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은 istj 일까요?

뉴욕에서 내 몸 관찰기

2021.10.02 | 조회 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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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수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메일 <박도수기>

 
 

주로 타인의 몸을 관찰하곤 했다. 길거리에서 보거나 또는 같이 자는 사람의 몸을 보듯이 내 몸을 살뜰히 둘러보게 되는 건 3년에 한 번 정도인 것 같다. 그 주기는 다이어트 시기와 어느 정도 일치했다. 살이 조금 빠졌을 때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할 땐 강제로 헬스장 거울 앞에 서 있게 돼서 보고, 또 그게 습관이 돼서 집에서도 옷을 벗다가 시간을 내서 본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드디어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부터 이미 확‘찐’자였던 내 몸과 다시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악!!! 보기 싫어. 이거 아닐 거야. 이건 꿈이야.’ 얼굴이 좀 핼쑥해졌길래 빠졌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시력도 안 좋아서 거울이 뿌옇게 보이기까지 하니 엎친데 덮쳐 망상이 과해진 탓이다. 브라탑에 레깅스를 입고 헬스장 거울 앞에 섰다. 덤벨을 들고 런지를 하려고 거울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비극의 서막. 그제서야 비로소 보였다. 내 엠보싱 셀룰라이트와 뱃살과 등살과.. 아니 그냥 모든 살들이.

‘어? 이거 아닌데. 이거 예전 몸이잖아. 이거 나 아닌데. 나 살 빠졌는데? 뭐지?’

내가 혼란스럽게 계속 눈을 비비며 거울로 하체를 집중적으로 바라보니까 옆에 있던 흑인 근육가이 조나단이 “What’s wrong? You need help?”하고 물었다.

“No, it’s just because… I AM SO FAT!!! 으으!!”

이렇게 말하면 안된다는 건 뉴욕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지만 도저히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살쪘어. 살빼야 돼”라는 흔한 한국말은 우선 그보다 두 세 배 몸집이 큰 미국인 앞에서 하기엔 어쩐지 뻘쭘하기도 하고 동시에 재수없어 보일 것 같아서다. 두 번째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이들에게 그런 자신감 없는 부정적인 말은 마치 슬픈 비밀을 강제로 듣게 된 듯 부담스러운 고백과도 같기 때문이다.

뚱뚱해서 살을 뺀다고 하면 하나같이 “Don’t say that again! You look beautiful!”이라고 말을 했다. 그럼 나는 “Really?” 하고 되물었다. 심할 때는 “Do you think so?” 정말로 내 외모가 괜찮다고 생각하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럼 상황은 더 어색하고 애매하게 흘러가서 오글거리는 몇 개의 문장이 이어지다 이내 침묵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경험들로 ‘비로소 다이어트를 그만하고 진짜 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결론을 내면 좋겠지만 그후로는 혼자서만 생각했다. ‘살도 못 빼는 바보등신아!’

하지만 조나단은 내가 만난 다른 뉴요커와는 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빈말 따위는 모르는 MBTI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내 손에 있던 6키로짜리 덤벨을 줘보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10키로 짜리로 바꿔주었다.

“납작한 배를 원해? 그렇다면 그걸로 해봐. 할 수 있어!”

위로도 싫지만 잔소리도 싫은데 일단 급하니까 받아들였다. “때..땡큐?”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조나단의 몸을 ‘슬쩍’ 보다는 조금 더 길게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시선이야 흔하다는 듯 팔 운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형광등 빛을 반사시켜 반짝반짝 광이 나는 까맣고 탄력있는 그의 근육에 짝짝짝 박수를 보내고 싶었지만 그 대신 말을 걸었다. 순전히 영어 연습을 위해서다.

“근데 넌 그런 근육과 힙업과 체력을 타고났을 거 아냐. 왜냐하면 흑인들은 다들 몸이 좋잖아.”

그는 어이없이 웃으면서, 들고 있던 바벨을 살짝 바닥에 내려놓았다. 순간 나를 때리는 줄 알았지만 그는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냈다.

“워워! 모든 흑인이 그런 게 아니야. 내 옛날 사진 보여줄게. 봐봐.”

나는 옛날 모습 말고 그냥 현재 모습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뒤에서 조나단의 몸짱 여자친구가 나타날 것 같아서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신경도 안쓰겠지만) 고분고분 아이폰 사진첩을 보았다. 그가 보여준 사진은 그냥 마른 수준이지 지금 나처럼 운동이든 시술이든 뭔가가 시급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단한 리액션을 보여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리액션도 연습이니까.

“오마이갓!!! 이게 너라고? 어떻게 만들었어? 너 진짜 대단하다. 몇 년 걸렸어? 얼굴도 훨씬 좋아보여! 팁 좀 가르쳐줘.”

“응?? 그 정도 아닌데. 넌 일단 러닝이나 유산소 고고. 많이 먹지 말고. 나 가봐야겠다. 열심히 해봐 고고”

그리고 그는 떠났다. 조나단의 MBTI는 ISTJ 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직설적이고 웃음도 별로 없고 시니컬하다. 또한 계획적인 루틴으로 운동을 하고 끝장을 본다. 여기에 말이 많지도, 남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냥 나를 싫어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 ISTJ지?” 하고 물으면 그가 영원히 나를 뚱뚱하고 미친 아시안으로 기억할 것 같아서 “Bye! Have a good night!”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서 내 몸을 또 들여다보았다. 뭐야? 몸이 왜 또 이래? 운동 하고 왔는데도 왜 살이 그대로냐고! 바나나 2개와 크로아상 하나와 커피 두 잔만 먹었는데 여전히 왜 뚱뚱한 거지? 빠졌을 거야. 빠졌겠지. 테스트를 해보자.

예전에 잘 맞던 허리사이즈로 새로 샀는데, 도무지 들어가질 않아서 3개월 째 고이 접어두기만 했던 청바지를 서랍장에서 꺼냈다. ‘분명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이제는 들어갈 거야.’ 기대감에 차서 한 쪽씩 쿵쿵 코끼리 다리를 바지에 구겨 넣었다. 청바지가 만약 사람이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 때문에 숨쉴 틈이 없어 죽어가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미세한 차이로 지퍼를 올려 잠글 수는 있게 되었다. 그게 꼭 청바지님에게 잘된 일은 아니었는데.

지퍼가 잠겼어도 밖으로 입고 나갈 상태는 아니었다. 그저 잠겼다는 걸로 자기 만족이었다. 거울을 보고 살짝 웃어보았다. Love yourself의 일환이었는데 그 순간 ‘투-둑-. 뽁!’ 하고 ykk 지퍼의 일부분이 뜯겨 나갔다. 가운데 손가락 길이의 금색 지퍼 시작부분에 손가락 마디 하나가 사라진 듯한 모양새였다. 아, 바지 지퍼가 이렇게도 뜯어질 수 있는 것이구나. 온도는 지퍼가 뜯어지는 명료한 소리에 깜짝 놀라 한 번 짖었다. “월!!” 

운동을 마음먹은 건 오늘이고 운동을 하고 돌아온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어째서 1년 한 사람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까 나는. 운동에서 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한 나의 태도이자 고질적인 문제다. 단기간에 성과를 바라는 것. 장기전이라는 건 해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다는 것.

아마도 조나단은 15키로 짜리 덤벨을 조용히 건네며 3년 동안 매일 해보라고 그때까지는 “BE QUIET!!!”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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