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지역에서 살아갑니다.
중국계 미국인 인문지리학자 이 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2020, 사이)에서 공간과 장소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됩니다."* 투안에게 공간은 '추상적이고 낯설며, 의미가 결여된 백지'입니다. 한편 그는 장소를 '의미로 가득 찬 공간', '인간화 된 공간'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푸 투안, <공간과 장소>, 2020.
우리가 사는 곳 중 '장소'라고 부를 만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개개인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나 깊이는 다르겠지만, 지역도 장소가 될 수 있겠습니다. '경제개발' 시기 이후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 된 도시와 농촌 '공간'이 뻔한 일관성을 벗겨내고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상징, 일상, 스토리와 같은 의미를 찾게 된다면, 비로소 지역이 장소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역소멸 위기가 심각하게 체감되는 요즘, 이러한 지역의 장소성 찾기는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지역이 가진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로 만들고 그 장소 안에서 또다시 새로운 지속 가능한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경남 남해의 '돌창고 프로젝트'나 제주 한림읍의 '성이시돌목장', 인천 '마계인천 페스티벌' 같은 곳들은 공간에 장소성을 부여하고, 공간이 과거에 가졌던 기능을 현재에 필요한 것으로 바꾸며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장소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이미 존재합니다. 장소성 구분하기, 도시재생, 공간 문화자원 발굴과 같은 실천적 연구를 남긴 사례가 많습니다. 장소성을 유형으로 분류한 연구(권윤구, 임승빈, 2014, 한국도시설계학회)나, 지역이 가진 장소자산을 창출하는 과정을 도시재생 방안으로 제안하는 연구(유하나, 2018, 한국지역지리학회)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역의 특정 공간에 대한 장소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 연구(인천연구원, 인천 내항 배후산업공간의 역사적·장소적 가치 해석 결과 보고서, 2023)가 주목 받기도 했습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왔던 '장소성'에 대한 감각을 익혀보며, 오늘은 가벼운 마음으로 지역의 장소성을 대변하는 아주 작은 박물관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는 '순수박물관(Masumiyet Müzesi, The Museum of Innocence)'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의 성수동 같은 '힙한' 동네 베이요올루(Beyoğlu)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탄불 출신 소설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이 동명의 소설을 집필했고, 2008년 소설 발표 후 같은 해 개관했습니다. 원작 소설인 순수박물관은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케말'이 기록한 산물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이스탄불의 부유층 출신인 서른 살 남자 케말은 상류층 여성 시벨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먼 친척 퓌순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대입 시험을 앞둔, 갓 열여덟 살이 된 퓌순은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여성이다. 두 사람은 혼전 성관계가 금기시됐던 1970년대의 이스탄불에서 매일 낮, 케말 어머니 소유의 빈 아파트에서 몸을 뒤섞으며 사랑을 나누게 된다. 퓌순을 사랑하면서도 시벨과 결혼하려 한 케말의 계획과 달리 케말과 시벨의 화려한 약혼식을 지켜본 퓌순은 잠적한다. 퓌순을 잃은 고통 속에 케말은 시벨과 파혼하게 되고 퓌순이 사랑을 나누다 떨어뜨렸던 귀걸이 한 짝부터 퓌순이 남긴 꽃무늬 손수건, 담배꽁초, 재떨이, 찻잔 따위를 모으게 된다. 케말은 가까스로 다른 남자와 결혼한 퓌순을 찾게 되고 둘의 관계를 되돌린 듯했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퓌순은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등지게 되고 케말은 둘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퓌순의 옛집을 사들여 순수박물관을 세운다."*
*서은영, [휴] 현실이 된 '순수박물관'... 그곳에 한 남자의 사랑·집착이 기록되다 2017.12.06. 서울경제
흥미로운 지점은, 소설과 박물관의 경계, 즉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퓌순과 케말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스탄불 유럽지구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요상한 박물관은 소설에 나오는 퓌순의 옛 집 그 주소에 그대로 위치해 있습니다. 주인공 케말의 실존인물이 늙어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케말의 방은 박물관 맨 꼭대기 층에 재현되어 있습니다. 파묵이 2002년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하면서 동명의 박물관을 함께 설립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녔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는 공공성, 민족성, 공익성을 표방하는 박물관이 아닌 개인 삶의 고통, 슬픔, 인내, 즐거움, 불안과 같이 인간이 겪은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는 박물관을 주로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소설에서 케말은 퓌순과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광적인 수집가가 됩니다. 광적인 수집벽을 넘어 순수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현실에서 실제 박물관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케말의 수집벽은 파묵의 수집벽과도 같습니다. 소설의 주 무대는 1970~80년대의 이스탄불. 자연스럽게 케말과 퓌순의 추억은 이스탄불 곳곳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채워집니다. 우리가 데이트하는 을지로, 이태원, 성수, 신촌, 이대, 홍대 같은 곳들이요.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 성평등 문제, 치안, 인구조사와 같은 사회적 변화, 인기상품과 같은 사회적 면면도 상징물로 수집됩니다.
이런 추억 수집물은 70여 개의 컬렉션으로, 3개 층에 걸쳐 순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컬렉션을 나눈 기준은 당연히 케말과 퓌순의 추억 속 키워드입니다. 그러나 800쪽에 달하는 분량의 사랑 이야기를 몰라도 좋습니다. 컬렉션에 속한 수집물은 이스탄불 시민이나 여행자라면 알 만한 지역의 소박한 일상을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퓌순이 살았던 메르하멧 아파트의 간판은 어느 골목을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간판입니다. 70년대 이스탄불의 부유층의 결혼식과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하는 강태공들의 모습, 생선 케밥과 튀르키예 인들의 아침식사 메뉴와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모호한 이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여행자는 케말과 퓌순이 됩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소설 주인공의 입장에 서서 공간에 부여된 스토리를 철저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박물관에 오기 위해 지나쳐 온 모든 것들이 케말과 퓌순의 시선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순수박물관은 평범했던 아파트 건물 공간에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스토리를 입혀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파묵의 수집물은 여행자의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파묵의 박물관은 지역 전체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인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결국 문학작품의 메타픽션적 아름다움을 극대화, 가시화한 하나의 프로젝트로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묵의 박물관은 지역의 작은 박물관으로서 지속가능한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장소성은 누가, 어떤 특정 공간에, 어떤 내용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개인이 모여 사회가 구성되는 것처럼, 저는 개개의 시선과 주관이 모여 장소성을 부여한다고 믿습니다. 그럼 그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겠지요.
매일 출근길에 건너는 한강철교 초록빛 다리, 우리 동네 골목에서 동네사람들끼리 경험한 그날의 추억, 같은 반 학생들과의 고3 시절 학교 생활. 공간에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개인이 다수로 모인다면 그 공간의 장소성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개인이 공간에 장소성을 부여하고 그 장소에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장소성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역의 장소성은 누군가 공통 주제를 내어주고 거기에 부합하도록 지역을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는 지역의 장소성을 모색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런 장소의 파편들이 모여 지역이라는 모자이크화를 만들고 그 속에서 다양성에 기반한 지역의 색깔이 만들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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