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감정의 모양으로 죄가 결정되는 세계
* 이번 뉴스레터에는 넷플릭스 <자백의 대가>의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형사 A: “또 웃네 ? 또 웃은 거 맞지?”
형사 B: “원래 잘 웃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형사 A: “이 상황에서 ? 그게 정상이냐. 옷차림도 좀 봐라.”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자백의 대가> 1화에서 전도연 배우가 연기한 ‘안윤수’는 남편을 잃은 직후, ‘너무 잘 웃는다’는 이유만으로 피의자 취급을 받기 시작합니다. 웃었다는 이유로, 화려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윤수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분석은 ‘편견’을 넘어 ‘사실’처럼 굳어집니다.
이 장면을 보며 저는 오래전에 읽었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두 작품은 시대도, 배경도, 장르도 다르지만 한 인간이 ‘감정 표현 하나’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 순간, 묘하게 닮아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왜 세상은 우리가 ‘정답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우리를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려 하는가?”
‘안윤수’가 정답의 감정 때문에 오해받는 동안, 김고은 배우가 연기한 ‘모은’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낙인을 받습니다. 작품 속 전문가들은 그녀를 “새로운 유형의 사이코패스”라고 진단하지만 실제로 모은은 누구보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어했던 의사였습니다. 그녀에게 일어난 참혹한 개인사(가족의 죽음과 죄책감)는 한 인간의 세계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복잡한 사연보다 ’평범하지 않은 감정 표현’을 더 빨리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표정 하나로 인간의 본성을 단정합니다. 결국 사건보다 더 잔혹한 것은 언제나, 타인이 나를 오해하는 방식입니다.
요즘 온라인과 커뮤니티를 보면 조금만 다르게 말해도 ‘적’으로 간주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의 입장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욕설이 붙고, 표현의 결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넷플릭스 <자백의 대가>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함께 놓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편견과 감정의 규범,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더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들을 조금 더 깊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책 📕 <이방인>

웃었다는 이유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 감정의 규범화

앞서 말했듯이, <자백의 대가>에서 윤수(전도연)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날 ‘웃었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의 용의자가 됩니다. 그녀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보다, 사람들이 그녀가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기대했는지’가 더 먼저 읽히는 순간이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처한 상황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법정에서 가장 강하게 비난받은 이유는 살인 그 자체라기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차갑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규정되고, 재판은 점점 범죄의 경위보다 그의 태도와 감정 사용법을 문제 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뫼르소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받았다기보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슬퍼했다는 이유로 도덕적 심판의 대상이 된 인물에 가깝습니다.
두 사건 모두 증거가 아니라 ‘감정의 형태’가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두 작품은 시대와 장르를 넘어 놀라울 만큼 닮은 구조를 드러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규범(emotional norm)’이라고 부릅니다.
사회는 상황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슬퍼야 한다”, “이럴 때는 이렇게 충격을 받아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정답지를 만들어두고, 그 정답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사람을 정상 밖으로 분류합니다. 슬픔은 이렇게 보이라 하고, 충격은 이렇게 말하라 하고, 상실은 이렇게 견디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이상할 만큼 ‘정답대로 슬퍼하는 인간’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그 정답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는 어느새 의심받고, 해석되고, 낙인찍히기 시작합니다. 그런 면에서 <자백의 대가>는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서 감정의 규범이 어떻게 폭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지점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죠.
“나는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울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였다.”
뫼르소는 거짓 슬픔을 연기하지 않았을 뿐인데 사회는 그를 비정상이라고 단정합니다. 진정성을 지키려는 개인과 형식적 도덕을 강요하는 사회 사이의 충돌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죠.
그래서 <이방인>은 단순히 무뚝뚝한 한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철학적 소설로 읽힙니다. 뫼르소는 사회의 ‘이방인’일 수 있지만, 오히려 독자의 눈에는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인간에 가깝습니다.
한 개인의 감정 표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사회. 두 작품은 바로 그 장면에서 서로를 향해 깊게 공명하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라고 불린 여자 — 낙인이 인간을 어떻게 뒤틀어놓는가

<자백의 대가> 속 김고은 배우가 연기한 ‘모은’은 작품 내내 “감정이 비정상적이다”, “새로운 유형의 사이코패스다”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듣습니다. 하지만 시청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애초에 비정상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모은은 누구보다 생명을 살리고 싶어했던 의사였습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환자를 위해 헌신하던 인간이었죠.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가족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극단적 상실과 그 끝에서 싹튼 복수심이었습니다. 연달아 닥친 비극은 모은 안에 잠재돼 있던 분노와 죄책감을 비정상적으로 증폭시켰고, 이 지점에서 사회가 던진 “사이코패스”라는 낙인은 사실과 전혀 다른 진단임에도 그녀의 행동을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데 사용됩니다.
오늘 우리가 온라인에서 목격하는 많은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조금 다른 감정 표현, 조금 다른 말투, 조금 다른 반응만 보고도 상대의 내면을 성급히 ‘틀’에 넣어 단정하고, 그 틀이 마치 진실인 양 소비합니다. 모은의 이야기는 바로 그 폭력적 간소화가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미 해석된 인간 — 안윤수와 뫼르소의 고립

안윤수의 비극은 단순히 ‘웃었다’는 이유로 오해받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처한 진짜 문제는 설명해도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설명을 하든, 듣는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찰, 검찰, 언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이미 해석해버린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증거가 나오든, 이미 만들어진 서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도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감정과 도덕성은 이미 결정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보다 사람들이 보고 싶은 모습이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안윤수와 뫼르소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로 판단받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라고 이미 정해진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잃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변명처럼 들리고, 어떤 행동도 의심의 근거가 됩니다. 그 순간 인간은 사실이 아니라 타인의 해석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두 인물이 경험한 고립의 자리입니다. 안윤수의 억울함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그녀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는데 세상은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가 <자백의 대가>와 <이방인>이 만나게 되는 가장 깊은 지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로 타인의 시선이 나의 존재 방식을 규정해버리는 순간을 설명했습니다. 안윤수와 뫼르소가 경험한 고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타인이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이미 결정해버린 순간 그들의 세계는 순식간에 지옥처럼 좁아집니다.
나가며: 우리는 언제 서로를 이방인으로 만드는가

<자백의 대가>와 <이방인>은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같은 장면에서 만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말과 표정으로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타인이 만든 이야기 속에 갇혀버리는 순간입니다.
안윤수도, 뫼르소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고자 했지만 세상은 이미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결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진실보다 빠르고, 설명보다 강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잔혹합니다. 이 두 작품을 함께 떠올리면 문득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그렇게 단정하고 있을까. 또 누구에게 그렇게 단정당하고 있을까."
내가 본 표정 하나, 내가 느낀 어색함 하나가 어쩌면 누군가의 세계를 너무 쉽게 좁혀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도 돌아옵니다. 저는 종종 ‘예민하다’는 말을 듣는 편입니다. 기분이 상한 티를 내면 까다롭다고 하고, 불편함을 표현하면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반대로, 어떤 말이든 웃으며 넘기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편안하고, 더 좋은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출처: youtube <십이층>, https://youtu.be/RIEWcHjzk9U?si=066-2w2ssoa5ZFIU)
하지만 때때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민하다’고 부르는 그 감정도 어쩌면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의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감정을 단순화하거나 잘못 해석해버리는 일이 얼마나 쉽게 벌어지는지를 윤수와 뫼르소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단정하기 전에, 상대방이 예민해 보였던 순간 뒤에 어떤 세계가 있었는지를 잠시라도 떠올려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요.
그 짧은 멈춤 하나가, 혹시 누군가의 세계가 너무 쉽게 좁아지는 일을 조금은 늦춰줄 수 있지는 않을까요?
✍️ 작성자: 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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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질문
- 우리는 왜 누군가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안다고 믿게 될까요?
- 나는 최근에 누구에게 사실보다 빠른 ‘해석’을 덧씌운 적은 없었을까요?
- 그리고 혹시 나 자신 역시, 설명할 기회도 없이 누군가의 판단 속에 갇혀본 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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