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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아카이브 너머

현대사 연구자가 한국의 아카이브에 바라는 것

2026.02.25 | 조회 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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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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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성윤님은 아카이브를 꼭 이용해야 하는 연구자입니다. 지난 해 겨울 성윤님과 만난 자리에서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성윤님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아카이브의 고객 서비스, 낡은 자료 제공 방식의 개선에 대해 제안했습니다. 값진 제안이었고 에디터는 잠자코 정성껏 들으며 몇 가지를 메모하기도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불만에 가득 찬 고객이야말로가장 위대한 배움의 원천"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윤님께 그 날 나눴던 대화를 글로 부탁드렸고 선뜻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1. 나의 아카이브 경험

역사학자에게 아카이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유럽 아카이브의 자료들은 반드시 현장을 방문해야 접근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국립 아카이브나 국제기구 아카이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타지의 아카이브에 머물며 자료를 수집한다. 개인 복제가 불가능해 기관에 복사를 의뢰하면 비용이 몇 배로 늘어난다. 한 달 생활비보다 일주일 자료조사 비용이 더 나간 적도 있었다. 자료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으면 편리하겠다 싶지만, 동시에 수백 년 전 자료를 직접 만지며 물성을 느끼는 경험도 있다. 역사학자에게 아카이브는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연구 생활의 상당부분을 함께 하게 되는 각별한 공간이다.

처음 아카이브를 방문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쾰른의 독일 무용 아카이브(Deutsches Tanzarchiv Köln)였다. 박사과정 초기, 주제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아카이브 작업을 위해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던, 그러나 비용 문제로 3일밖에 체류할 수 없었던 외국인 학생이었다.

아카이브에서 노년의 여성 아키비스트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어떻게 자료를 모아가면 좋을지 물었다. 아키비스트는 아카이브 운영 규정, 자료 복제 규정, 인트라넷 사용방법 등을 설명했고, 내가 준비해 간 키워드들과 관련성이 높은 다른 키워드들을 제시해줬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지역을 묻고, 내가 찾는 자료들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 지역에서 생산된 로컬 자료의 이용을 권하며, 추가 조사를 위해 로컬 아카이브 위치를 알려줬다. 연구자로서 선행 연구를 검토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접근이었다. 인트라넷 검색을 통해 자료 목록을 확인하고 열람 신청을 하니, 요청했던 문서철 옆에 놓여있던 다른 문서철도 함께 가져다줬다. 관련이 있을 것 같으니 함께 살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게 하얀 장갑 한 켤레를 건넸다. 원사료를 직접 만지는 것이니 손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면서 자료 훼손도 방지하자는 취지였다. 역사학자로서 아카이브에서 장갑 끼고 100년 전 자료를 처음 만져봤던 당시의 경험은, 이런 시간이 모여 전문성이 되는구나 생각한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독일 쾰른 무용 아카이브의 아키비스트가 제공했던 열람용 장갑
독일 쾰른 무용 아카이브의 아키비스트가 제공했던 열람용 장갑

당시에는 3일 안에 최대한 많이 보고 최대한 많이 복사하자는 생각뿐이었지만, 연구를 진행하며 당시 아키비스트의 조언들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깨달았다. 당시 추천받은 우리 지역 로컬 자료를 활용해서 지역사를 전반적인 독일사와 연결한 글을 기고했고, 요청한 자료와 함께 가져다 준 ‘옆 문서철’에서 발견한 미공개 자료를 소개한 논문도 게재했다. 꼭 필요한 가이드라인을 제공받았고, 그 덕분에 시간을 절약하고 성과는 풍부하게 낼 수 있었다.

이후 다양한 아카이브 방문조사를 계속하면서, 키워드 검색만으로는 한정된 시간 내에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 나 말고도 비슷한 목적으로 이 기관을 찾은 사람은 많다는 점, 소장자료 목록 및 활용 이력에 대해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해당 기관 소속 아키비스트라는 점 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독일 연방아카이브(Bundesarchiv), 독일 청소년운동 아카이브(Archiv der deutschen Jugendbewegung) 등 다른 아카이브에 방문했을 때에도 우선 아키비스트와 충분히 얘기를 나누고 작업을 시작했다. 연구서의 ‘감사의 말’에 도서관 사서나 아키비스트 언급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점을 매번 느끼며..

2. 건설/구축 중심의 아카이브, 운영/서비스의 부재

해외 아카이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아카이브 관련 연구 및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낀 가장 큰 차이는, 아카이브가 시설로는 존재하지만 서비스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아카이브 관련 논의의 중심은 주로 '건설'과 '구축'이다. 한국은 다양한 자료들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전문 학예사나 기록연구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아카이브 관련 예산 논의 역시 주로 시설 건립, 자료 수집, 보존에 집중된다. 물론 이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운영과 서비스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첫째, 외부 연구자의 접근이 어렵다. 자료를 기관 재산으로 보는 인식이 강하다. 국가 예산으로 구입한 장서조차 외부 공개 없이 내부적으로만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힘들게 배정받은 예산으로 입수한 우리 자료"라는 인식이다. 자료 열람은 개인적 네트워크를 통하거나 행정적 방법(정보공개청구)에 의존해야 하고, 다양한 기관에서 구축했거나 구축하고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는 품질이 낮거나 단편적인 자료가 많아 연구에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둘째, 아카이브를 통한 경험의 기회가 부족하다. "도서관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답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연구하고, 사람을 만나고, 강연에 참석하고, 자료 구입이나 상호대차를 신청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도서관 예산을 늘리자는 이야기를 하면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도서관의 가치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카이브에서 작업해 본 경험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없다"고 답한다. 

자료를 구해 본 사람은 많지만 아카이브를 경험해 본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거의없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국내 연구자가 리서치의 첫 단계로 아카이브를 찾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우선 자료의 온라인 이용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그게 안 되면 국회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 등 라이센스를 갖춘 채널을 통한 온라인 이용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필요하면 상호대차 서비스를 활용하고, 드물게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속 기관을 통해 자료를 구매한다. 디지털화가 잘 되어 있어서 아카이브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자료를 입수할 수 있을 때가 많다는 점은 한국의 장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점은 연구자가 아카이브의 자료를 활용하면서도 아카이브라는 공간을 경험할 기회는 대폭 축소시킨다.

영국 TNA 2025.12.5. 뉴스레터 중
영국 TNA 2025.12.5. 뉴스레터 중 "기록 요청 시스템 이용 불편 예고" 공지 / 편집자 삽입 이미지

아카이브 이용자는 자료소장기관이 제공하는 선별적이고 제한적 기회(주로 전시나 교육) 혹은 정보공개청구라는 행정적 절차를 통해서만 아카이브와 만난다. 아카이브 운영자나 서비스 공급자 입장에서 아카이브의 기능이나 역할을 논리적으로 정립하는 것과 별개로, 수요자 입장에서 아카이브를 능동적으로 활용해 본 사람이 적다는 문제는 항상 남아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책이나 예산 결정권자 중 아카이브에서 무언가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투자는 설득하기 어렵다.

3. 새로운 움직임들: 기술이 바꾸는 아카이빙 

최근 한국에서는 다양한 DB구축 사업과 아카이빙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민주주의 관련 자료 수집, 웹에서 소실되어 가는 자료의 보존, 지역사나 공공역사 차원의 소규모 아카이브, 최근 계엄 국면에서 시민들이 만든 깃발이나 대자보 등의 아카이빙 프로젝트 등이다. 근현대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면서 OCR 기능을 활용하거나, 손글씨 문건이나 국한문혼용체처럼 기존에는 OCR 인식률이 낮았던 자료들에 AI를 적용하려는 시도도 있다. 자료 수집과 분류에 AI를 활용하려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아카이브 구축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아카이브 구축은 구매나 기증 등의 방식으로 새로운 자료가 대량으로 입수되거나, 특정 분야 자료의 가치나 수집 필요성이 확인된 후 연구기관이 DB구축이나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시작하며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DB나 아카이브 구축을 제안할 때는 연구재단이나 지자체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하여 자료의 가치를 강조하는 제안서 내지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게 된다. 자료 중심, 그리고 연구자 관점에서 제안되는 프로젝트라서 해당 프로젝트의 참가자는 일반적으로는 연구자, 주로 박사급 연구자만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아카이브 구축의 구상 단계에서는 현직 학예사나 기록연구사의 참여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체계적 기록관리와 전시, 교육 등 활용을 위해 기록연구사나 학예사가 차후 합류하는 흐름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다. AI를 활용한 아카이빙을 시도하는 기관이 늘어나다 보니, 기술인력(코딩, AI, 서버 전문가 등)이 사업 초기부터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연구자들은 자료의 가치는 설명할 수 있지만 AI 리터러시가 부족하고 코딩은 거의 불가능하여 해당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아카이브 구축 초기부터 테크니션이 정식으로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 제안서 및 연구계획서에서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기술 활용의 논의가 OCR 정확도 향상이나 자료 분류 자동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기술의 도입이 아카이브 내부의 작업 효율화에 그친다면, 여전히 이용자의 관점은 뒷전이 된다. 진짜 변화는 자료를 어떤 형태로 '외부에 내놓느냐'에 있다.

자료에서 데이터로: 구조화된 접근의 가능성

OCR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아카이브가 자료를 단순히 화면에 표시하는 이미지나 PDF로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JSON이나 XML 같은 구조화된 데이터 형식으로 제공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구자는 특정 아카이브의 API를 통해 원하는 자료를 프로그래밍 방식으로 불러오고, 이를 LLM(대형언어모델)과 결합해 나만의 연구 라이브러리를 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특정 시기의 관보, 신문, 공문서 등 이질적인 소장처의 자료를 하나의 데이터셋으로 통합하여 질의하거나, 주제어와 맥락을 기준으로 자료 간 연결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키워드 검색이라는 단선적 탐색 모델 대신, 연구자가 직접 설계한 탐색 환경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카이브의 역할과 검색·탐색 서비스 모델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지금까지 아카이브는 자료를 수집·보존하는 동시에 검색 인터페이스도 직접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구조화된 데이터 패키지를 외부에 개방한다면, 아카이브는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공급자의 역할에 집중하고, 검색·탐색 서비스는 이용자 혹은 제3의 개발자가 자신의 목적에 맞게 구성할 수 있다. 이는 아카이브가 더 '납작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변화다. 인터페이스의 주도권을 이용자에게 이양하는 대신, 데이터 자체의 품질과 구조가 아카이브의 전문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미 진행 중인 변화: 영국과 미국의 사례

이러한 흐름은 이미 영국과 미국의 주요 기관에서 구체적인 서비스로 구현되고 있다.

영국 국립 아카이브(TNA)의 Discovery API는 개발자와 연구자가 소장 목록 데이터베이스에 프로그래밍 방식으로 접근해 결과를 XML 또는 JSON 형식으로 받아볼 수 있도록 한다. UK National Archives 3,200만 건 이상의 기록물 설명 데이터가 이 방식으로 접근 가능하다. TNA는 또한 법원 판결문 데이터를 '개발자, 데이터 과학자, 연구자'를 위해 기계 판독 가능한 XML 형식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Find Case Law' 서비스도 운영한다. 아카이브 자료가 단순한 열람 대상이 아니라 연구자가 가공하고 분석할 수 있는 원재료로 제공되는 것이다.

미국 국립 아카이브(NARA)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NARA의 카탈로그 API는 연구자와 개발자가 JSON 형식으로 메타데이터를 가져올 수 있게 하며, 키워드·날짜 범위·자료 유형 등 다양한 조건으로 검색하고 결과를 대량으로 내보낼 수 있다. OCR로 추출된 텍스트 데이터, 디지털 객체 메타데이터, 전거 레코드까지 포함되며, Python 스크립트 등으로 대량 내보내기가 가능하다. National Archives 연구자는 이 API를 통해 수백만 건의 기록을 자신의 연구 목적에 맞게 수집·가공할 수 있다. *National Archives Catalog on the AWS Registry of Open Data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의 Labs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의회도서관의 loc.gov JSON API는 디지털 컬렉션에 관한 구조화된 데이터를 제공하는데, 원래는 웹사이트 운영을 위해 설계된 것이지만 개발자, 디지털 사서, 연구자가 직접 컬렉션 정보를 받아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LOC 미국 전역에서 발행된 역사 신문 1,200만 페이지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Chronicling America API, 의회 법안 및 위원회 보고서 데이터를 제공하는 Congress.gov API 등 다양한 API 서비스를 운영한다. LOC 특히 Labs는 연구자들이 API를 활용해 컬렉션을 탐색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Jupyter Notebook 튜토리얼을 제공하고, 컬렉션으로부터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낸 사례를 공개 전시하는 방식으로 이용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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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NLS)의 Data Foundry는 또 다른 방향에서 참고할 만하다. NLS는 디지털 컬렉션을 텍스트 마이닝, 기계학습, AI 활용 등 다양한 연구 방법에 적합한 데이터셋 형태로 공개하는 Digital Scholarship Service를 운영한다. Wordpres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초판 100년치, 스코틀랜드 학교 시험지 컬렉션, 인도 식민지 시대 공문서 등의 데이터셋이 공개되어 있으며, 각 데이터셋에는 컬렉션의 역사적 맥락과 OCR 품질, 파일 수, 시기 범위 등을 설명하는 큐레이터 주석이 함께 제공된다. Data Foundry는 연구자들이 기초 메타데이터 검색을 넘어 자연어 처리(NLP) 같은 전산적 방법으로 컬렉션을 심층 탐구할 수 있도록 Jupyter Notebook도 함께 제공한다. Nls 자료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료를 어떻게 데이터로 다룰 수 있는지를 함께 가르치는 구조다.

이들 기관의 공통점은 'Collections as Data(컬렉션을 데이터로)'라는 운동에서 잘 드러난다. AI와 기계학습의 활용이 확산되면서 GLAM 기관들(갤러리·도서관·아카이브·박물관)이 이제 단순한 자료 소장 기관이 아니라 데이터 제공자이자 데이터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Libereurope 아카이브가 정제되고 구조화된 데이터를 내놓을 때, 검색과 탐색의 방식 자체가 이용자 주도로 재편된다. 연구자들은 더 이상 아카이브가 제공하는 검색 인터페이스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아카이브의 역할은 좋은 데이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 데이터에 접근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큰 변화의 시작이다.

4. 아카이브가 리서치를 만날 때: 영국과 미국의 사례

아카이브를 자료 보존의 창고가 아니라 리서치 서비스의 거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이미 영국과 미국에서는 기관 운영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사례는 '서비스로 작동하는 아카이브'가 어떤 모습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국립 아카이브(The National Archives, TNA)는 리서치 서비스 제공을 명시적인 핵심 기능으로 규정한다. 온라인 사전 예약 시스템, 자료 목록 사전 검토 서비스에 더해, 직원 아키비스트가 연구 주제에 따라 관련 컬렉션을 사전에 제안하는 '리서치 가이던스' 서비스를 운영한다. 방문 연구자를 위한 열람실은 물론이고, 원격지 연구자를 위한 문서 복사 및 스캔 의뢰 서비스도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TNA가 단순한 열람 서비스를 넘어 'Discovery'라는 온라인 카탈로그 플랫폼을 통해 소장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고, 나아가 영국 내 다른 아카이브들의 목록까지 통합 검색할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료를 '우리 기관의 것'으로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연구 흐름에 맞게 자료를 연결해주는 서비스 철학의 표현이다. TNA는 또한 전문 아키비스트를 통한 1:1 연구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 서비스는 방문객뿐 아니라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서도 이용할 수 있다. 연구자가 어떤 자료를 찾아야 할지 모를 때, 아카이브가 먼저 손을 내미는 구조다.

지방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의 카운티 아카이브들은 'Archives for Learning' 또는 유사한 이름의 교육·리서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역사 연구자나 계보학 연구자들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아키비스트를 단순한 자료 관리자가 아니라 연구 파트너로 위치 짓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미국의 사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시사점을 준다. 미국 국립 아카이브(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은 연방 정부 기록을 관리하는 기관이지만, 그 운영 철학은 '기록의 민주적 접근'에 있다. NARA는 전국 각지에 지역 센터를 두고, 각 센터마다 연구자 대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을 배치한다. 연구자가 방문하면 주제 전문 아키비스트가 배정되어 관련 컬렉션 안내, 비공개 자료의 공개 청구 절차 지원, 연구 방향 조언 등을 맡는다. 방문 전 이메일로 연구 주제를 미리 공유하면 아키비스트가 사전에 자료를 검토하고 추천 목록을 준비해 두는 경우도 있다.

사립 아카이브와 대학 아카이브도 마찬가지다. 하버드대학교 허튼 도서관(Houghton Library)이나 스탠퍼드대학교 후버 연구소 아카이브(Hoover Institution Archives)는 방문 연구자를 위해 연구 일정 컨설팅, 컬렉션 안내, 복제 서비스를 통합 제공한다. 후버 연구소 아카이브의 경우, 특정 컬렉션에 대해 아키비스트가 직접 작성한 심층 가이드(finding aid beyond the basic inventory)를 온라인으로 공개하여, 방문 전에 연구자가 자료의 구성과 맥락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연구자의 시간을 아끼고, 아카이브 현장에서의 작업을 더 집중적으로 만들어주는 서비스다.

미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Reference Archivist(참고 아키비스트)'라는 직책의 존재다. 이 직책은 자료 관리가 아닌 이용자 서비스를 전담하며, 도서관의 참고 사서(reference librarian)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키워드 검색으로 찾기 어려운 자료를 함께 발굴하고, 연구 맥락을 이해한 위에서 대안적 접근 경로를 제안하는 이 역할은, 쾰른의 노년 아키비스트가 내게 해준 일을 제도화한 것과 다름없다. 리서치 서비스는 개인의 친절이 아니라 직책과 시스템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이 핵심이다.

물론 이들 아카이브도 예산 제약, 디지털 전환의 과제, 이용자 감소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아카이브가 자신의 역할을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연구자가 자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핵심 기능으로 명시한다는 점이다. 이 철학의 차이가 서비스의 차이로, 그리고 연구 환경의 차이로 이어진다.

5. 연구자에게도 공간을

아카이브를 자료의 수집, 보존 기관으로 보는 소극적인 인식을 넘어, 리서치 서비스 기관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아카이브는 아키비스트의 일터인 동시에 연구자가 필수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카이브가 아키비스트에게 편안한 업무 환경이 되기를 바라며, 이와 함께 연구자에게도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용자 친화적인 검색 시스템, 합리적인 열람 절차가 갖춰지기를 바란다.

현재 프로젝트에 AI 관련 테크니션이 초기부터 참여하기 시작한 흐름처럼, DB구축 및 아카이브 설립 사업의 기획, 구축 단계부터 아키비스트의 참여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환경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아카이브 운영에서 기록물 등록, 이관, 폐기, 정보공개청구 등 행정적 절차 이외의 기회를 통해 연구자와 아키비스트가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해외 아카이브들은 연구자에게 상당히 개방적이다. 물론 디지털화가 더디다는 한계가 있고, 개인정보 보호 등의 이유로 제한되는 기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연구자의 접근권이 우선시된다. 특히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공간이 외부인에게도 제공된다는 점이 한국과 다르다. 그래서 타지의 연구자가 장기간 머물며 작업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외부 연구자가 아카이브 소장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는 아카이브 공간 디자인 문제나 공간의 절대적인 부족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아카이브는 공간 구성부터 이용자, 외부 방문객, 연구자를 고려하지 않은 면이 있다. 아카이브는 직원 공간 외에는 수장고, 보존실, 전시공간 등이 주를 이룬다. 외부 연구자가 아카이브를 방문해서 자료를 열람하고자 했을 때, 열람공간을 제공하는 아카이브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이제는 각자의 공간에서 디지털 자료를 검색하며 연구하는 시대다. 조만간 연구자들이 아카이브에 자료보다 API를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상당기간 아카이브에 직접 방문해 자료를 조사하는 연구자들이 있을 것이다. 방문자를 위한 추가적인 공간을 바라는 것은 과욕일까. 연구자들에게 선호하는 연구 공간이 어디냐고 물으면 국회도서관이라는 답이 자주 등장하는데, 농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구내식당이 있어서’라는 점이다. 해외 도서관이나 아카이브에는 대개 외부인도 이용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가 갖추어져 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방문한 만큼, 공간과 자료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식당은 괜찮으니, 아카이브를 방문하는 연구자를 위해 책상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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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별여행자의 프로필 이미지

    지구별여행자

    0
    about 5 hours 전

    아카이브는 데이터 흐름을 설계하는 파이프라인으로, 아키비스트는 이를 조직하는 데이터 큐레이터가 되어야 하는군요. 성윤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국내 기록 소장기관들의 고민은 AX(AI 전환)입니다. 기존 자료 정리기술도 제대로 안되어 있는데 AI 하시는 분들이 데이터 파이프라인 구축해야 한다고 하니 고민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레거시를 버릴 수도 없고, AI 활용으로 가자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우리는 아마 퀀텀 점프하겠죠. 그런 사업에 예산이 몰리고.

    ㄴ 답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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