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지독한 '포모(FOMO)'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주가가 치솟을 때면 괜히 남들은 다 올라탄 열차가 떠나고 나만 플랫폼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현란한 AI 기술이나 활용 사례를 보고 있으면 이러다 혼자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도 슬금슬금 피어오른다. 기록관리도 언젠가는 AI만 잘 부리면 ‘딸깍’ 하고 한 번에 정리되고, 분류되고, 자동화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뭐 하지? ...!
어쨋든, 뭐라도 해보자
사회생활을 하면서 놀란 점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중요한 일들이 꽤 아무렇게나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마땅히 지켜져야 할 원칙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찌그락 빠그락 어떻게든 일이 굴러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기록관리라고 예외일까.
내가 생각하는 기록관리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기록물 “등록정보”와 “실물 기록물”의 불일치다. 현장 밖에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할 수 있지만, 현장에 계신 분들은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영구’ 보존기간 단위과제카드에 등록한 기록물건이 전혀 다른 제목의 3년짜리 기록물철에 편철되어 있다거나, 실물은 하나인데 시스템상으로는 여러 단위과제카드로 분산 등록되어 ‘이산가족’이 되어 있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등록정보는 시스템을 타고 매끈하게 이관되는데, 정작 실물은 어디에서 미아가 되었는지 알 길 없는 상황도 반복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록연구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부서 담당자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의 ‘잔소리’를 하거나, 읍소에 가까운 ‘부탁’을 하거나, 아니면 결국 실물에 맞춰 관리 정보를 다시 짜 맞추는 노가다를 뛰는 것. 이렇게 하면 어떻게든 기록관리 절차대로 진행은 되겠지만 기록이 생산되던 당시의 생생한 맥락은 ‘흐린 눈’ 뒤로 사라지고 만다.
이 불편한 진실을 바로잡고 싶었다. 하지만 기록연구사 1인이( 모든 부서의 기록물 정리 결과를 확인하고 검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역부족이었다. 담당자는 바뀌고, 목록은 만리장성이며, 오류는 늘 창의적이니까.이 변명은 진짜 또 안하고 싶었지만)
하지만 AI가 도와준다면?
올해 나는 무모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매년 2월 말까지 처리과는 전년도에 생산한 기록물에 대한 정리를 완료하여야 한다. 그간은 생산부서에 기록물 정리를 실시하고 그 최종결과인 ‘기록물철 목록’만 제출하도록 했는데, 올해는 ‘건등록 정보’와 연계한 ‘철 목록’을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2025년 온나라시스템에 등록된 비전자기록물 전체 목록, 약 10만건을 모든 부서에 뿌리고, 실물 기록물이 어느 기록물철에 편철되어 있는지를 하나하나 확인 후 제출하도록 했다. 서식1에는 온나라에 등록된 모든 비전자기록물건의 현재 상태, 즉 단위과제카드대로 편철되어 있는지, 단위과제카드가 적절하지 않아 수정이 필요한지, 어떤 사유로 원본을 보존하고 있지 않은지 등과 실제 편철된 기록물철과의 매핑 정보를 작성하도록 했다. 서식2에는 물리적‧논리적 정리가 완료된 실물 기록물철 목록을 작성하도록 했다. 서식은 꽤나 복잡해졌지만, 이렇게 되면 어느 기록물철에 어떤 기록물건이 “실제”로 편철되어 있는지를 연결해서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방대한 데이터를 검증하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실수 없이, 빠르게, 지치지 않고 데이터의 정합성을 검증해 줄 똑똑한 동료가 절실했다. 그래서 챗GPT의 멱살을 잡고 검증 규칙을 정리해가며 ‘데이터 정합성 검증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왜 진짜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실제로 그것이 만들어졌다. 부서에서 작성한 목록을 첨부하면, 미리 정해둔 오류 유형별로 데이터를 검증하고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 리포트를 만들어주는 방식이다. 철관리번호가 맞는지, 기록물건이 실제 기록물철 목록과 연결되는지, 보존기간이나 제목 정보가 어긋나지는 않는지 등을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검증해서 결과값을 출력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나는 그 오류내역을 다시 해당 부서에 피드백하고, 오류가 없을 때까지 수정해서 재제출하도록 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부서에서 제출한 정리 결과는 오류투성이였다. 부서마다 적게는 한두 번, 많게는 20회가 넘는 수정, 검증, 재수정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우리 기관의 부서 수는 142개다. AI를 통한 자동화 딸깍은 커녕, 어찌 보면 원래대로 해오던 정리 결과 취합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됐다. 한 달이 넘는 검증 기간이었다.
재미있는 변화도 있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오류를 하나씩 줄여가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출하고 검토하는 관계는 어느덧 거대한 관문을 함께 통과하면서 서로 응원하는 ‘전우’ 같은 마음으로 변해갔다. 스무 번의 재검토 끝에 마침내 ‘통과’를 달성한 부서 담당자에게 마지막 검증 결과를 전달하며 나는 "하산하세요"라고 했고, 그 담당자는 나를 사부님이라 불렀다.
노파심에 밝혀두지만, 나는 AI에 대해 잘 쳐줘도 평균 수준의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며, 프로그래밍의 P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에 가까웠다. 검증 프로그램 역시 챗GPT에 의존해 누덕누덕 기워가며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이 글은 “제가 AI로 멋진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라는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AI가 다 해줄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제일 바빴다”는 처절한 체험 수기다.
누군가 이렇게까지 해서 데이터를 맞추는 게 정말 중요하냐고, 괜히 담당자들만 괴롭혀서 기록관리에 질리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기록관리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시스템 안에 녹아들도록 해야지 일을 위한 일로 만드는 게 맞냐고 물으신다면.
님 말이 다 맞습니다.
그럼에도 1n년 동안 째려만 보던 그 ‘묵은지 같은 문제’를 이번에는 제대로 건드려보고 싶었고, 그 정직한 경험을 동료들과 나누고 싶었다. AI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전에는 엄두 내지 못했던 가능성도 열리고 있다. 비록 ‘딸깍’ 한 번에 세상이 바뀌진 않았지만, 기록을 대하는 우리들의 눈빛이 0.1도 정도는 정교해졌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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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AI가 다 해줄 줄 알았는데, 실은 내가 제일 바빴다"는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혹시 만든 프로그램을 공유해주시는건 어떨까요? 아마 누군가는 "맞다, 나도 이거 필요했는데!" 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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