를 지나는 방문객들이 혼란과 고립감을 느끼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이 조형물 또한 비극을 상기시키고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의도로 방문객들의 참여적 성격을 강조하는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미국의 <9/11 메모리얼(9/11 Memorial)>(2006)은 세계무역센터가 사라진 터에 위치하며 위로 솟은 건물이 아니라, 지하 공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지면에는 붕괴된 건물의 부재와 희생자들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부재의 반추(Reflectiong Avsence)'라는 이름의 인공폭포가 설치되었다. 폭포의 외곽에 설치된 동판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방문객들은 이들의 이름에 미국 국기나 꽃을 꽂아 기념하는 행위에 동참하고 있다. 이 작품을 설계한 마이클 아라드(Michael Arad)는 5,200:1의 경쟁을 이기고 당선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마야 린이라고 전해진다. 침묵, 공백을 담은 조형물로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반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VVM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공공미술과 확장된 기록의 영역
검은 벽을 따라 걸으며 과거의 비극을 되새기는 것, 그리고 그 위에 비추인 자신과 주변 풍경의 모습을 통해 모든 희생이 현재와 연결되었음을 경험하는 것, VVM에서 작품의 본래 의도는 여기까지였으나 방문객들의 참여로 인해 이 공공미술 작품의 의미는 그 이후로도 계속 확장된다.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물품들을 VVM의 벽 앞에 남겨두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셔널몰에서도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고 VVM 방문객들에 의해에 남겨진 물품들을 수거해서 NPS 박물관 자원 센터(National Park Service Museum Resource Center)로 이전하고, 부패하기 쉬운 유기물이나 변형되지 않은 성조기를 제외한 모든 품목을 목록화하여 보존하기 시작했다(성조기는 공공 배분한다). 그 중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모인 컬렉션에서 선정된 항목들은 스미소니언협회의 미국역사국립박물관에서 《개인의 유산: 국가의 치유(Personal Legacy: The Healing of a Nation)》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기도 하였다. 현재 박물관 사이트에서는 VVM에 헌정된 총 378건의 물품의 이미지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마야 린이 처음 작업을 의도했을 때 이처럼 헌정된 물건들을 아카이빙하는 일을 포함하지 않았겠지만, VVM 이후로 그에 호응한 방문객들이 남긴 흔적들은 현재에도 계속 의미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헌정품들은 과거의 희생자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그들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기념의 장소가 공식적으로 마련된 이후에 비로소 추모와 애도의 행위도 인정되었고 희생자들과 추모객 그들 모두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지하게 된 것이다.
전쟁의 비극에 관한 VVM의 사례는 이를 통해 사회적 화합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재앙과 비극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사회는 분열하는 가운데 공공미술의 영역에서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공간을 마련했다면, 아카이브는 그 목소리를 기록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숙제는 계속되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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