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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간 학예기록연구사

아니면 기록학예연구사?

2026.02.26 | 조회 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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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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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또 내 차례가 돌아왔다. 늘 그렇듯 순번은 눈 한번 깜빡이면 돌아오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차례가 다가올 때마다 괜히 두근거린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그 와중에도 묘하게 즐겁다. 이번에는 어떤 주제로 써볼까, 준비해 둔 자료 중에 무엇이 흥미로울까, 글을 읽어줄 사람들은 어떤 표정으로 이 문장을 지나칠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괜히 혼자 무릎을 탁 치기도 하고 발을 동동거리기도 한다.

시의성이 맞아떨어질 때는 더 그렇다. ‘아, 이거다!’ 싶은 순간이 오면 괜히 흥분해서 논문을 뒤적이고 문장을 붙였다 떼었다 하며 준비한다. 글을 쓰는 건 부담이지만 동시에 내가 아직 이 일을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정말 시간이 없다.

우리 모두 바쁘지만 늘 바쁘지만 이번에는 진짜 어떤 글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일정 부분 솔직하게, 조금은 급하게 쓰인 글이 될 것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하는 나의 소개

나는 지방직 기록연구사이고 지역의 공립미술관에서 근무한다. 미술은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사실상 끝났고 예체능에 특별한 소질도 관심도 없었다. ‘전시를 보러 간다’라는 말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워진 시대 이전을 살았기 때문인지 미술관은 늘 누군가의 공간이었지 나의 공간은 아니었다.

사서직 공무원으로 시작해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8년 차가 되었다. 방금 손가락을 세어 보다가 소름이 돋았다. 다수인 학예연구사 사이에서 기록연구사의 효용을 증명하고자 부단히 애써 왔다. 학문적 배경도 살아온 환경도 일하는 방식도 전혀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직장에서 처음 보는 군상들을 맞닥 뜨리며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다. 이 부분은 쉿. 언젠가 퇴직하면 미술관이라는 직장을 배경으로 블랙 코미디 소설을 쓸 계획이고 그때 제가 여기서 발표할게요.

 

무튼 나는 실용성과 효율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 감성보다는 구조를, 디자인보다는 데이터 정합성을 더 신뢰하는 사람. 엑셀을 열어두면 마음이 편해지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 내가 지금 전시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콘텐츠를 제작하고 문화상품을 개발하고 책을 만들기도 한다. 여전히 전시 보는 건 싫고 미감은 없고 예술의 무력함은 너무 잘 알겠으며 예쁜 쓰레기에는 관심이 없다. T 100%.

우리 미술관 관장님은 종종 나를 외부에 소개하며 잠시 멈칫하신다. “우리 학예… 기록… 연구사?”,  "우리 학예사~ 기록 전공했어~" 그게 무슨 말이세요? 새로운 직렬이다. 아물론 기록연구사가 학예 직군은 맞지. 제도 안에서는 분류되지만 대충 학예사로 퉁쳐지는 사람, 현장에서는 매번 설명이 필요한 위치다. 

 

 

회색 인간

최근 나는 또 일을 크게 벌이고 있다. 규모가 커질수록 부담도 커지고 야근과 주말 출근이 반복되며 잠들었다가도 걱정으로 깨는 날이 거의 매일이다. 그럼에도 다시 확장된 기획을 떠올리는 나를 보며 스스로 묻는다. 이것이 성향인지, 직무의 진화인지, 혹은 기록이라는 분야가 본래 요구하는 태도인지.

기록관리 전문가는 전통적으로 법·제도·평가·보존 체계를 중심으로 양성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기록이 존재하는 공간은 문서등록대장이나 서고의 모빌랙에만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 전시 공간, 공공 프로그램, 상품과 출판물까지 확장된다. 그렇다면 기록 전문직의 역량 또한 그만큼 확장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현장에서 조용히 확장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확장이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해외 기록 관련 단체들이 제시하는 역량 프레임워크를 보면 이미 거버넌스, 위험 관리, 이용자 연구, 서비스 설계, 참여와 옹호까지 포함해 기록전문직의 역할을 넓게 설정해 두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업무는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라기보다 문서로는 이미 정의되어 있으나 현장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재교육’ 또는 '계속 교육'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부족을 채우는 과정이라기보다 이미 익힌 메커니즘을 다른 업무에 적용하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팬톤 컬러가 그래픽용과 페인트용, 패브릭용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두 알 필요는 없지. 다만 우리는 색의 체계를 이해하고  매체에 따라 무엇이든 변환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기록을 다루며 익힌 원칙—맥락을 읽고, 기준을 세우고, 분류를 하고 활용을 하는 방법 같은 것들이 이미 장착되어 있지 않나.

이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다. 각자의 기관에서, 각자의 분야에서 모두가 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직함이 그것을 모두 설명해주지 못할 뿐. 그래서 불편한 것은 교육이라는 단어라기보다 변화한 역할을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생각이 단단한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어딘가 중간에 걸쳐 있는 회색 인간일지도. 개막을 한 달도 남겨 두지 않은 전시로 머리가 가득 차 있고 방학 기간이라 기록뽕이 빠져서인가. 어쩌면 오늘 이 글도 일종의 자기 위안일지 모른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아, 잘 까지는 모르겠는데 뭐 어쨌든 하고 있다고. 우왕좌왕 이것저것이 아닌 역할의 이동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문장들일 수도  있다.

아마 나만 이런 건 아닐 것이다. 각자의 기관에서, 각자의 직함 안에서, 원래의 업무를 조금씩 벗어나며 일하고 있는 ‘복합 연구사 st’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다들 공식적인 교육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장에서 배우고 적용하며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제보받습니다!

 

우리는 회색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흰색이나 검정이 되어야 하나.

아냐 회핑🩶🩷 조합 못 참지. 대충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첨부 이미지

그 와중에 엑셀 함수를 걸어서 전시 작품 명제표(캡션)를 뚝딱 만들어 내는 나를 보라. 엑셀 만세! 회색핑크 만세!🙋‍♀️

 

 

참고문헌

Australian Library and Information Association. Professional Pathways Overview: Technical Report. Canberra: ALIA, 2022.

Daniel, Anne, Amanda Oliver, and Amanda Jamieson. “Toward a Competency Framework for Canadian Archivists.” Journal of Contemporary Archival Studies 7 (2020).

Archives and Records Association (ARA). Competency Frame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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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1500000의 프로필 이미지

    h1500000

    0
    about 3 hours 전

    저도 미술관 아키비스트 하다가 공공기관으로 넘어왔는데 너무나도 공감이 갑니다.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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