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스럽게 화를 해결하는 방법

[박도수기] 05.13 thu 심신의 안정

2021.05.14 | 조회 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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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수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메일 <박도수기>

 
 
 
 
 
 

LETTER

짜증해결법

병원로비 카페로 출근 3일째 입니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8시간 타이머를 맞춰 놓고 글을 쓰다보면 아 정말 채울 수 있을까? 막막한데요. 그래도 이런 저런 딴짓도 시간에 포함하다보면 시간이 가긴 가더라고요. 평소에 쓰지 않던 글을 쓰는 시간도 생기고. 작심3일차라 그런지 괜찮았어요. (마의 고비: 내일)

문제는 퇴근 후 시간이에요. 8시간을 채워도 밤에 조금 더 할 수 있다고 욕심을 내니까 저녁을 차리는 것도 싫고 설거지 하는 것도 싫고, 미안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게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래도 개엄마니까 꾸역꾸역 온도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온도가 혼자 나갔다 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까. 근데 온도가 조증이라서 산책을 갈 때마다 60키로 정도의 힘으로 저를 땡기거든요. 물론 제가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만 누가 내 멱살 잡고 땡기면, 아씨! 하잖아요. 멱살 잡히는 일이 살면서 거의 없긴 하니까 지하철에서 누가 날 밀거나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짜증나요 안나요?

아무튼 온도랑 고작 6층 계단만 내려왔는데도 땀이 줄줄나서 온도에게 살짝 빈정이 상해있었어요. 온도는 개의치않고 밖에서 헤헤거리면서 오줌을 싸더라고요. 아 얄미워. 이럴 때만 개인척 하는 거지. 그러고는 똥을 싸려고 자리를 잡는데(온도) 멀리서 어떤 개와 마스크 안 쓴 아저씨가 걸어오는 거예요. 똥 싸는데 누가 오면 온도가 똥 싸다가 막 개한테 달려가려고 하거든요? 그럼 막 똥을 걸어가면서 싸게 되거나 싸다가 만 형태로 뛰게 돼서 성가신 일이 발생하게 돼요.

저는 그 분에게 손으로 잠시 멈추거나 천천히 와달라고 손짓을 했어요. 매너있는 견주들은 아예 길을 건너가주거나 피하는 경우가 있어서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그자가 온도 쪽으로 바짝 오는 거 아니겠어요? 온도는 다행히 다 싸고 그 개 냄새를 맡으러 제 줄을 당겼죠.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그래봤자 불행이었어요. 힘으로 온도를 제압한 후 봉투를 꺼내서 뒤처리 해야 했고 그 와중에 땀은 눈 앞을 가리고 있어서 눈이 시었어요. 삐-삐- 그 아저씨가 멀어지자 한국말로 된 욕을 세 번 반복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삑삑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뭐 우리 개가 뉴욕 여왕도 아니고 그 아저씨와 개가 우리 개 때문에 10초를 멈춰서 기다리는 것도 민폐긴 하더라고요. 그냥 저는 짜증이 나있던 거예요. 짜증을 낼 준비가 된 상태 였던 거죠.

하늘을 올려다보니 노을 빛이 반사된 구름이 너무 예뻐서 기분이 바로 좋아진 거야말로 다행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또 고비입니다. 할일이 10개쯤 쌓여 있었어요. 준군에게 배변판을 치워라, 온도 발을 씻겨라 두 개를 요청해서 나머지 8개는 제 일이 되었어요.

그중에는 불필요하게 발생한 일도 있었는데,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해도 될 일이 온도든 준군이든 둘 중 한 명으로 인해 추가된 거라서 인내심이라는 게 전혀 작동이 안되는 야수같은 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온도를 위해 닭가슴살을 오븐에 말려 구워주려고 닭고기를 한입 크기로 다 자르고 오븐에 넣었는데 닭고기에서 나온 물이 오븐 바닥으로 흘러버려서 주방을 전부 걸레질 해야 하는 일이라거나 온도가 배변판 옆에 살짝 오줌을 흘려서 다시 배변판을 닦고 바닥을 또 닦아야 하는 일이죠.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저 네 줄의 글은 '오븐에 닭고기를 넣기' 딱 이 한 줄로 끝나는 거 였을 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얼굴을 한없이 찌그러졌습니다. (못났다)

꾸역꾸역 겨우 다 닦았습니다. 그때 준군이 등판하죠. 뚫린 입이라고 감히 나불거리며 바닥 닦을 때 이걸 뿌려라, 더 뿌려서 빡빡 닦아라, 이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

(자고로 감정이 격해졌을 땐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스승님(없음) 말씀이 있기에 말줄임표로 대체하겠습니다. 이하 말줄임표가 많음을 양해부탁드립니다. 점자아님....) 

다시 한 번 참고 더 닦았습니다. 닦고 저는 바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더 이상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준군 입이 대빵 나와있었습니다. 더 구석까지 빡빡 닦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

......

..

..

............

..............................................

 

아 그래요. 제가 좀 집안일을 대충 하는 경향이 심하긴 합니다. 음, 그러면, 음, 꼼꼼한 니가하시지 왜 지라리........... ...... ..... ......... ........

무시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습니다. 분이 안풀려서 앉은 상태로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내가 하루종일 글쓰고 집에서 밥차리고 설거지하고 수박가져오고 얼음콜라도 주고(사소해보이지만 우리 가정 살림에서 중요한 이슈) 온도 간식도 만들고 3시간 넘게 컴퓨터 앞에 앉지도 못했는데 니가 지금, 그거에 대해서 인정했어 칭찬을 했어? 그 모든 것에 잘했다 하기는커녕 사람을! 더 못했다고! 구박을 해?"

말하는 중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그냥 넘어갈 수 있잖아. 그 정도는!!!! ... ... ... 더 빡빡!!!????? 그 정도느은!!!!! 적당히 마무리 한 걸로 그래, 했구나, 하고 그냥! 좀! 쟤 나름으론 힘들게, 최선을 다 한 거겠구나, 수고했네, 고생했네!!!!! 이런 말 안할 거면 그냥 가만히라도 있지, 더 빡빡?????"

(김빡빡씨?)

준군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도 나한테 칭찬 받지 않았다면서 왜 나는 칭찬을 바라냐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 ... ...... ....

그러든지 말든지. 저는 비로소 책상에 앉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한국 R&B 감성힙합 노래를 틀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의 머릿속)

'가만있어보자, 내가 왜 눈물이 났지? 저딴 인간이 무슨 오스카상 시상자도 아니고, 난 저 인간의 칭찬이나 인정 따위 전혀 필요 없는데. 아, 맞네. 내가 안해줬구나. 나한테.'

그런 생각이 들자 순식간에 나는 나를 칭찬해주는 따뜻한 로봇이 돼서 오글거리는 말로 나를 토닥이고 칭찬해주었습니다. 하기 싫은 집안일들을 그럭저럭 해낸 거 대견하다고, 온도를 많이 웃게한 거 잘했다고, 3일 동안 출근하면서 계속 글 쓴 것도 정말 멋진 일이라고 안아주었습니다.

(화룡점정)

"박도야, 오늘 하루 충분히 즐거웠고, 잘했어. 기분 풀어. 내가 다 알아주고 다 이해하니까~"

 

내가 이러는 동안 준군은 뭐했는지 아세요?

지 기분을 풀어주려고 욕조에 따듯한 물 받아서 반신욕을 합디다...

참나. 잘한다 잘해.

May 12th 8:00 p.m. W.H, NY
May 12th 8:00 p.m. W.H, NY

 

* 작성후기 * 싸우고 혼자 명상하며 셀프허그해주는 여자와 싸우고 혼자 반신욕하는 남자

어제의 소소한 싸움의 마무리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준군 혼자 반신욕하는 걸 보니 진심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어른스럽게 풀어나가는 모습은 많이 발전한 거니까. 사실 싸운 후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를 평가하는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해요. '쯧쯧, 어릴 때 어떻게 자랐길래 애가 저렇게 삐져대냐. 내가 참자. 져주자. 쯧쯧 얼마나 성찰이 부족하면 성숙하게 대화로 해결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서 자기만 생각할까. 넌 퇴학이다.' 음, 뭔가 제자를 양성하는 선생님? 불과 몇 달 전까지 뭐만 하면 이불 뒤집어 쓰던 거에 비하면 양반이죠. 뭐. 

 
 

Essay

뒷담화엔 뒷담화 

나는 사람을 잘 의심하고 잘 믿는다. 어떻게 동시에 그게 가능하냐면 의심을 거친 후에 완전히 방심하기 때문에 더 철썩같이 속게 된다. 아무리 의심해봤자 속인다거나 속이 검은 사람을 걸러내긴 힘들다. 운이 좋으면 시간이 좀 지나야지만, 아 그게 그거였구나, 알게 되지.

사람을 믿게 될 때 나는 들떠서 신난 양상을 띤다. 믿을 사람이 추가되니까 기분이 좋아서 춤을 추게 된다. 그러니 돈 빌려달라는 거 아니면 사람을 믿는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믿을 의향이 100% 있다)

다만 무엇이든 올라가기만 하는 건 없겠지. 기분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계단으로 6층에 올라갔다 1층으로 내려가고 비행기도 떴다 착륙하고 사랑도 했다가 안하고 몸무게도 올라갔다 언젠가 내려가겠고. (이건 왜 계속 올라가?)

발등까진 아니어도 내가 어떤 사람이다, 믿었던 이미지가 사실은 가식 또는 거짓이라는 걸 알아채고 마음이 추락해버린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내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는 거다.

좀 쎄한 게 있어도 아니겠지, 아니겠지 넘어간 게, 사실은 전혀 아닌 게 아니었던 것이다.

살면서 발동하는 조금의 쎄-한 촉을 앞으로는 그냥 넘어가지 말라는 교훈을 얻은 걸로 내 속에서 발발한 신경과민에 울화통이란 감정의 블랙홀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결국엔 모든 걸 싹싹 털어 버려야지 남는 거 없이 정리가 되는 사람이라 글로 낱낱이 적으면 다 될 거라고 생각했다. 분이 컸는지 두 세 번 글로 써도 풀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오랜만에 육성으로 뒷담화를 했다.

"언니, 그 사람 알지? 내가 전에 (좋다고) 말했던? 언니가 왜 쫌 아닌 거 같다고 했잖아. 난 에이~ 아니야! 이랬고. 아 글쎄 그 사람, 언니 말이 맞더라? 왜냐면... $@^@^"

(대체 언니가 말할 타이밍은 언제인가ㅋㅋ)

언니는, 거봐 내 말이 맞지? 내 말 잘 들으라니까, 라는 말 대신에 (나라면 그랬을듯) 너무 자신하는 사람을 믿기 보다는 항상 주의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나보다 더 신나게 그 사람을 씹어주었다.

아 맞아. 여자가 원하는 건 이거지. 이거.

그래서 나도 언니가 살짝이라도 뒷담화를 하면 그 사람을 신나게 욕해주기로 다짐했다.

뒷담화 때문에 기분이 상할 땐 나도 하면 된다 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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