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즈음에 영화깨나 본다는 사람들이라면 아나운서 정은임 씨가 진행하던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이하 '정영음'>를 기억할 것이다. 워낙 새벽 시간이라 애청자라 해도 매일 듣긴 어려운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시간 속에는 대중적으로 인기 없거나 또는 이상하고 지루하다고 핀잔받는 영화의 속내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 이야기를 함께할 수 있었다.
'정영음'은 MBC에서 1992년 11월 2일부터 1995년 4월 1일까지 새벽 1시에 진행되다가 종영했고, 8년 뒤 다시 재개해 2003년 10월 21일에서 2004년 4월 25일 6개월간 새벽 3시에 진행된 영화음악을 중심으로 한 '영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정영음> 폐지 4개월 뒤인 2004년 8월 4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정영음>이 시작되던 1994년에는 <씨네21>이나 지금은 폐간된 비평 중심의 영화잡지 <키노>도 생기기 전이었었다. 씨네필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영화광들은 PC통신이나 문화운동, 각국 문화원, 수입되지 않는 일본 영화나 프랑스 영화를 상영하며 영상을 공부하던 <문화학교 서울> 등에 의존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평을 넓히던 때였다.
당시 <정영음>에는 박찬욱 감독이 생계를 위해 영화 평론을, 최동훈, 류승완이 신인 감독으로, 전도연 배우가 첫 영화 <접속>에 출연하기 수년 전 "영화를 꼭 해보고 싶다"라고 인터뷰를하기도 했다.
<정영음>은 단지 영화소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화를 중심으로 한 팬덤의 초기 형태로, 씨네필들이 모인 아지트였다.
그러나 <정영음>이 당시 척박한 한국의 문화적 빈곤 때문에 인기를 끌었던 것만은 아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1992년에 입사한 신입이었지만 그 자신이 영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영화광이었고, 영화를 통해 청취자 또는 관객과 함께 열정적으로 영화 속을 탐닉했고, 그러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준 영화를 통해 묻고자 했던 시대정신과 사회를 대하는 태도,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진행한 시간은 도합 3년 남짓으로 길지 않다. 하지만 필자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여전히 정은임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와 지금으로 이어지는 향수, <정영음>과 그에게 기대고, 배웠던 그때의 마음에 대한 것이리라.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정영음>은 2000년대 미디어 환경의 상업적 변화 등을 이유로 폐지와 복귀를 겪다가 결국 재개 6개월 만에 종영되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서른다섯이었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올해로 작고한 지 20주년. 2024년 8월 2일 MBC FM을 통해 그를 추모하는 '고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방송-여름날의 재회'가 제작되었다. '여름날의 재회'는 그와 <정영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제작되었는데, 1부는 전임 DJ 한예리 배우가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2부는 AI 기술로 구현한 정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새롭게 진행하는 <정영음>으로 구성되었다.
1부의 다큐멘터리는 정영음 또는 정은임과 함께했던 박찬욱, 류승완 감독, 정성일 평론가와 손석희 전 MBC 아나운서 국장(그는 정은임 아나운서와 MBC 노조에서 각각 교육문화부장과 여성부장을 맡아 함께 활동했다)과 제작을 함께 했던 홍동식 PD와 신영희 작가를 인터뷰했다.
2부는 AI로 구현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지금의 시기에서 맞게 가상의 진행을 하는 것으로 연출되었는데, 음성을 학습한 AI가 직접 입력된 텍스트를 읽는 TTS(Text-to-speech) 방식이 아니라, 정 아나운서 대역(남유정 성우)이 1차로 녹음한 뒤 이를 음성기록으로 변환하는 방식을 적용했다고 한다.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은임 아나운서가 실제 진행했던 음성기록인데, 1992년 첫 방송부터 2004년 마지막 방송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딸의 목소리를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했던 그의 아버지 덕분에 당시의 기록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 카세트테이프를 전달받은 애청자가 파일로 변환해 아카이빙 해 컨텐츠화하였고, 이는 모바일 팟캐스트 앱 등의 여러 플랫폼에서 총 836개의 에피소드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
물론 지금의 기술력과 기준으로 보자면 품질 자체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을 통한 아카이브가 필수로 여겨지는 지금 시대가 아닌 '그때'에 '그 순간'을 기록한 마음의 결과인 '그 아카이빙'에 기댄 결과로 제작되어 받은 '선물'이다.
'20주기 특별방송'을 총괄한 장수연 프로듀서는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정영음>의 인기에 대해 "기억하려고 애쓰는 게 무엇인지, 누구를 추모하는지가 그 집단과 사회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늦은 밤, <정영음>을 기다리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느끼고, 위로받던 이들. 정은임을 추모하는 이들에게 선명하진 않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이렇게 기록한 마음으로 받은 위로는 여전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도 좋아해 줄지….” 어깨를 움츠리던 감독 지망생에게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이상한 영화, 나도 좋아해’라고 계속 속삭이거나, ‘인생은 네가 본 영화랑 달라. 인생이… 훨씬 힘들어.’라며 위로했던 그의 말 때문에 어쩌면 영화가 삶에 진정한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은임 아나운서와 제작진은 새벽 시간이라는 비인기 틈새를 이용해 당시 시대의 부조리를 논하는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으며,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마음이 외롭지 않기를 응원했다.
이처럼 단지 영화를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방향성을 고민하면서 보여준 태도와 올바름 때문에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일 테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마지막 방송을 며칠 남기지 않던 2004년 10월 22일 <정영음>의 오프닝에서 언론이 외면했던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 김주익이 파업에 따른 손배가압류로 고공 35m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 죽음을 선택하자, 감히 그 마음을 읽고 함께 나누고자 했다.
그랬던 그가 작고한 지 20년이 지나 그의 사망 비보를 들었던 그날처럼 더운 여름, 나는 '기록하는 마음'으로 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 참고한 기사와 자료 :
- 씨네21 1469호. 2024.8.13. 60쪽.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05659
- 시사인 881호. 2024.07.31.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648
- "정은임의 FM영화음악 팟캐스트"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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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bEaN
바빠서 특별방송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못 들어서 아쉬웠던 참에 이 글 읽으며 듣게 되었어요. 옛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고인의 방송 들었던 것도 떠오르고... 만감이 교차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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