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일이 안돼서

[박도수기] 05.12 wed 일은 언제 잘되는 거지?

2021.05.12 | 조회 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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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수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메일 <박도수기>

 
 
  
  
 
 

Letter from New York

여분의 사람 

안녕하세요. 박도입니다. 어제 처음 박도수기를 다시 보내면서 약간 긴장 했어요. 두 달 휴재 후 보내니까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 별로 그렇게 보이진 않았겠지만! 들뜬 상태라 이틀 연속으로 보냅니다! 

오늘은 청소를 좀 했습니다. 생일이 지난 지 딱 한 달 되었거든요.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 있는지 아시는 분) 그러고 보니 더는 연락하지 않게 된 친구의 생일이기도 하네요. 생일 기억이라는 게 옛날 친구들 건 잘 떠오르는데 비교적 최근에 만난 친구들 생일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잘 안 나요. 카카오스토리가 유일하게 필요한 때랄까.

특별히 생일 메시지가 온다고 해서 대단히 좋다거나 하는 건 없어요. 선물이 필요할 뿐. (휴) 그러니 생일날 선물을 챙겨주는 츤데레 어른이 되고 싶어요. (받으려면 줘야 해서…) 친하긴 한데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대학교 친구가 생일날 마다 항상 선물을 보내줬거든요. 영원한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생일에 친구에게 잘 하면 그 기억이 10배 버프를 받아 더 오래 가나 봐요. 물론 이건 저처럼 계산적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물은 농담이고(라기엔 너무 궁서체였지만 아무튼) 저는 생일에 무조건 만나서 노는 게 제일 즐겁습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서는 당연히 생일은 남친과 보내는 걸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7년 하니까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지더라고요.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화 주제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치만 그건 내 계획이지, 생일날 만나자고 해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 할 친구들이 몇 명이나 남았으려나? 안 친하고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단촐하게 자기 자신만 건사하고 사는 친구들이 거의 없는 나이가 되다 보니 각자의 사정들이 있잖아요. 모두가 오지 못 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생에는 여분의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과 종종 대화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단단한 일회용 관계도 충분히 의미가 있죠. 언제든 뉴욕을 떠날 수도, 다시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만나서 같이 보내는 시간에는 진심을 다 하는 것. 함께 하는 순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걸 확인했다면 10년 후, 20년 후에 만나도 ‘여분의 좋은 사람들’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 여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디서든 여분의 사람들을 발견하면서 살게 될 것 같아요. 저 또한 누군가에게 여분이라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고요.

나중에 여분의 사람들과 생일파티 성대하게 열거거든요^.~

May 11th 7:00 p.m. in Washington Heights, NYC
May 11th 7:00 p.m. in Washington Heights, NYC
 
 

Essay 

일이 안돼서

일이 안 되거나 졸리면 핀터레스트에서 예쁘고 멋진 걸 구경하거나 뉴욕 독립서점 사이트를 구경하거나 네이버뉴스를 본다. 뉴스 다이어트라는 책을 읽고 모든 뉴스를 끊었다가, 심심한데 책 읽기는 버겁고, 인스타 탐색하기도 지겨울 땐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네이버 뉴스 댓글 코너를 찾는다. 왜 쓸데없는 댓글에서 재미를 느끼지? 그 시간에 헤밍웨이 명대사(?)를 읽고 외웠으면 머리가 맑아질텐데. 싸움 구경, 불 구경을 못 지나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우리 개 온도는 준군이랑 내가 싸우면 난 안볼란다,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분명 싸움에 관한 개의 본성은 싸움을 안 보거나 싸움을 말리거나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녀석이 방으로 향하는 터덕터덕거리는 네 개의 발소리가 너무 커서 싸움을 멈추거나 휴전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때 나는 말한다. "니 새끼 때문에 애기가 상처 받았잖아. 그러고도 니가 애비냐?" (적반하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

언제는 한참을 싸우다가 방에 들어갔는데 옷 무덤 속에 온도가 파묻혀 엎드려 있었다. (애초에 집에 (옷)무덤이 있는 것 자체가 잘못 됐어..) 너무 가여워서 그런 온도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저런 애비 만나게 해서 미안해, 라고 했던가? 뭐 그렇다고 그후 덜 싸우게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온도 마음을 케어하자고 준군과 사이가 좋을 때면 헛수고일지라도 다짐을 하긴 했다. 오히려 딸 둘 키우는 우리 엄마 아빠는 다짐조차 하지 않았다. 고다랑 내가 개보다 못한 건가.

그러고보니 내가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 조차 흥미롭게 본 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든다. 싸우지 않을 때가 더 재미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싸울 때 누가 먼저 욕을 하는지, 욕을 들은 상대방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건지, 진짜 잘못한 건 누구인지 등 싸움에 관련된 여러 정황을 파악하기를 즐긴 것도 같다.

인간은 싸움 구경을 좋아한다. 개는 아니다.

일이 안 될 때 뭘 한다는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고, 그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요즘은 준군이 일하는 학교 연구실 옆 병원 로비로 출근해서 맥북 배터리가 다 닳면 퇴근하는 루틴을 정했다. 집에서 매일 매일 일을 잘 하는 프리랜서는 아마 뭘 해도 잘 되는 사람이었을 거다. 나는 집에서 침대악마, 미드악마, 야동악마, 과자악마, 라면악마, 이불악마와 싸우다 쉽게 지고 마는 류의 괜찮지 못한 인간이라 아예 집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오늘은 배터리가 닳는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충전기까지 챙겨갔다.

9시에 출근해서 1시가 좀 지나니 (그 중 30분은 준군과 점심을 먹었다) 악마의 정령이 병원로비까지 따라와서 '집에 가. 혼자 있는 온도 챙겨야지. 너 온도 엄마잖아? 집에서 해. 오늘은 할 수 있어'라고 속삭였다. 분명히 집에 가면 엄마손파이와 브라우니를 먹을 것이고 졸리니까 낮잠도 잘 것이다. 온도와 산책은 해지기 전에 부랴부랴 공원 한 바퀴 돌고 끝일 테고. 이런 인생 지겹다고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여지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방을 싸기로 했다.

문제는 김고명 작가님(@highlight_kim) 책을 읽고 알게 된 뽀모도로 포커스 타임앱을 60분씩 맞춰 놓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딱 8분이 남아있었다.

‘8분만 기다리면 오전 업무시간 4시간은 채우는 거네.'

보상에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리디북스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뽀모도로 타이머의 목적은 꽉 채워 글을 쓰는 것인데 언제부터 그저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게 되어버린 거지.

다운받은 책은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의 인생에 대한 책 <하퍼 리의 삶과 문학>이었다.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뉴욕에 온 하퍼 리는 정작 항공사에서 행정직으로 일하며 돈을 버느라 계획과 다르게 7년 동안 글을 하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단다. 크리스마스에도 일 하느라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있을 때 뉴욕에서 유일하게 아는 지인인 브라운 부부가 하퍼 리를 맨해튼 다운타운에 있는 그들의 타운하우스로 초대했다. 하퍼 리는 당시 위험한 만큼 저렴한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 쪽에 살고 있었다.

돈이 궁해서 저렴한 크리스마스 선물 밖에 준비하지 못한 하퍼 리에게 브라운 부부는 엄청난 선물을 건넸다. 바로 1년 짜리 백수티켓이었다. 글을 쓸 여력이 없는 하퍼 리를 위해 1년 동안 글만 쓸 수 있게 생활비를 대주기로 한 것이다. 잘 돼서 갚으라는 일종의 빚이었지만 하퍼 리가 잘 되지 못해서 갚지 못하더라도 부부는 개의치 않았으리라.

하퍼 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날 일어난 기적에 어리둥절하여 나는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새로운 삶을 멋지게 시작할 기회가 완벽하게 주어진 겁니다. 그것은 관대함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였지요. '우린 너를 믿어!'라는 그들의 말이 정말로 내 귓가에 쟁쟁 울리고 있었습니다.'

관대하다는 건 사랑에 비해서 한없이 작고 차갑다. 하퍼 리의 말에서 그걸 느꼈다. 관대하기 보다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딱히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게 문제긴 하지만서도. 그 외에 브라운 부부같은 뉴욕 갑부 어디 없나 찾으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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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뽀모도로가 끝났습니다. 쉬세요’

뽀모도로 종이 울렸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옆에 있는 베이글집에 들렀다. 저녁 때 바게트 위에 올려 먹을 스칼리온(파) 크림치즈를 샀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는 건 4달러 인데 크림치즈만 사는 건 half pound (200g)에 8달러였다. 베이글에 올라가는 크림치즈 양이 200g으로 보이는데 따로 사니 뭐 이리 비싸. 베이글+크림치즈를 4달러에 사서 크림치즈만 따로 발라벌.. 통에 담.. 워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단 샀다. 그러고는 Rite Aid (올리브영 같은 것)에서 음료수도 여러 개 샀다. 집에 가서 글을 쓸 때 마실 게 많아야 잘 써질 것 같아서다. 99센트 짜리 음료수와 2개에 5달러 커피를 사서 나름 베버리지 사치를 부리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퍼 리가 그토록 바랐던 시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그 시간에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하퍼 리가 그 1년 동안 대부분을 완성한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 하나로 아흔 살까지 즐겁게 놀고 먹었다는 것 또한 말이다.

비버리지 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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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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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보금

    0
    almost 3 years 전

    박도 작가님께 브라운 부부가 되어드리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네요.... ㅎㅎㅎㅎ 조만간 병원출근 쫄래쫄래 따라갈래요! (통보) 여분의 좋은 사람들 대열에 멋대로 오르고 있는 동네 동생이..🧏🏻‍♀️💎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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