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하나 때문에
왜 설치가 안 됐을까? 어디서 잘못된 걸까? 수십 개 명령어 중에 어떤 게 문제인지 모르겠다. 지우고 처음부터 하기를 반복했다. 아톰 포럼에 묻자니 애매하다. “설치가 안 되는데 왜일까요?” 묻는 초짜들도 있던데 그런 수준 낮은 질문을 올리긴 싫었다. 무엇보다 영어로 올리는 게 귀찮다.
구글 검색하니 스택오버플로우에 점이나 쉼표, 띄어쓰기가 맞는지 살펴보라는 쓰레드가 있었다. 그래, 아톰 설치 매뉴얼이 다 맞으리란 법은 없지. 띄어쓰기가 잘못되었거나 점 하나가 빠져있진 않을까? 메모장에 옮겨 보니 명령어가 길어 줄바꿈된 것들에 문제가 있었다. 대단한 발견이었다. 다시 설치해 보니 뭔가 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 나오던 화면도 몇 개 나오고. 근데 결국 또 실패다.
설치 한 달째다. 나란 사람은 개발할 깜냥이 안 된다. 머릿 속에선 한 달 전 주간회의 때 아카이브시스템을 만들어 보겠다 호기롭게 말하는 내 얼굴에 죽빵을 날리는 상상이 반복되고 있다. 설치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근거로 이 어려운 걸 한다 했을까? 개발 고수를 모셔와 도와달랠까? 멀쩡한 사람의 인격이 궁지에 몰린다.
결국 설치는 됐다. 앗~싸아~ 부둥켜 안고 축하할 기분이 나진 않았다. 허탈했다. 문제의 원인은 파이프였다. 소문자 엘이나 대문자 아이처럼 생긴 파이프 다들 아실런지. 슬래시를 똑바로 세워놓은 것처럼 생긴 기호가 파이프다. 매뉴얼엔 파이프 | 로 되어 있는데 윈도우 키보드에서 원화 ₩ 로 입력되는 게 문제였다. 파이프 하나에 허송세월한 게 억울했다. 그치만 누굴 탓하랴. 두벌식 키보드 만든 분이나 키보드 제조사, 세종대왕에게 잘못이 있다 한들 입력 잘못한 건 나다. 현실에선 점 하나 있고 없고 큰 차이 아닐 수 있다. 개발 세계에선 디테일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세부사항을 놓치면 망할 수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 이 격언을 혹독하게 배웠다.
액세스 투 메모리의 철학
본격적으로 써 보기 전에 아톰 홈페이지부터 둘러봤다. 보통 상단 배너의 문구가 제품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2007년부터 메모리에 대한 액세스 제공”
흠.. 이름 하난 잘 지었어. 인류의 기억에 접속, 액세스 투 메모리, 아톰.
“AtoM은 Access to Memory의 약자입니다. 다국어, 멀티 리포지터리 환경에서 표준 기반 기술 및 액세스를 위한 웹 기반 오픈소스 애플리케이션입니다.”
설명이 장황하다. 한 마디로 소장기록 카탈로깅 소프트웨어라 해도 될 텐데. 이렇게 장황한 데는 이유가 있다. ICA가 워낙 야심차게 만들어서 뭐 하나 빠뜨리면 서운한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웹 기반, 표준, 다국어, 멀티 리포지터리는 아톰의 철학을 보여주는 특징이다.
웹 기반: 자유롭고 독립적인 툴이고 싶다
웹 기반이란 게 뭘까? 컴퓨터에 설치해서 쓰지 않고 굳이 웹 브라우저로 접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자주 쓰는 웹 기반 툴이 뭐 있지? 지메일, 구글 드라이이브, 넷플릭스, 유튜브.. 너무 많잖아? 웹 기반이란 건 인터넷만 연결되면 된다는 것이다. 윈도우나 macOS, 모바일을 따지지 않는다. 웹 브라우저만 있으면 접근 가능하고 다양한 기기에서 일관된 경험을 제공한다. 단점은 인터넷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보안 위험에 더 취약하다는 거다. 브라우저로 인해 기능이 제약되기도 한다. 아톰은 완고하고 안전한 툴, 자유롭고 독립적인 툴 중 후자를 택했다. 보안이나 기능은 제공자가 감당할 몫이다.
표준 기반: 정리기술 시간에 아톰을 안 배웠다면 ICA 기술표준을 반만 배운 거다
아톰 프로젝트의 여덟 개 목표 중 두 번째가 표준이다. ICA 표준에 따라 기록물을 기술하여 관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아톰에는 ICA 기술표준 네 개가 그대로 들어 있다. 기록을 기술할 땐 ISAD(G), 인물.단체.가문을 기술할 땐 ISAAR-CPF, 기록소장기관을 설명하는 ISDIAH(아이스디아~ 로 읽으면 전문가 느낌 난다), 업무기능을 정의하는 ISDF를 사용하게 된다. 기록관리교육원에서, 대학원에서 정리와 기술 수업을 두 번 들었지만 기술표준은 용어부터 어렵고 생소했다. 아톰을 써 보니 쉽게 이해가 됐다. 계층별 기술이나 집합적 관리가 이렇게 대단한 건지 비로소 깨달았다. 컬렉션에 정보를 많이 쓰고 아이템엔 제목만 넣어도 되겠구나. 시리즈에 생산자 이름을 넣으면 파일과 아이템에 상속되는 게 당연하구나. ISAD의 생산자 이름은 ISAAR의 타이틀로, ISAD의 리포지터리 네임은 ISDIAH의 타이틀로 연결되니 편하구나. 마우스 클릭만으로 복잡한 컬렉션의 맥락을 쉽게 파악하도록 한 ICA의 설계 철학에 아직도 가끔 감탄한다. 표준을 텍스트로 읽을 때 드러나지 않던 기록 카탈로깅의 베스트 프랙티스가 아톰에서 완성되는 거였다. 기록대학원에서 아톰을 안 배웠다면 ICA 기술표준을 반만 배운 거다.
다국어: 모국어로 기술하고 다국어로 번역하자
프로젝트의 목표 세 번째가 다국어 지원이다. ICA는 전 세계의 소규모, 대규모 아카이브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아톰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작성된 콘텐츠를 다국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 이용자들과 공유하는 걸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아톰을 소개할 때마다 개발자들이 가장 놀라는 게 이 부분이다. 고객이 다국어 서비스를 원하면 언어별로 서버를 추가하거나 구글 번역기를 붙인다. 한글 사이트 개발에 1억원 들였다면 일본어 5천, 중국어 5천 식으로 언어 하나당 본 사이트 절반 가량의 개발비가 든다. 구글 번역은 아쉬운 대로 사용하는 정도지 역사적 컬렉션의 기술을 옮기는 데는 무리다. 아톰은 아키비스트가 언어별로 기술만 하면 이용자가 본인의 모국어로 카탈로그를 이용할 수 있다. 아톰의 모든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데이터베이스 콘텐츠는 다국어로 제공된다. 물론 영문 인터페이스를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건 해당 국가의 커뮤니티에서 자원했다. 2014년 1월부터 10개월 동안 전국의 기록대학원 학생과 교수님들의 자원봉사로 아톰 2.1 버전의 한국어 번역본이 공식 릴리즈에 반영되었다.
멀티 리포지터리: 아카이브 포털을 만들자
메모리비씨나 아카이브캐나다와 같은 초기 아톰 프로젝트들은 여러 아카이브의 소장기록을 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멀티 리포지터리 플랫폼으로 개발되었다. 문화유산기관들의 컬렉션을 통합 제공하는 유로피아나, 미국의 DPLA 덕분에 이런 형태는 익숙하다. 메모리비씨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도서관, 박물관, 아카이브 201기관, 아카이브캐나다는 캐나다의 주요 문화예술기관 780개의 소장기록을 한 아톰 사이트에서 제공하고 있다. 이건 ICA 기술표준의 디자인 철학에 따른 자연스런 기능이다. 한 기관의 컬렉션만 서비스하건 여러 기관의 컬렉션을 통합 제공하건 별도의 노력이 들지 않는다. 특정 지역이나 동일주제 기관들의 컬렉션을 한꺼번에 온라인으로 제공한다면 이용자는 연구할 자료가 어디 있는지 탐색한 후 해당 기관에 방문하여 교통비를 획기적으로 아낄 수 있다.
오픈소스: No More Bingo Night!
아톰 프로젝트의 여덟 개 목표보다 우선하는 원칙은 무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톰 프로젝트의 리더였던 아티팩추얼 시스템즈의 피터 밴 가든은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내가 1997년 캐나다 UBC에서 아카이브 석사를 마치고, 상업용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잠깐 일했을 즈음 있었던 일이다. 거기서 나는 대부분의 아카이브들이 예산이 부족함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커뮤니티 아카이브에서 근무하는 연세 많으신 한 여성 아키비스트와 통화한 내용을 소개하겠다. 나는 그 분께 아카이브 카탈로깅 작업에 우리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아주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며칠 전 자선 빙고게임 행사가 아주 잘 되어서 오백 달러나 생겼어요, 드디어 소프트웨어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행히도 나는 그 분께 우리 소프트웨어의 가격은 모금된 돈보다 훨씬 비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실망한 목소리로”
“아.. 그럼 빙고 게임을 몇 번 더 해야겠네요..”
라고 했다.”
“또 한 번은 소프트웨어 기능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기존 고객을 방문했다. 나는 시스템을 살펴본 후, 모듈만 하나 추가 구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불행히도, 그 모듈의 가격은 수천 달러였다. 고객은 "올해 예산배정이 끝나서 내년 이후에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그들은 검색도구를 만들고 인쇄하기 위해 워드 프로세싱 소프트웨어를 계속 사용하고 결과적으로 다른 시스템으로 데이터를 마이그레이션해야 했다. 이 경험들은 내게 큰 인상을 줬다. 나는 동료 아키비스트들을 도울 기술적 지식이 있었지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곳에만 툴을 제공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기본은 무료라는 것이다. ICA는 전 세계의 기록소장기관이 ICA 기술표준으로 기록을 기술하고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데 큰 돈이 들지 않기를 원했다. 피터에게 전화했던 아키비스트는 카탈로깅 소프트웨어 가격으로 50만원 정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나라장터에 올라오는 아카이브시스템 개발비는 2-5억 정도이다. 패키지 솔루션 가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물정을 모르는 걸까? 맥북에서 영상 편집하는 파이널컷 프로의 판매 가격은 45만원이다. 전 세계 크리에이터들이 사용하는 멋진 툴의 가격은 이 정도이다. 아카이브란 작은 시장을 감안하더라도 소프트웨어 가격이 수요자의 기대를 한참 넘어선 건 사실이다.
아톰 프로젝트의 여덟 개 가치에는 ICA가 아톰을 오픈소스로 공개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ICA의 사명을 실현하는 데 오픈소스 협업 정신이 매우 부합했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안다.
ICA-AtoM 프로젝트의 가치는 다음을 포함하여 오픈 소스 협업 정신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 기술 전문성을 공개적으로 공유
- 전문적인 모범 사례 홍보
- 활성적인 사용자 및 개발자 커뮤니티 육성
- 기존 오픈 웹 기술을 활용하여 최고의 아카이브 소프트웨어 제공
- 재정 및 기술 자원이 부족한 조직에 솔루션 제공
- 필요한 재정 및 기술 자원을 보유한 조직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
- 관련 커뮤니티와의 학제간 협업을 위한 공통 기반 제공
- ICA-AtoM의 광범위한 채택으로 혜택을 얻는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ICA-AtoM 및 기타 ICA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수익 창출
근데 뭐 이렇게 생겼나?
오케이! 아톰 좋은 거 알았어~. ICA도 잘했어~ 근데 뭐 이렇게 생겼냐? 디자인을 한 거야 만 거야? 이게 최선이었나? 자, 내가 결정적인 문제를 알려줄께. 케이 스탠다드에 따르면 메뉴는 상단에 있어야는데 왼쪽에 있지? 메인 페이지에 인터랙티브까진 아니더라도 사진 좀 넣어서 임팩트 줘야는데 안내문만 잔뜩 넣었지? 그리고 관리자 화면이랑 서비스 화면이 똑같은 건 태어나서 처음 본다. 관리자 로그인하면 대시보드 나오면서 전문가 느낌 팍팍! 이용자 화면은 볼거리 많고 첫 느낌 좋으면서 기능도 많지만 이용은 쉽게! 몰라? 아카이브 기본 아니야?
아톰 생김새가 황당해서 여러 아톰 사이트를 찾아 봤다. 유네스코도 월드뱅크도 이 디자인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담당자들 제정신인 건지. 당장 이들에게 케이 아카이브 전파가 시급하다.
레퍼런스
The ICA-AtoM Project and Technology (2009) Peter Van Garderen. Archives Association of Brazil presentation.
Transifex - https://www.transifex.com/
MemoryBC - https://www.memorybc.ca/
ArchivesCanada 아톰 카탈로그 - https://archivescanada.accesstomemory.ca/
UNESCO Archives AtoM Catalogue - https://atom.archives.unesco.org/
World Bank Group Archives Catalog - https://archivesholdings.worldbank.org/informationobject/browse?_gl=1*ekhoxz*_gcl_au*MTczNzcxMjg1NC4xNzI2NjM2MD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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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카이브를 전공하고 웹 제작 일을 하고 있는데 더욱 공감대가 많네요. 저도 AtoM은 대학원 때만 살짝 구경해보고 졸업 후에는 살펴볼 기회가 없었는데, 실제 관련 도구를 다루시는 분들의 현장감(?) 있는 이야기를 들으니 궁금함도 커지고 놀라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구별여행자
감사합니다. 그래도 대학원 때 다뤄보셨군요. 아톰은 쓰면 쓸수록 잘 만들어져서 감탄합니다. 앞으로 여러 툴을 소개하겠지만 카탈로깅에선 1등인 것 같습니다. 웹 제작 일을 하신다니 기회가 되면 AtoM 벤치마킹해 보셔요.
담
네 기회가 되면 아카이브랩에서 한번 배워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희는 Drupal, Wordpress 같은 CMS를 주로 활용해서 웹 제작을 진행하는데요. AtoM이 아카이브의 표준 메타데이터에 집중한다면, 이런 CMS는 콘텐츠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콘텐츠'가 '기록'인지, 그것이 모이면 디지털 아카이브 인 것인지... 이런 것들이 질문으로 따라오지만... 앞으로 말씀해주실 '카탈로그' 도구로서의 AtoM도 기대가 되네요!
지구별여행자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건 AtoM의 좋은 점을 반영하시면 좋겠습니다. 워드프레스와 드루팔로 만드시는 CMS에 가까운 툴은 CollectiveAccess 나 Omeka 등이 있어요. 기회가 되면 세미나 한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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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bEaN
저는 절반만 배웠군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구별여행자
이번에도 댓글 감사합니다. 한두번은 다뤄보시지 않았던가요? 카탈로깅 담당자가 있다면 꼭 한번 아톰을 써보라고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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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여행자
(from 이상민 박사) 잘 읽었어요. 제 경우에는 설치 잘 하는 분들에게 부탁해서 설치하고 디지털화와 분류체계 만드는 일에 집중했었어요. 시리즈별로 기술하는 게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톰을 설치해서 디지털기록 리포지터리를 세놓는 데가 있으면 아카이브를 몇개 더 설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 그런 데가 있는지요? 그리고 민감한 개인정보가 있는 기록 아이템을 식별해서 접근 제한을 하는 게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저는 원본 저장매체가 여러개 있어서 올리지 않는 방식을 취하려고 했지요. 그래도 식별 작업은 필요하지요. 역시 이 핸드북이 디지털보존 전체를 아우르는 유용한 핸드북으로 보입니다. 자가 평가 툴도 부문별로 제시되고 있지요. https://www.dpconline.org/handbook 개정 2판입니다.
지구별여행자
국내에 AtoM을 다루는 곳은 아카이브랩인데 서울대 이대 등 교육용 호스팅 정도를 합니다. 강사님들 요청에 따라 비공식 제공하는 서비스라서 그런 요청도 대응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문의해 보셔요.
지구별여행자
그리고 저 설치 잘 합니다 v-.-v. 이 글은 픽션이라 10년 전 경험을 모티브로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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