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를 기록하기’라는 주제로 매회 떠오르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고 있다.
‘장소’는 무미건조한 공간을 사람이 사용하면서 의미를 갖게 되는 공간을 말하며,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이 관계는 사람이 공간을 쓰면서 또는 공간이 사람을 담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변화하며 적당한 시점에는 ‘적응’한다.
적응(適應)
1. 일정한 조건이나 환경 따위에 맞추어 응하거나 알맞게 됨.
2. (생명) 생물이 주위 환경에 적합하도록 형태적/생리학적으로 변화함. 또는 그런 과정.
3. (심리) 주위 환경과 생활이 조화를 이룸. 또는 그런 상태. 환경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와 스스로를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가 있다.표준국어대사전
경험적인 느낌으로 선택해본 단어에 근거를 찾고 싶어서 사전을 검색하다가 위 설명이 가장 가까웠다. 특히, 위 설명 중 3번. 주위 환경(공간)과 생활(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며, 두 경우로 나눈다는 설명. 환경(공간)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와 스스로(사람)를 변화시켜 적응하는 경우.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기도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이 주변환경을 변화시키고 스스로가 적응한다기에. 낭만 두스푼만 넣어보면, 주위 환경(공간) 자체도 생명체로 본다면 스스로 변화하는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더해본다.
실제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위 두 가지 경우는 명확하게 나뉘어져 보이기 보다는 두 작용이 함께 동시에 진행되어 얽혀서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다이어그램은 청계천 기계공구상가 지역에 있는 정밀가공 작업장 여러 곳의 기계배치를 주변환경(입구, 길)과 함께 동일한 스케일로 그려본 것이다. 정밀가공 작업장들은 대부분 오래된 주거용 한옥을 개조하여 들어섰으며, 공정특성상 주로 선반기계(빨간색으로 표시)와 밀링기계(파란색으로 표시)를 필수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 요소가 작업자에게 주어진 공간을 정밀가공 작업장으로 사용하는데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요건이었다. 한 채의 한옥을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 생겨난 비정형의 공간과 기본적으로 배치시켜야할 기계들. 조사한 것을 시각화한 다이어그램에서 보면, 위에서 보면 T자형인 파란색 기계(밀링)는 대부분 작업장 안쪽의 모서리에 꼬리가 면하도록 비스듬히 위치하고, 일자형인 빨간색 기계(선반)는 대부분 입구쪽에 머리부분을 면하게 배치되어 있다(선반의 머리가 길과 면하게 한 것은 길다란 봉과 같은 재료를 작업장 밖 길에서 넣기 위함이다). 이렇게 배치함으로써 좁은 공간의 중심부는 비어두어 작업자가 필요한 일과 생활을 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갖추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좁은 비정형의 공간에 꼭 필요한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위치에 넣고 본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한 작업자의 노력과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다.
공간 내외부의 사물도 마찬가지다. 작업자들이 주어진 것들(철 가공 후 남은 재료)과 자신들의 기술(철을 다루는 기술)을 더해 '적응'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체인 H빔의 빈 여백에 작은 철판을 끼워넣고 용접하여 수납장을 만들고,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빠우공정 작업장의 지붕 위에 드럼통을 활용한 굴뚝을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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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공간이 서로 적응하는 과정과 안정화된 결과를 살펴보고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재의 생활상의 기록하여 추후 연구자료로 쓰이는 것 외에도 생활자의 관점에서 도시건축 환경이 어떻게 설계되고 구축되어야 하는가에 영향을 주는 기초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설계하고 계획되어야 한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섬세하게 바라보고 읽어낼 수록 도시환경은 보다 더 사람들이 걷고 머물기 좋은 환경으로 변할 것이다.
섣부르지만 기록관리와도 연결시켜보면, 기록도 장소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사람(생산자/관리자)과 기록(물)도 상호작용하고 적응한다. 사람은 기록의 형태에 때로는 순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선시키기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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