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아카이브, 아키비스트, 아카이빙 이란 말이 우리 일상 주변의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하고 비교적 젋은 세대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한국말로 어감이 괜찮아서 그런걸까. 보통 이런 단어는 해외에서 먼저 생겨나서 유입되거나, 주로 대중매체나 온라인에서 유행하던 말이 일상까지 영향을 미치곤 했었다. '시크'라든지 '힙'이라든지. 그런데 ‘아카이브’처럼 전문 직군의 용어가 트렌드 최전선에 등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매우 대중적인 영역에서 그리고 상업 공간에서 마주할 때 전공자들은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것이다. ‘사실 아카이브는 매우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한 용어인데, 너무 가벼운 느낌적 느낌으로다가 쓰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처럼 빈약한 분야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면 좋은 것 아닌가.’ 약간 51대 49의 비율 같은 기분이랄까.
한편, 2010년대 이후로 우리나라는 아카이브 붐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여러 분야에서 아카이브 연구와 사업, 기획이 시행되고 있다. 무슨무슨 ‘아카이브 연구’, ‘디지털 아카이빙’, ‘아카이브 전시’처럼 어디에 붙여놔도 그럴듯해 보인다. 특히 공공기관에 안에는 아카이브라 이름 붙여진 시설, 공간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모두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지에는 의문이 든다. 어느 지역의 모 문화기관의 자료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매대 같은 공간에 ‘아카이브’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것을 보고선 갸우뚱 했을 때처럼 말이다.
기록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모두 아카이브의 정의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카이브(archive)는 사실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다. 하나는 역사적 가치 혹은 장기 보존의 가치를 지닌 기록(record)의 컬렉션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러한 기록을 보관하는 시설, 기관 등을 뜻한다. 따라서 아카이브는 기록들 그 자체이며, 어떠한 공간이나 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기록 중에서도 영구적인 보존 가치가 있어서 특별히 평가를 받고 선별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카이브에 포함된 기록은 무작정 모으거나 시간에 따라 쌓인 것들이 아니라, 분류하고 정리한 후에 평가를 거쳐서 영구히 남기기로 결정된 보존 대상이다. 그러니 전문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수집품이나 자료실를 비롯해 아무튼 간에 뭐든 취합해 놓은 군단과 ‘아카이브’는 엄격히 다르다. 누군가 어떻게 사용을 하더라도 이 정도 의미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지난달에는 제10회 미술사학대회가 <미술과 아카이브>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명지대학교, 2024.6.1.) 서양미술사학회, 한국미술사학회, 한국미술사교육학회, 한국미술이론학회가 함께 주최하는 큰 규모의 학술행사였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총 8개의 주제 연구가 발표되었으며 질의와 함께 토론회를 통해 논의하는 장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대주제에 ‘아카이브’가 들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정작 내용에는 빠져 있는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일까. 거의 대부분의 논문이 아카이브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기보단 미술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축적 혹은 수집을 아카이브라고 여기고 쓰여진 것으로 보였다. 토론 중간에 한 발제자에 의해 아카이브 아트의 개념에 대한 설명과 함께 데리다나 반아카이브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나 싶었지만, 시간 상의 문제인지 호응이 없어서인지 급하게 마무리되어 버렸다. 방법론적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아카이브에 방점을 찍고 미술을 바라본 관점인 것 같은데 말이다. 결국 이 행사에서 아카이브는 ‘미술’과 함께 학술대회 주제로 대등하게 올라간 용어치고는 조금 무색하지 않았나 싶다.
미술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아카이브라는 용어를 사용해 자신의 전공 장르에 접합해 전문적인 영역으로서 자기 분야를 넓혀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공공사업이나 프로그램 개발도 활발하다. 공공 정책에서 아카이브가 일정한 정도의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아카이브는 일종의 지원도구로서 어떤 대상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각광받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자는 것은 아니고, 유행처럼 번지는 이 상황을 잘 가늠해볼 필요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아카이브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후죽순 늘어나는 아카이브적(?) 방법론이 모두에게 적합한 것인지 가능한 영역과 무리인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게다가 두 분야의 만남인 만큼 난제가 난무할 테니 성급하게 접근하지 말고, 전문성으로 무장하되 서로에게 유연한 마음으로 대해야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아카이브 이전에 기록에 관한 언급이 필요하다. 순서로 보면 기본적으로는 1차적으로 수집된 기록을 가장 먼저 관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카이브(archirving)는 기록을 관리(records managing)하다가 평가한 이후에 보존하는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서 기본 단위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는 '아카이브학'이 아니라 '기록학'이라고 통용된다. 그리고 기록학 이론에서 중요한 하나의 축이 역사가에게 기여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전공자로서 입문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바다.(쉘렌버그의 가치론) 이렇듯 1차 자료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이 직업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타자를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전문성과 정확성, 진실함을 요구하는 숙명을 지닌다. 좀 더 학문적으로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기록학에는 마치 기독교의 믿음소망사랑처럼 신성시되는 기록의 4대 속성이 있는데, 다음에서 설명하는 진본성, 신뢰성, 무결성, 이용가능성 이 그것이다.
그만큼 전문가로서 아키비스트들은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지금의 트렌디한 뉘앙스와는 다르게, 아카이브에 이르기까지 기록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수많은 절차들은 성실함을 미덕으로 하는 지난한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 만, 수 천건의 기록들을 엄격하고 복잡한 표준에 의거하여 분류하고 정리하고 다시 선별하고 이관하고 이런 일들을 정해진 기간 안에 처리하고 매해 반복한다. 결코 흥미롭고 신나는 유형의 업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일한다. 그러니까 아카이브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유행이 좀더 오래되길 바라면서도 기록의 덕목이 잘 알려져서,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은 껍데기가 아니라 왜 기록을 보존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의미로 이 용어가 좀더 활용되기를 바라본다.
우리 사회에서 ‘아카이브’가 어떻게 쓰이는지와는 별개로, 기록인들에게 의미하는 바 또한 미세한 차이를 가지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내게도 일화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지도교수님께 연구 주제에 관해 상의하러 가서 한참을 이러 저러한 말씀을 드리다가 생각이 안풀려 고민 중인 나에게 교수님께서 대뜸 물어보셨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아카이브가 뭐야?' 그리고,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작은 충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는데, 새삼스레 아카이브의 정의를 일반화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시스템 안에서는 관리 기록의 유형에 따라서, 세부 전공이나 업무의 성격에 따라서 각자가 아카이브와 기록을 다양한 의미로 인식하게 된다. 정확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하면 아키비스트로서 어떤 ‘아카이브(혹은 기록관리기관)’에서 어떤 ‘아카이브(혹은 기록)’를 관리하고 있는지 명징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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