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몇 주 전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휴대폰에 부장님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우리는 한 팀이지만 나는 부장님과 다른 건물에서 일하기 때문에 급한 용건은 휴대폰으로 처리한다.) 부재중 전화를 보자마자 부장님께 답신을 했다. “OO 선생님, 인사팀에서 정규직 기록연구사를 한 명 더 충원해준다고 하네요! 소식 들은 적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보통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업무 전화는 긴급하거나 달갑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내 귀를 의심했다. “네? 처음 듣는 소리인데요? 진짜 정규직으로 충원을 해준다고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며 부장님과 기쁨을 나눴다.
벌써 6년차 전문요원인 나의 오랜 소원은 또다른 전문요원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업무량도 물론이지만, 직장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기록관리 과제들을 나와 다른 시각에서 고민하고 판단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동안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각설이처럼 몇 개월 간격으로 인사팀을 찾아가, 나름의 근거 자료를 갖고 사람을 충원해달라고 하소연해도, 늘 인력 부족으로 투덜대는 여느 직원들을 대하는 정도의 리액션만 있던 터라 기대도 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력을 충원해준다니. 그것도 정규직으로. 물론 정규직 기록연구사 2명이 일하는 조직의 부작용도 당연히 있겠지만, 나는 ’그저 그런 사람 + 그저 그런 사람 > 능력이 출중한 사람’ 공식을 믿는 사람이라 쾌재를 불렀다. 이 소식을 들은 내 친구는 ‘나는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버리는 사람인데, 너는 절을 바꿔버렸구나.’라며 멋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얼떨결에 얻은 성취지만 돌이켜보니 정말 그렇다. 이번 일 만큼은 요령 피우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일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채용 과정은 진행중이지만 나에게는 큰 과제가 생겼다. 바로 우리 기록관의 방대한 업무를 새로 올 전문요원 선생님과 어떻게 나눌지 업무분장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동안 누군가 오면 막연하게 업무량이 절반으로 줄어들겠지, 대충 누군가는 이 업무를 맡고, 누군가를 저 업무를 맡으면 되겠지 하며 행복회로만을 그렸다. 그러나 이제는 구체적인 설계가 나와야 한다.
일단 우리 기록관 업무분장 현황은 다음과 같다.
<기록연구사(1인)>
- 예산 및 행정
- 기록관리 중장기 로드맵 및 연간계획 수립
- 기록물관리규정 및 관련 내규 관리
- 기록관리시스템 개발 및 운영
- 기록관리기준표 구축 및 운영
- 역사기록물 수집, 정리 및 기술, 이용자서비스, 정수점검
- 행정기록물 등록, 이관 및 정리, 평가 및 폐기, 이용자서비스, 정수점검
- 기록물평가심의회 운영
- 백서 등 역사서 제작
- 국고 인력 관리
- 국가근로학생 관리
<학예사(1인, 매년 3~12월 중 10개월 이내 근무)>
- 전시실 시설 및 전시 콘텐츠 개편
- 전시실 단체관람 접수 및 홍보
- 수장고 시설 및 환경 점검
- 서포터즈 학생 관리
- SNS 및 행사 기획 및 운영
우리 기록관의 업무는 다음과 같이 5가지 성격으로 분류할 수 있다.
A. 기록관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업무
- 기록물관리규정 제/개정
- 기록관리기준표 설계
- 시스템 구조 설계
- 중장기 로드맵
- 신규 예산 편성
B. 케이스별 판단이 필요한 업무
- 평가/폐기
- 전시 기획 및 콘텐츠 개편
C.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사고는 적은 반복/처리 업무
- 행정
- 예산 집행 처리
- 이관/정리
- 이용자 서비스
D. 에너지 소모가 큰 조율/설명/설득 업무
- 부서간 협의
- 학생/외부 응대
E. 문제가 없을 때는 일이 안 보이는 리스크 관리 업무
- 감사 대응
- 시설/환경 점검
- 사고 예방 및 재난 대응
업무를 A~E로 나열해보니, 그동안 막연하게 느끼던 피로의 정체가 분명해졌다. 1인 기록관 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업무량 자체가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 차례 전환되는 서로 다른 업무의 연속이었다. 규정, 기준표, 시스템처럼 기록관리 업무의 뼈대를 세우는 중요 업무부터 예산 및 행정, 인력관리, 부서 간 조율, 이용자서비스나 감사 대응까지 수많은 일이 하루에 뒤섞였다. 이 구조에서는 판단의 질을 높일 헤드스페이스(headspace)가 생기기 어렵다. 다음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방금 내린 판단의 맥락을 정리하고, 회고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역량은 축적되기보다 소모되고, 늘 바쁘게 일하는데 방향성은 흐릿해진다.
과연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이 구조가 자연스럽게 바뀔까. 두 사람이 된다고 해서 판단이 자동으로 둘로 나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런 설계 없이 인력만 늘어나면, 중요한 결정은 여전히 가장 익숙한 사람에게 모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결정을 단순 실행하고 역할을 맡게 되기 쉽다. 그러면 판단의 무게는 그대로인데, 조율 비용만 늘어난다. 업무의 병목 현상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제를 고쳐 생각해 보았다. 모든 일을 함께 하는 것도, 모든 일을 특정 개인에게 맡기는 것도 둘다 정답이 아닌 것 같다. 공동으로 판단해야 하는 영역과 각자가 책임지고 판단해야 하는 영역을 분리하면 어떨까? (물론 업무의 성격에 따라 이 둘을 나누되, 공동으로 판단하는 영역도 최종 결정자를 명확히 가져야 한다.)
공동 판단 영역은 두 사람이 늘 함께 일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영역 역시 누군가의 업무 꼭지로 귀속된다. 다만 그 역할은 ’혼자 결정하는 권한’이 아니라, 결정을 안건으로 정리하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방향을 도출하거나 수정한 뒤, 그 결과를 부서장에서 보고하고 문서로 남길 책임에 가깝다. 중장기 로드맵이나 기본계획, 규정, 기준표, 시스템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일들이 해당된다. 한 사람이 초안을 만들고, 다른 사람이 검토하며 질문을 던진다. 이 과정에서 놓쳤던 전제가 드러나고, 판단의 근거가 한 번 더 점검된다. 서로 다른 관점이 교차할 때, 기준은 개인의 능력을 넘어 더욱 성숙한 조직의 합의로 자리 잡는다.
반면 개인 판단 영역은 혼자 처리해도 되는 영역이다. 기록물 등록과 이관 및 정리, 평가 및 폐기, 이용자 서비스처럼 이전에 만들어 놓은 기준을 적용하는 업무 등이 속한다. 이런 업무들은 반복을 통해 숙련되고, 경험이 쌓일수록 혼자서도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오히려 매번 두 사람이 함께 판단하려 하면, 업무 흐름이 끊긴다. 다만 개인 판단 영역의 경우에도 반복적으로 기준에 어긋나거나 예외 상황이 발견될 경우 서로에게 공유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 있다. 공동 판단 영역과 개인 판단 영역 모두 특정 주기로 로테이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같은 영역의 판단을 맡다 보면, 그 판단은 점점 개인의 성향에 따라 관습화된다. 반면 특정 주기로 업무를 로테이션하면 내가 찾지 못한 해결책의 실마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쉽게 발견될 수 있다. (평생 같은 업무를 하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목표를 조금씩 바꿔야 건강한 방식으로 도파민을 활용하여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해보니, 우선은 아래와 같은 업무분장이 도출되었다.
기록연구사 A: 기록관의 방향, 구조, 기준을 책임지는 역할
- 기록관 예산 및 행정
- 기록관리 중장기 로드맵 및 연간계획 수립
- 기록물관리규정 및 관련 내규 제/개정
- 기록관리기준표 관리
- 기록관리시스템 개발
- 감사 대응 등 리스크 관리
- 백서 등 역사서 제작
- 국고 인력 관리
(아래는 학예연구사 부재 기간)
- 전시 콘텐츠 기획 및 전시실 관리
- 대외 협의가 필요한 행사 기획 및 관리
기록연구사 B: 기록관의 일상 운영과 사례 판단을 책임지는 역할
- 행정기록물 등록, 이관 및 정리, 이용자 서비스, 정수점검
- 역사기록물 수집, 정리 및 기술, 이용자 서비스, 정수점검(학예사 또는 기록연구사 A 보조)
- 기록물평가심의회 운영
- 수장고 환경 점검(정기)
- 국가근로학생 관리
(아래는 학예연구사 부재기간)
- 전시실 단체관람 접수 및 운영
- SNS 운영(업로드/관리)
- 서포터즈 관리
물론 이 업무분장 역시 주기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조직의 역량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구성원의 경험과 숙련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규 전문요원이 업무에 익숙해질수록 개인 판단 영역의 범위를 점진적으로 넓혀, 판단 속도와 함께 자율성을 높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맡은 역할이 분명하고 그 역할에 걸맞은 책임이 주어질 때 가장 깊이 몰입해왔다. 반대로 책임의 경계가 흐릿할수록 에너지는 분산되고 업무의 밀도도 떨어진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이지만, 2인 기록관은 한 사람의 한계가 곧 조직의 한계가 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단순 “1+1=2”로 비교하기 어려운 성장 가능성을 갖는다.
[요약하기]
1.기록관의 핵심 자원은 ‘시간’이 아니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다.
일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결정하며 판단을 정리할 틈이 없어서 지치는 구조였다. 2인 기록관의 가치는 일을 더 빨리 처리하는 데 있지 않고, 중요한 판단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회복하는 데 있다.
2. 좋은 업무분장은 무작정 업무를 절반으로 나누는 게 아닌 책임의 경계를 긋는 일이다.
A는 이것, B는 저것을 맡는 분업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함께 검토해야 하는지, 무엇을 혼자 판단해도 되는지, 그리고 그 판단의 최종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3. 2인 기록관의 핵심 가치는 ‘두 배의 처리량’이 아니라 두 개의 판단 루프다.
혼자일 때는 생각 > 실행 > 수정으로 움직였다면, 둘일 때는 생각 > 검증 > 실행 > 재검토까지 한 단계 더 긴 사고 과정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서 조직은 더욱 성숙한 합의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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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érence
좋은 글 감사합니다. 2인 기록관의 핵심 가치는 두 배의 업무량이 아니라 두 사람 분의 판단 루프라는 통찰이 인상깊네요.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사람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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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기록연구사 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글이네요. 프로일잘러의 냄새가 납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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