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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꺼져도 위험은 남는다

기록관리의 위험관리 체계를 다시 생각하며

2025.10.21 | 조회 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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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26일 저녁,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 전산동의 UPS 배터리 구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리튬이온 배터리와 서버가 인접해 있던 공간에서 불길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주요 정부 전산망과 행정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이 사고는 디지털 행정의 핵심 기관에서도 물리적 방재 체계와 시스템 이중화 절차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백업 장치는 존재했지만 즉시 전환 가능한 핫스탠바이(Hot Standby)’ 구조가 아니었고, 복구 과정에서도 인력과 책임이 특정 부서에 집중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설비의 문제를 넘어, 디지털 기록관리에서 위험관리 체계의 실효성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했다.

 

불길은 몇 시간 만에 잡혔지만 그 여파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화재는 순간의 열이지만, 그 뒤에 남는 공백은 세대 전체가 공유한다. 단순한 행정 불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와 함께 정보·증거·기억이 함께 소실되는 공백 말이다.

 

형태는 달리하더라도, 이러한 공백은 역사 속에 여러 번 있었다.

1973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National Personnel Records Center(NPRC)에서 화재가 났을 때, 16 ~ 18 백만 건의 군 인사기록이 사라졌다. 불은 6층 건물의 상층부에서 시작되어 20시간 넘게 타올랐고, 당시 건물에는 방화벽과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기록보관의 효율만을 고려한 개방형 구조가 오히려 화염을 확산시켰다. 이 사건은 단일 저장소·원본 중심 체계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The NPRC records fire of 1973 (출처 : www.va.gov)
The NPRC records fire of 1973 (출처 : www.va.gov)

1978년에는 미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NARA)의 필름서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니트로셀룰로오스 필름이 저장된 금고에서 자연발화·폭발이 일어났고, 12.6 백만 피트에 달하는 뉴스릴 필름이 한순간에 소실됐다. 물 기반 자동소화 설비에도 불구하고, 필름 매체의 특성상 대응 자체가 제한적이었다. 이 사건은 기록매체의 물리·화학적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효과적 방재가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Fire damage inside the Suitland nitrate film vault, 1978. (Records of the National Archives)
Fire damage inside the Suitland nitrate film vault, 1978. (Records of the National Archives)

국내에서도 오래전,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로 조선 왕실의 초상화 30여 점이 잿더미가 되었다. 전란 직후 임시 보관된 창고는 목조건물로, 인력·장비 모두 부족했다. 불길은 인근 주택가 화재에서 옮겨붙었고, 그 어떤 유물도 안전하게 옮겨질 수 없었다. 사라진 이미지는 기록의 상실이자, 한 시대의 정체성을 함께 태워버린 사건이었다.

1954년 부산 용두산공원 화재(출처 : wikipedia)
1954년 부산 용두산공원 화재(출처 : wikipedia)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단일 저장소 의존’, ‘매체 특성의 무지’, ‘임시보관 구조의 한계라는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후 각국은 방재 기준을 정비하고, 내화구획·항온항습·데이터 백업 등 제도적·기술적 기반을 강화해왔다. 오늘날 기록기관의 물리적 환경과 제도적 틀은 과거보다 훨씬 발전했지만,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가 보여주었듯이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위험을 동반한다. 기록의 전자화는 정보의 접근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물리적 재난이 곧바로 서비스 단절과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입증했다.

 

재난은 설비에서 시작되지만, 진짜 피해는 체계의 공백 속에서 커진다. 위험은 기술로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응의 구조와 책임의 분산, 인력의 훈련과 복원 절차가 함께 작동해야 줄어든다. 기록물관리기관은 과거의 화재를 교훈으로 삼아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만약 지금 다시 불이 난다면이라는 가정에 확신을 가지고 대응하기 어렵다. 위험관리 체계는 제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체계가 실제로 작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대부분의 1인 기록관은 표준 매뉴얼을 기관 실정에 맞게 일부 문구만 수정해 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재난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인적·기술적 준비는 거의 되어 있지 않다. 비상대응 조직은 있으나 훈련은 형식적이고, 백업 체계는 있으나 복원 검증은 미비하다. 위험관리 매뉴얼은 존재하지만, 위험관리 역량은 부재한 상황이다. 이제는 변화하는 환경에 맞는 실질적 위기 대응 교육과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

화재나 전산사고뿐 아니라, 사이버 침입·정전·기후 재난 등 복합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통합적 위험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 기록관리자는 더 이상 단순한 보존 관리자가 아니라, 기억의 인프라를 지탱하는 위험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기록관리의 본질은 지속성의 보장에 있다. 그 지속성은 문서나 데이터의 보존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위험을 예측하고 대비하며, 재난 이후에도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체계 그것이 곧 오늘의 기록관리자가 새롭게 설계해야 할 구조이자, 우리가 다시 점검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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