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이라? 그런 게 있었던가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마티스와의 대화

2021.10.03 | 조회 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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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수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메일 <박도수기>

 
 

뉴욕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장소인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갔다. 온갖 에너지 - 산소와 이산화탄소, 미네랄, 침과 땀, 소음과 노래, 각종 호르몬 – 들로 가득차 있어 내가 정말 이 사이를 걸어 다닐 자격이 되는가 싶은 느낌이 들지만 그런 고독함과 소외를 즐기러 자주 그곳에 간다.

무지개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거나 몸 표면의 90프로 쯤은 옷을 벗고 있는 사람들, 또 요술봉이나 형광 탱탱볼을 들고 행위예술을 하는 동호회 회원들, 일렉트로닉 음악 밴드 공연 앞에서 마리화나를 하면서 웃고 춤추는 사람들, 남자인지 여자인지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듯 성별의 벽을 깨부수는 사람들, 공원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서 목욕을 하거나 옷을 벗고 사우나를 하는 홈리스 피플.

미로찾기 하듯 그들 틈을 빠져나가며 걷는다. 그럴 때면 '나는 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지구에 태어나서 보잘 것 없이 지루하게만 살아가는가' 싶다. 어쩌면 나도 남들에게 미치광이로 보일만한 특별한 행위를 전시하며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의 미침을 거기서 최초 공개하고 싶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평범하게 수첩과 샤프를 들고 벤치에 앉았다. 괜히 영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마구 수첩을 넘기며 (베토벤인줄) 글을 휘갈겨 쓰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별 말 아니었음) 내 옆에 벤치에 있던 커플들이 어디론가 떠나자 한 남자가 잽싸게(는 착각) 자리를 잡았다. 그와 나는 한 시간쯤 그렇게 앉아있었다. 멀리서 보면 같이 온 사람들처럼 보일 법한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나는 슬슬 몸이 근질거려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영어 잘할 것 같은데? 요즘 내 관심사는 영어로 말하기다. 하루에 최소 한 명 이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디 한 번 말을 걸어볼까.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매개로 그에게 질문하는 척 했다.

“내가 소설을 하나 쓰고 있거든? 근데 그 남자가 어떤 사랑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됐어. 사랑이 끝나고 헤어졌음에도 오히려 행복한 거야. 그런 사람도 있겠지?”

한국말로도 얼빠진 소리인데다가 영어로 아주 잘 설명한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이미 그런 사람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 봐라. 나 꼬시나?’ 하는 눈빛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오브콜스!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자기도 네 번 정도 연애를 했는데 두 번은 홀가분했다고 말했다. 그 얘기는 그렇게 끝나고 자연스럽게 대화는 이어졌다.

마티스는 나에게 아이디얼 타입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한동안 생각 좀 해본다고 하고는 침묵했다. 침묵이 어색했는지 그는 “핸섬?”하고 귀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단호하게 “노”라고 했다. (사실은 예스) 내 이상형에 얼굴에 대한 기준은 없는데, 그래도 나에게 호감인 얼굴은 있으니 애매하지만 겉으로는 ‘노’를 외쳤다. 뭐 그렇다고 성격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도 크게 생각 안해봤는데. 일단 그런 걸 고려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그의 이상형을 물었더니 그는 여느 남자들처럼 뻔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아!!! 재미없어! 이제 가야 된다고 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물었다. 자기한테 왜 그런 질문을 했냐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쓰고 있는 소설 때문이냐고 했다. 나는 뜨끔했다. 소설가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잉글리쉬 프랙티스 때문이라고 어떻게 얘기를 하나. 무슨 영어 먹튀도 아니고.

“Sure. It’s for my novel and your opinion is very helpful. Thanks”라고 말하고는 쿨한 척 빠르게 길을 걸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위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면서 생각한 건 그와 상관 없이 내가 너무 바보 같다는 점이었다. 이상형에 대해서 술술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내 의견이 없는 걸까? (영어를 못하는 건가) 아 물론 이상형에 대해서 그렇게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꼭 정상적인 건 아니지만 그 외에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도 나는 명료하게 답하지 못했다. 내가 오직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묘사 정도였다. (뭐하는 사람이냐)

이참에 이상형을 정리해보기로 했으니 바쁘신 분들은 이만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시는 게 좋다. (경고했으니 책임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30대다보니 외모를 보게 된다. 되려 20대에는 외모보다는 마음주의자였다면 이제는 외모가 괜찮은 사람이 마음씨도 곱다는 걸 깨닫게 되었달까. 어른들이 얼굴 뜯어 먹고 사는 거 아니라고 했지만 요즘 대세론은 “그래도 너무 잘생겨서 얼굴보면 미운 마음이 풀리더라니까? 못생기든 잘생기든 필 놈은 다 핀다. 그럴 바엔 보기 좋은 떡이 낫지!”인 것 같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외모가 좋은 걸로 친다. (이게 게임의 규칙은 아니지만) 단정하게 잘 차려 입은 옷도 중요한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정작 나는 꾸질꾸질한 옷을 즐겨입는다. 청바지도 그냥 가위로 막 자른 걸 입고 바지도 길이가 어중간해서 다리를 더 굵고 짧게 보이게 하는 것 밖에 없다. 바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리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이런 말을 어찌 영어로 설명하겠는가? 다시 설명이 가능한 말로 고쳐보면 외모는 첫인상이 좋으면 그걸로 되고 대신 피부가 부드러웠으면 좋겠다. 까만 피부를 좋아하는데 이건 영어로 설명하다보면 괜히 블랙피플을 좋아한다는 게 될 것 같아서 생략하기로 한다.

그 외에는 대화와 취향이 맞는 것이 중요한데 같이 하루 종일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기에 편하고 기대가 되는 것. 그리고 나서 그것에 대해서 끝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된다. 이것이 너무나 순수하고 소박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부자에 훈남”이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싶다. 내 이상형은 비현실적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화가 많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판타지처럼 좇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이돌 같은 연인을 만날 수 없으니 아이돌 덕후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하는 걸로 만족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다정하고 친절하고 갈등을 유연하게 해결하며 정직하고 반듯하고 공정하고 생각이 많고 깊고 마음이 열려있기까지 한데다가 같이 농구를 하거나 이런 저런 운동을 하면서 정갈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쓰면서, “말 그대로 이상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라고 얼버무릴 차례다. 음, 그런 사람의 단점은 뭐가 있을까? 내가 말한 점을 다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말하지 않거나 생각지도 못한 단점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어떤 걸 허용할 수 있을까? 이상형을 말할 때 '~~하지 않는 사람' 항목을 추가하는 것도 좋겠다. '~~하는 사람'보다 더 폭이 넓어 찾기 쉬울 테니.

자 이제 이걸 영어로 번역해서 암기하면 되겠다. 이만 급하게 글을 끝마친다. 이보다 훨씬 전에 끝내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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