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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일 없이 휴가를 쓴 날, 혼자 카페에서 읽기 좋은 책 다섯 권

아카이브가 등장하는 소설 네 편, 그리고 현실 직시를 도와주는 르포 한 권.

2025.12.18 | 조회 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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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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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계신가요? 저는 올해가 100일 남았다던 9월에는 눈이 빠지도록 검색한 후에 100일 플래너를 샀고(한 페이지 썼습니다), 11월부터는 온라인 서점에서 복지포인트 플렉스를 하며 가지고 싶은 다이어리와 달력을 포인트로 구입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또 '궁극의 다이어리'를 찾아 헤맨 후 한 플래너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연초에 썼던 올해 목표를 적어 놓은 다이어리를 찾으려다 실패하고 그 때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보았습니다. 2025년은 '새해'라는 감각을 가지지 못하고 2024년의 연장으로 살아온 것 같은 한 해인데, 되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많네요.

 

그래도 몇 가지 잘한 일 중 하나는 여기 저기에 산발적으로 쓰던 독서 로그를 블로그로 통일한겁니다. 밀리의 서재에, 노트에, SNS에, 일기 전용 블로그에 내키는 대로 쓰던 것을 의식적으로 한 곳에만 정리하기 시작했거든요. 읽은 책 모두에 대해 쓰고 있지는 못한데도 포스팅 수를 볼 때 한 번씩 뿌듯합니다.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에 읽었던 책들 중 여전히 사랑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더 잘 정리해서 올려 보고 싶기도 합니다. 

 

구독자 분들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혹시 재밌는 소설을 찾으신다면 제가 몇 편 소개해 드려도 될까요? 흥미진진한 세계관과 이야기 속에서 깊은 여운 또는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기록관', '아카이브', 기록전문가가 등장해서 더 반가운 이야기들이에요. SF소설에 나오는 모습은 더 흥미롭습니다. 연말에 혼자 카페에서 차 마시며 읽기 딱 좋은 네 편의 소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독할 한 권의 르포를 소개합니다. 

 

*표지 이미지를 클릭하면 출판사의 책 소개 페이지로(없는 경우 교보문고 해당 책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배명훈, 2020,「차카타파의 열망으로」(SF앤솔러지『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수록작),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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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113년. 역사학 전공자인 주인공은 '2020년 5월 어느 날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정보만 모아놓은 근대사이브'인 격리실습실에서 자유주제로 소논문을 쓰는 한 학기를 시작합니다. 

 

전세계 야구 리그가 다 중단되고 한국 리그만 무관중으로 열리는 동안, 온 세상 야구 밴들이 전부 한국 야구를 시정했다. 그랬다는 기록과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역사학과 대학원생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지나지게 많은 기록과 굳이 그것을 검색알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둘dool.

 p. 146.

 

그런데 왜 '아이브'일까요, 위 인용문에서 뭔가 이상한 것 느끼셨나요? 그리고 그는 코로나 이전의 기록들을 보며 어떤 지점에서 화들짝 놀랐을까요? 30분 정도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는 이 소설을 출퇴근 시간에 스마트폰을 대신할 작품으로 추천합니다. 아이브의 이용자 유형에 대한 묘사도 재밌습니다. 

 

 

 

배명훈, 2023,「행성탈출속도」( 연작소설집『화성과 나』수록작), 래빗홀

이 연작 소설은 무려 외교부에서 작가에게 의뢰한, '먼 미래에 화성 이주가 본격화되면 화성에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가?'라는 연구에서 시작되었다고(그 연구 보고서의 제목은
이 연작 소설은 무려 외교부에서 작가에게 의뢰한, '먼 미래에 화성 이주가 본격화되면 화성에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가?'라는 연구에서 시작되었다고(그 연구 보고서의 제목은 "화성의 행정정치: 인류 정착 시키 화성 거버넌스 시스템의 형성에 관한 장기 우주 전략 연구"라고 한다).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소설입니다. 지구에서 화성으로 이주한 1세대는 당연하게도 과학자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만 선발했을테니 그들의 2세도 수학 천재들입니다. 주인공만 빼고요. 아이들은 혼자 수학 농담도 알아듣지 못하는 주인공을 로켓에 태워 우주정거장으로 보내버리는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그 모든 과정이 수식으로 표현되니 '나'는 속절없이 당할 뿐입니다. 그런 '나'가 어른이 되어 맡은 일은..

 

어른이 되자 역사기록관에서 내가 일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의욕 없는 사서 아니면 묵언 수행 중인 수도승처럼 심심한 역사가로 자랄 운명이었다. 

p. 208.

 

하지만 방심하지 마세요. 이 아이는 화성에 있는 아이들 중 상대적으로 수학을 못할 뿐이거든요. 이 주인공이 역사기록관에서 어떤 일을 할 지 궁금하지 않나요? '온통 수학으로 이루어진' 행성에서 '기억'과 '기록'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세랑, 2020,『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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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준은 젊은 시절의 난정을 기억했다. 명준이 몸담았던 기관에 파견온 젊은 프로그래머. 기록 관리 시스템을 설치하느라 잠시 와 있었던 것인데, 안뜰의 작은 연못이 얼고 점심시간마다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자 난정도 슬그머니 스케이트를 사 왔었다.

p. 237.

 

정세랑 작가의 소설에는 분명 이 분 주위에 기록연구사가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우리 일과 관련된 단어가 한 번씩 등장합니다.시선으로부터,에는 심시선 여사의 둘째 며느리인 '난정'의 젊은 시절을 소개하는 부분에 스쳐 지나갑니다. 이 책은, 어떻게 해야 이 작품을 잘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하다가 손을 놓게 될 만큼 제가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이 인용구의 존재와 관계 없이 특히 여성분들께 추천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자 어른들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소설 속 인물이더라도요. 

 

 

 

R. F. 쿠앙, 신혜연 역, 2024,『옐로 페이스』,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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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은, 예일대 출신의 백인 작가 준 헤이워드. 그녀에게는 같은 대학 동기이자 작가로서의 모든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친구 아테나 리우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집에서 주인공과 같이 술을 마시다가 핫케익이 목에 걸려 갑작스레 사망하는데, 주인공은 알고 있습니다. 아테나는 출판 전까지 모든 작업을 노트와 타자기로만 하는 작가이고,최후의 전선이라는 작품 초고를 (출판사에 미리 알리지도 않은 채로) 막 완성한 상태이고, 그게 그 집 안의 작업실에 있다는걸요.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 원고를 자신의 이름으로 '완성(이미 완성되어 있었지만)'하고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맺는데, 친구의 어머니가 친구의 모든 노트를 '공공 아카이브(원서에서도 public archive)'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공공 아카이브라니? 이런, 젠장. 누구든 아테나에 관한 논문을 쓰는 사람이(확신컨대 아마도 많을 것이다)『최후의 전선』의 바탕이 된 메모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메모들은 광범위하고 상세할 게 분명하다. 그건 결정적인 증거가 될 테고, 그럼 이 모든 계략은 끝이다.

p. 74.

 

친구 어머니 리우 부인을 만난 주인공은 그녀가 그 노트를 아카이브에 기증하지 않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책 출간과 동시에 스타 작가가 됩니다. '공공 아카이브는 사람들이 아테나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할 좋은 방법 같았어요'라는 부인의 마음을 어떤 말로 돌렸을까요? 주인공은 끝까지 죽은 친구의 작품을 훔친 사실을 사람들에게 계속 숨길 수 있었을까요? 페이지 터너인 이 책, 몇 시간 동안 넷플릭스 시청을 대신할 작품으로 추천합니다. 

 

 

 

(2026년 플래너를 준비했다면, 첫 페이지를 펴기 전에 이 책을 읽어볼까요.)

 

장강명, 2025,『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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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가 알파고 이후의 바둑계를 인터뷰하고 쓴 르포르타주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기억하는 건 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공지능 이후의 경쟁 구도는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인공지능 대 인간' 구도가 아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간의 대결(당연히 전자가 압도적으로 이길 수밖에 없는)이다. 바둑계에서는 이미 현실이 되었다. 둘째, 가치가 과학기술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인문학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 쓸 만한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인공지능 대 인간'의 대결 구도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한다. (줄략) 바둑계에서 이후에 펼쳐진 대결 구도는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전문가 대 다른 인공지능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는 다른 많은 전문가 대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는 구세대 전문가'였다.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같은 이야기는, 그런 치열한 경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 즉 그 시점에 해당 분야의 일류라고 볼 수는 없는 사람들, 현장의 최전선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인문학 포럼 같은 데서 할 것 같다. 그 포럼에서는 이런저런 논의가 오가겠고 어쩌면 깊은 통찰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말들은 기본적으로 무력한 언어들이다. 그 업계에서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들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져 있어서, 그런 인문학 포럼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p. 78.

 

 

바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채로도 빠져들어서 읽었는데, 바둑기사 이세돌님의 책인생의 수읽기, 그리고 이동진님의 이세돌 기사 인터뷰 영상을 같이 보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026년 첫 책으로 추천합니다. 

 

 

 


2025년 12월. 작년에는 없었던 연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에게 수고 많았다는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 올해도 살아 남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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