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식은 과학자들이 내수용감각이라 부르는 신체가 느끼는 미묘한 감각과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내수용감각수준이 높을때 생동하는 삶을 운영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의 내적, 외적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하면 이를 관리하기 위해 유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몸은기억한다>, 베셀반데어콜크 -
2월의 겨울, 몸의 안녕감을 찾고 싶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통합예술교육 1년 과정이 10월, 1박 2일 자전여행이라는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자전여행 3주전, 소마(SOMA) 선생님은 우리에게 몸을 누일 수 있는 커다란 종이를 주셨다. 바닥 위에 종이를 펼치니 10개의 하얀 공간이 생겼다. 고립되어 있지 않은 자기만의 공간, 홀로이면서도 함께(alone togeter)인 자기만의 종이 위에 누웠다. 등을 대고 누우니 일과를 마치고 뛰어드는 침대 같았다. 우리는 각자 어떤 동작으로 있고 싶은지 조금씩 움직이며 찾아보았다. 나는 이불 위에 부비적 거리듯 종이 위를 흐느적 거리다 멈췄다. 흐느적, 흐느적. 나는 그렇게 있고 싶었다. 그 동작 어휘는 내게 1년간의 배움이 내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흐느적거림은 피로에 짓눌린 결과도, 직면에 대한 저항도 아니었다. 흐느적거림은 부드럽게 깨우는 친절한 촉진이었고, 내부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음미하는 과정이자 천천히 이완을 초대하는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흐느적거리며 누워있던 몸의 자세는 내가 고른 노란색 색연필로 내 짝의 손을 통해 하얀 종이 위에 남겨졌다. 일어서 내려다본 노란 신체경계선은 온몸으로 춤을 추는 춤꾼의 역동적 움직임 같았다. 흥미로웠다. 내 안에서 느낀 고유수용감각으로 찾아낸 흐느적거리는 부드러운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보니 춤을 추는 격렬한 움직임이 되어 있었다. 이완과 역동 사이, 쉼과 열정 사이, 그 대비와 중첩이 내게 신선했다. 그 사이에서 자화상과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그 날, 우리는 각자 돌돌 만 자화상을 품에 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삶 속에서 자화상과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한달 간의 자기와의 대화가 담긴 자화상은 자전 여행에 동행할 예정이었다.
표현예술치료사이기도 한 선생님은 다양한 예시를 들어 자화상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주셨다. 신체의 경계선 그리기로 시작한 자화상의 안과 밖, 그리고 경계 어디에서든 대화 할 수 있었다. 종이를 접어서 한 면씩을 만날 수도, 벽에 펼쳐서 전체를 바라보며 만날 수도 있었다. 자화상과 대화를 나눌 수도 시를 읽어 줄 수도 있었다. 자화상과 마주서서 동작탐험을 하거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 이미지, 움직임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그간 동작 탐험 후에 몸 안에 남아있는 감각, 이미지, 정서들을 담았던 그림들을 자르고 덧붙여 콜라주도 가능했다. 자화상과의 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예술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때때로 “이 종이는 모든 것을 들어줍니다.” 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예술이라는 안전한 표현의 장으로 초대해 주셨다. 만들어내는 것보다 만들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기를 권하셨다. 무엇을 해야겠다고 구상을 완료하고 표현하기보다 우리가 동작 탐험을 하면서 신체에서 느낀 감각과 감정, 이미지처럼 몸 안에 이미 있는 경험에서 시작하기를 권하셨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것이나 흥미로웠던 점, 도전이 되었던 점과 이를 통과하는 데 무엇이 자원이 되었는지,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주의깊게 맛보기를 격려해주셨다. 이렇게 만나는 예술은 특별히 숙련해야 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예술은 그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수용적 공간이자, 그 과정을 통해 무엇이 만들어질지 열려있는 흥미로운 열린 공간이었다. 그 순간, 내적 상태와 자기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변화하는 공간이었다. 기술이 아닌 자기와의 대화로서의 예술에는 되어야만 하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내 방, 침대 바로 옆 벽에 투명 핀으로 나의 키높이와 가능한 비슷하게 자화상을 고정했다. 그리고 가만히 마주보았다. 첫 수업 날이 떠올랐다. “이 수업에서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목표가 아닌 의도, 결과가 아닌 방향성으로서 의도는 무엇인가요? 단어, 문장, 질문, 무엇이든 좋으니 적어보세요.” 라는 안내를 듣고 종이에 적어 넣었던 나의 바람, 이 과정을 배우는 의도 한 조각은 몸의 안녕감-안도였다. 그리고 내가 간절히 바라면서도 막연했던 몸의 안녕감은 현재의 나에게 ‘흐느적 거리다’라는 선명하고나 친밀한 움직임의 언어로 바뀌어 있었다.

1년 간 느린 움직임과 함께 주의를 안으로 두고 감각하는 과정은 주로 외부수용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감지하던 나의 감각을 안으로 확장시켜주었다. 서서하는 정렬자세를 미세조정하며 골반 너비를 시각이 아닌 고유수용감각(시각 없이 몸의 위치에 대한 인식,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과 이완과 수축 감지, 근막의 신체 부위 간 긴장과 이완의 흐름감지 등)으로 찾아본다. ‘힘을 조금 더 빼 볼 수 있을까?’ 두개골이 얹어진 경추의 가동범위를 호기심을 가지고 탐색해 본다. 꾸벅꾸벅 졸듯 흔들거리며 그래그래 끄덕이며 뒤통수 안, 경추가 힘을 풀고 아래로 내려가는 그 작은 시작의 순간과 놀아본다. 때로는 몸의 균형을 다른 부분들이 어떻게 돕는지 알아차려본다. 경추가 힘을 푸는 그 시작, 턱이 가슴쪽으로 살짝 당기어지며 머리의 무게가 앞으로 기울때, 무릎이 살짝 굽히어지며 돕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듯 턱과 무릎이 함께 시작하는 동시성을 감각해보는 갓이다. 이렇게 안으로 향하는 주의는 흐름을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전체를 느끼기도 한다.
감각의 차이는 때로 다른 정서를 일으킨다. 이와 관련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수업 장면이 있다. 근막에 대한 공부 후에 손의 압력이나 속도에 차이를 두어 몸의 근육, 근막, 뼈, 피부를 감각해 볼 때 였다. 쥐었다 폈다 하며 느껴보는 근육의 덩어리감, 피부를 살짝 눌러 좌우로 살살 밀어 볼 때 느껴지는 근막의 미끄덩한 연결감, 손의 압력을 살짝 높여 깊이 있는 뼈를 감지할 때 느껴지는 지지감, 피부를 깃털로 스치듯 부드럽게 쓰다듬어볼 때 느껴지는 몸의 존엄성과 미감. 모두 달라 새로웠다. 무엇보다 그렇게 몸 안으로 주의를 기울여 감각하고 있을 때 체온은 한결 따뜻해지고 호흡이 잘 느껴졌으며 몸이 전체적으로 한결 이완되었다. 내 안의 내부수용감각(자율신경계의 피드백, 내장감각, 체온감각 등)이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솜털을 쓰다듬듯 피부와 접촉하는 느낌이 ‘자기 수용’과 ‘몸에 대한 경외’를 감각적으로 체화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몸이 과열되고 있다는 것을 급한 속도, 뻑뻑하거나 쓰라린 느낌, 숨을 참고 있는 긴장으로 감지할 때, 잠시 멈춘다. 그리고 내 두 손을 부벼 따뜻해진 두 손을 눈과 광대뼈 위에 덮어 그 온기 안에서 쉰다. 그리고 두개골 위로 손을 올려 준다. 손가락으로 미간과 이마를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기도 하고 어깨에서 손까지 솜털을 쓰다듬듯 천천히 피부를 쓸어 내려주기도 한다. 이 가끔의 조율이 내게는 중요한 변화다. 몸을 통제하는 습관에서 놓여나는 해제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주의를 감각에 두고 환경에 적응하는 몸의 반응을 비판이나 강요없이 ‘경청’하며 몸이 안전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접촉을 지원하는 것. 이런 지금의 나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몸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느낀다.
이 변화에는 두개의 양 축이 있었다. 하나는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 함께한 책 모임이었다. 책 모임은 이전에 읽던 방식과는 다르게 이루어졌다. 나는 보통 궁금하면 책을 몰아 읽거나 동시에 여러권 읽는다. 그렇게 핵심을 효과적으로 추출하고 재구조화하며 습득하는 인지적 효율성을 활용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체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이해한다고 몸의 반응이 바뀌는 것이 아니니 몸이 자발적으로 반응을 싹 틔울 수있도록 ‘느리게 읽기’, ‘일상과 연결하며 소화할 충분한 시간 주기’를 초점으로 2개의 책모임을 한 것이다. 화요일 아침 책모임은 매주 1장의 시작을 같이 낭독하고 울림을 나누며, 남은 부분은 각자 일상 속 리듬에 맞추어 읽는 방식으로 읽었다. 목요일 저녁 책모임은 한 주에 20쪽씩을 각자 일상에서 읽은 후 모여, 체크인은 저녁의 몸을 감각하고 연결하고, 지금 감각한 나의 상태를 나누고, 책을 통해 일어난 몸에 대한 이해가 일상에서 무엇을 다르게 보게 하거나 반응을 다르게 했는지 막히는 부분이나 변화한 부분이 있는지 나누었다. 그렇게 느리고 주의깊게 오랜 시간을 쌓으며 함께 읽은 책은 통합예술교육과정 추천도서인 스티븐 포지스 박사의 [다미주 이론]과 베셀 반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 였다. 이 두 권의 책은 내게 ‘안전’이 단순히 내가 단독친권가정이어서 추구하는 개별화된 욕구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서 내 몸이 가진 생물학적 욕구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 이해는 안전에 대한 나의 욕구를 생명이라는 거대한 가족의 보편성 속으로 녹아들게 해 주었다.
스티븐 포지스 박사의 [다미주 이론]은 내게 ‘자발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꾸었다. 나는 의식적(인지적과정) 선택을 ‘자발성’ 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적 발상에 토대를 둔 생각이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나는 느끼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고, 결국 존재한다.’ 라고 데카르트식 생각, 즉 육체와 정신 사이에 분리가 있다는 심신이원론의 오류를 뒤짚는다. 그는 감각, 감정, 느낌은 이성과 분리된 불청객이 아니며 고차원적 이성(추론, 판단, 의사결정 등)의 사고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역설한다. 이 뒤짚기를 좀 더 선명히 해주는 것은 신경지(neuroception) 개념이다. 스티븐 포지스 박사는 [다미주이론]에서 환경 속에 산재한 위험의 특징을 의식(인지적 과정)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여 적응 반응을 선택하는 신경프로세스의 역할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를 지각(perception)과 구분하기 위해 신경지(neuroception)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몸은 다양한 도전 환경 속에서 안전한가, 위험한가, 위협받고 있나를 서로 협력하여 통합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항상성을 최적화한다. 그러므로 몸의 안녕감은 안전에 대한 단서들이 충분히 감각되고 안전이라는 생물학적 욕구가 충족될 때 의식(인식과정)이전에 이루어지는 신경지 차원의 자발적 반응인 것이다.

[다미주이론]을 통해 세상을 항해하는 우리를 보호하는 경이로운 자율신경계 3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신경계는 부교감신경계 중 무수미주신경회로다. 이 신경계는 고대 척추동물인 파충류에서부터 진화한 방어시스템이자, 얼어붙음(셧다운/해리)이라는 부동화 반응으로 어떤 행동도 통하지 않은 위협 상황에 처했을 때, 생존을 지원하는 적응 반응이다. 이는 다른 반응들이 통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반응인데 내게는 압도적으로 큰 고통을 견디기 위해 납작하게 엎드리고 웅크려 가장 소중한 심장을 지켜내려고 두 팔로 꽈악 보듬어 끌어안는 품 이미지다. 두번째는 교감신경계로 투쟁이나 도피와 같은 가동화 반응으로 효과적인 행동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내게는 휘몰아치는 혼돈 속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 민첩하게 움직이며 중심을 잡고 살 길을 찾아 항해하는 돛의 이미지다. 마지막으로 진화 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한 사회참여체계가 있다. 이는 부교감신경계 중 유수미주신경회로(새로운 미주신경회로)에 해당한다. 앞의 가동화, 부동화 반응은 방어체계에 해당한다면 사회참여체계는 진정체계에 해당한다. 안전이라는 생물학적 욕구가 몸 전체에서 제공되는 단서들을 통해 충족할 때, 신경지는 자율신경계에서 사회참여체계를 활성화 한다. 사회참여체계는 자율신경계의 신경조절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며 생리적 상태의 진정을 돕고 건강과 성장, 소화와 회복을 지원한다. 내게 사회참여체계의 이미지는 마주 본 느슨한 두 얼굴이다. 공감적 존재와의 마주침, 지지적으로 목격하고 목격되는 얼굴. 스티븐 포지스 박사가 [다미주 이론]에서 강조한 핵심은 이 모든 자율신경계에서 일어나는 반응, 즉 신경지의 결정은 모두 우리 몸이 도전 환경에 대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한 결정이며, 적응반응이라는 점이다. 나쁜 반응은 없으며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한 몸에 적응 반응이다. 이것이 신경생물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자기수용이다.

이러한 신경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트라우마 치료에 대해 다룬 <몸은 기억한다>에서 베셀 반데어 콜크 박사는 트라우마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보다 ‘반응’이라고 하였다. 반응이 결과의 궤적을 결정한다. 신경지가 선택한 적응 반응이 무엇인지 내부수용감각을 통해 알아차리면 생리적 상태가 행동에 부과한 한계를 존중할 수 있게 되고 회복탄력성이 떨어지는 시점의 단서들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물러설 수 있게 된다. 가장 성공적인 트라우마치료자들은 내담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안전감’을 가지고 경험을 탐험하도록 하여 더이상 셧다운, 가동화를 위해 방어체계에 의존하지 않도록 돕는다. ‘안전감’이 신경지각되면 사회적 유대감 체계가 활성화 되고 신경계의 타고난 호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만들어 내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사회참여신경회로의 충분한 연습과 사용 경험은 환경 속 도전을 소화하는 역치를 높이고 타인과 함께 조절해나가는 자연스러운 적응 반응의 발현을 돕는다. 이 체계의 효과적 발달을 위해서는 충분한 안전감을 느끼는 경험이 필요하다. 사회참여신경회로는 얼굴근육(정서표현), 중이근육(배경소음으로부터 목소리 추출), 씹는 근육(소화), 후두와 인두근육(운율적 목소리), 눈꺼풀 깜빡임(보는 움직임), 머리를 움직이는 근육(사회적 몸짓과 정향)과 연결되어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과정에서의 일어나는 눈맞춤, 풍부한 표정, 운율적 목소리, 귀기울이고 있다는 끄덕임과 함께 서로의 신체적 상태 사이의 연결이 사회참여행동에 해당한다. 즉 [다미주관점]에서 사회참여란 ‘바라보고 듣고 목격하는 과정’이다. 지지적으로 목격되고 목격하는 경험이 사회참여체계의 ‘자발적’ 활성화를 돕는 것이다.

‘보여지는 것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경험’의 축척은 내 몸과의 관계를 변화하게 해 준 두번째 축이면서도 내가 통합예술교육과정을 통해 올해 누린 가장 경이로운 선물이다. 매주 화요일 3시간, 내부수용감각에 주의를 두고 밖에서 보는 몸이 아니라 안에서 느끼는 몸과의 연결하는 동작탐험을 하는 동안, 우리는 탐험가와 지지적 목격자가 되었다. “다정하게 맞이해주세요. 여러분을 기다리는 짝을 보며 돌아옵니다. 목격하면서 일어난 이미지와 정서, 나에게 어떻게 보이고 느껴졌는지, 어떤 상상이 일어났는지 주관적 경험을 들려주세요.” 라는 선생님의 안내는 우리가 서로의 주관적 경험을 존중하면서도 공감적 존재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 길을 따라 우리는 서로에게 지지적으로 목격되는 경험을 선물 할 수 있었다. 그 안전하고 지지적인 장 안에서 나는 안으로 향하는 주의를, 마침내 활짝 열 수 있었다. 안전하게 목격된다는 건, 따뜻한 무드등이 내 몸 안으로 비추어지는 듯한 다정하고도 열린 경험이다. 평가와 판단을 받을까 하는 긴장이 일어나지 않았고, 잘하려고 애쓰다 오히려 얼어붙어 버리지도 않았다. 투쟁과 도피, 얼어붙음에 에너지를 쓰지 않으니 온전히 안으로 향하는 감각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몰입의 순간, 안으로 주의가 향하고 감각에 열려있을 때, 나는 누구였을까? 나는 누구도 아니었다.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자아가 아니었다. 무엇이 되고자 추구하는 자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저 안으로 향하는 주의였다. 느리고 미세한 주의, 호기심 어린 주의, 몸이라는 감각의 영토를 탐험하고 있는 주의가 곧 나였다. 주의가 된 나는 오르내리는 움직임이 되었고, 흔들리는 파동이, 팽창과 수축, 긴장과 이완이 되었다. 때론 흐르는 숨이었고, 무게의 이동이었으며 연결과 동시성이었다. 나는 그렇게 ‘주의’ 가 되어 순간순간 변화하는 몸 안을 감각하며 잃어버린 현재를 회복해 갔다. 주의가 현재의 몸 안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조금은 느슨해진 미간,
살짝 연 턱관절,
호흡의 리듬,
허벅지에 툭 기대어 이완된 두 손,
쾌적해진 날개뼈,
바닥에 넓게 접촉한 발의 연결감,
몸 안에 도착하여 느끼는 전체적인 자기감,
이것이 내가 찾은 안녕감이다.
To. 모두 다 돌봄 예술가님.
“나쁜 반응은 없다. 모두 다 나를 살리기 위해 온 적응 반응이다.“
올 한 해, 몸안에서 투쟁과 도피 반응이 일어났던 순간이 있나요? 얼어붙음 반응이 일어난 적은요? 그렇게 반응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나요? 그 순간들의 내가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결정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아, 내가 취약하다고 느끼는 도전 환경에 처해 있었구나.
내가 충분히 안전하고 편안함을 감각하기 위해 무얼 도울 수 있을까? 바깥소음이 들어오지 않게 창문닫기, 따뜻한 물한잔, 천천히 산책, 리듬이 있는 음악듣기, 다정한 친구와 만나 서로에게 지지적으로 목격되기.
얼굴근육이 이완되어 다양한 표정이 살아나고 시야가 넓어지고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들리는 몸 상태가 돌아왔다면 몸이 안전하다는 생물학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졌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된 장면이 있나요?
올 한해 안전이라는 생물학적 욕구가 충분히 채워졌을 때,내 몸이 자발적으로 어떻게 열렸나요? 연결, 유대, 포용, 유머, 놀이, 배움, 소화가 애쓰지 않아도 일어났던 장면이 있나요?그 장면들을 잠시 떠올려 음미해보세요.
여러분에게 안전은 무엇인가요?
안전한 장소, 안전한 소리, 안전한 감각, 안전한 관계 등.
안전하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이미지인가요?
여러분에게 '안녕감'은 어떤 상태인가요?
12월에는 돌봄예술레터의 마지막 편지를 쓸 예정입니다.
한 해를 맺음 하는 모든 순간들에 안녕을 기원합니다.
From.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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