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내면 아이는 불안한 완벽주의자였다. 당근과 채찍이 통하지 않는 아이, 내면에 스스로 가하고 있는 채찍이 너무나 많아 외부에서 오는 작은 자극조차 견딜수 없는 타격으로 다가오는 아이, 커다란 당근이 주어져도 충분한 자기 신뢰의 양분으로 흡수하기보다 부지런한 자기 의심으로 불만족이라는 흠집을 내는 아이. 바로 여기가 수치심이 보여준 나의 밑바닥이자 유아기의 낡은 생존습관이었다.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서 완벽주의는 넓은 의미로 높은 기준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정의된다. 브레네 브라운의 <수치심을 권하는 사회> 에서 이러한 완벽주의의 높은 기대가 개인적 기대가 아닌 사회적 기대가 만들어낸 수치심의 거미줄로 인해 촉발된다는 비판적 인식을 열어주었다. 또한 완벽주의가 되풀이하는‘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왜 이 모양 일까.’ 라는 자기비판적 독백에 온기어린 목소리로 진심어린 질문을 건넨다.‘너만 이런게 아니야.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봐, 단절에 대한 두려움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 방식으로 안전하게 소속되고 싶었던 거야. 이런 기대를 다 충족시키면 네가 더 진실해질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정신분석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한 장면으로 깊은 소속감을 느꼈던 장면을 꼽은 내게 이혼은 가장 원치 않는 방식으로 찾아온 단절의 경험이었다. 내가 털어놓은 말들은 돌이켜보니 모두 단절감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 것으로부터도 연결을 느낄 수가 없어요. 심지어 그렇게 사랑해온 아이들 하고도. 나 자신 하고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어요.’ 단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좌절과 무력감을 안겨주는지 이해받고 싶었다. 연결이 끊긴다는 것이 한 존재를 얼마나 벌거벗기는 일인지,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지속적이며 회복하는 길이 한없이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낱낱이 이해받고 싶었다. ‘이혼한다고 해도 아이들 잘 키울 수 있어. 부정적인 생각만 하니까 그렇지. 이혼, 요즘에 별 거 아니야. 얘들은 엄마가 키워야 해. 마음 단단히 먹고 강해져야지.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해’ 삶을 걸어나가라고 해 주는 낙관의 말들은 나를 회복의 길로 북돋기는 커녕, ‘아무 것도 모르는 소리’ 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을 더욱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 말들은 그저 남이 하는 이야기가 되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결국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의 문제지.’라는 개별화, 병리화의 늪에 빠져들게 했다. 그런 일상에서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지금 겪는 모든 감정적 반응들은 정상이야’ 라고 거듭 빠져나오게 해 준 것은 책들이었다. 매일 함께하는 책들의 동행, 한 달에 한번 받는 정신분석, 나는 우울증과 함께 찾아온 내면의 밑바닥에 ‘다르게 살고 싶다’ 라는 한가닥의 욕구를 붙잡는다. 그리고 매일 책들에서 그러모은 갈피를 엮어 회복의 동아줄을 만들고 있다.
회복을 위해 내게 갈피가 되어준 첫단어는 ‘마땅하다’ 였다. 결혼 졸업 이후, 한동안 ‘마땅하다’ 라는 단어에 매료 되었는데 이 낱말이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데버라 리비의 <살림비용>이란 책에서 였다. 그녀가 이혼 이후에 자녀들과 함께 새로운 구성의 삶을 꾸려가는 시도 중에 쓰인 두 단어, ‘마땅하다’와 ‘마땅치 않았다.’ 나는 결혼졸업 후 내 삶이 새로운 안정을 다시 찾을 때까지 계속 물어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마땅치 않은 것으로부터 마땅한 것으로의 여정, 그게 앞으로 다가올 주거지 변화와 삶의 방식 재구성 과정에서 내가 통과하게 될 길이다. 그러나 나와 두 아이의 삶의 토대를 다시 만들어가는 마땅한 일을 지금 실행하는 것은 나에게 마땅치 않다. 지금 내게 마땅한 것은 공황과 우울증에 대해 이해하는 일이다. 단숨에 낙관으로 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것은 부당하고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마땅한 속도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정신분석을 받으며 항우울제 복용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회복의 가능성이 마땅치 않다.
<도둑맞은 집중력>을 쓴 작가, 요한 하리는 20대부터 시작한 항우울제 복용이 30대까지 이어지며 10년간 약을 먹어도 여전히 우울한 상태라는 미스터리를 <벌거벗은 정신력>에서 풀어나간다. 그는 항우울제가 일시적 완화를 가져올 수는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원인을 치료할 수 없으며 우울과 불안의 사회적・심리학적 원인에는 ‘단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태생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많은 존재로부터의 단절, 즉 무의미한 노동, 무관심한 개인, 무가치한 경쟁, 무의식적 회피, 무방비한 미래 등 우리가 잃어버린 연결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결책을 찾고 싶다면 우울과 불안과 관련해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라고 묻는 대신 “당신에겐 무슨 문제가 중요하죠?”라고 묻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귀를 기울여 진정한 필요와 다시 연결될 때 회복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요한 하리는 의미있는 일과의 연결, 자기 가치와의 연결, 현실적인 가능성과의 연결 등을 통해 회복되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이 모든 회복의 중심에는 ‘연결’이 있다.
그러나 불안한 완벽주의자가 단절되고 싶지 않아 부단히 애쓰는 행위는 방향성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기 보다 원하지 않는 것으로 부터 뒷걸음을 친다. 이러한 방향성은 연결이 아니라 단절을 유발한다. 이와 같이 쉬지 않고 피하는 움직임을 취하는 완벽주의를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서는 부적응적 완벽주의로 정의하여 적응적 완벽주의와 구별한다.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서는 그 차이들을 명료하게 보여줌으로써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차이 두가지가 ‘동기의 방향성’과 ‘기준과의 관계’이다.
적응적 완벽주의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행복, 삶의 만족 등의 바람직한 결과에 다가가는 것을 동기(긍정적 강화)로 한다. 반면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회피하거나 탈피하는 (부정적 강화)것이 동기다. 원하는 것을 향해 다가는 움직임과 원하지 않는 것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 중 어느 것이 단절이라는 결말에 도착하겠는가. 어느 것이 헛된 노력을 하겠는가. 애쓰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이 솟구치는 날이면 ‘애씀’이라는 행위가 ‘부질없음’과 ‘헛수고’의 동의어로 느껴진다. 그 때 행위의 방향성을 바라보면 부적응적 완벽주의 상태에 있다. 적응적 완벽주의가 원하는 것을 향해 다가가는 움직임을 지녔기에 자연스럽게 삶의 보람과 의미가 선물처럼 주어진다면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기준과 기대가 타인의 눈을 통해 추측하며 설정되어 있어 지극히 주관적이고 모호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봐 허우적거리는 방어의 움직임에는 필연적으로 번아웃과 불안이 따라온다. 또한 적응적 완벽주의는 높은 기준과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기준을 달성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지 않으며 기준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능력에 현실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세운 기준에 대해 유연하고 자신의 한계 또한 받아들이며 일을 망쳤을 때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하다. 그로인해 이들은 생산적이면서도 탈진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기준과의 관계가 의무적이다. ‘항상 옳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야만 일을 넘긴다, 올바른 결정인 것이 확실할 때에만 행동을 취한다, 모든 일을 다 잘해야만 한다.’ 이러한 경직된 기준들을 엄수하려고 한다.
적응적 완벽주의자에 있는 다가가는 움직임과 기준과의 편안한 관계는 불안한 완벽주의자에게 필요한 회복탄력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치’와 다시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 가치를 향해 다가가는 움직임에 에너지를 쓸 것, 새로운 가치와의 연결을 할 때는 유연하고 관대할 것. 가치와의 연결과 유연성이라는 회복의 동아줄을 엮고 보니 밑바닥에 끊어진 낡은 동아줄이 보인다. '진정성과 아름다움'이라는 과거의 삶의 기준. 나는 줄곧 진정성있는 삶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이혼을 겪으면서 내 결혼 생활의 진정성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혼이란 결과가 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진정성과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의 얼굴을 쓴 경직된 낡은 원칙들이 바스라진다. 진정성은 돌이켜보니 내가 맡은 아내, 엄마, 딸, 며느리, 직업인으로서의 역할들을 충실히 해내는 쉼없는 애씀이 되어 있었고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자기 상실로 헐어있었다. 정말 그것을 원했는가하면 아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기대에 실망을 끼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보니 존재(Being)가 상실된 행위(Doing)의 축척이 만든 낡고 경직된 기준일 뿐이다. 굳어서 바스라진 탄성(彈性) 없는 옛 동아줄을 다시 이어 붙일 생각은 없다.
내가 새로이 ‘연결’할 가치들은 얼마든지 휘어져도 끊어져도 되는 것, 다음 날이면 새로운 아침이 오듯 다시 선택하고 의미 부여 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진정성의 의미와 아름다움의 의미를 평범함이라는 새로운 인간미로 다시 쓸 것이다. 지금 내가 무엇보다 다시 연결되고 싶은 것은 더 안정된 자기 가치감이다.
'나는 나인 것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느끼고 싶다.'
To. 모두 다 돌봄예술가!
대서와 입추 사이, 긴 꿈을 꿨습니다. 에어컨 있는 방에 아이들과 함께 모여자던 대서, 이제 곧 제 방으로 돌려보내기 전, 찾아온 꿈이 제게 완벽주의의 역설을 포기하라고 말해주네요. 그리고 이제 편안해지기를 권합니다. 꿈이야기로 이번 레터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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