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표기법 X 월말 산문] 2026-6月

서울과 제주, 로즈힙과 꽃다발

2026.06.29 | 조회 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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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식의 계절 표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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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6월 23일. 로즈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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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구독자 님께,

 

[인터뷰&레터] 매달 마지막 편지에는 두 개의 코너가 실립니다. [표기식의 계절 표기법]. 사진가 표기식의 카메라가 채집한 이달의 계절을 연재합니다. 그는 어디로든 떠나는 사진가입니다. 모바일로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될 수 있으면 PC의 큰 화면으로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임유청의 월말 산문]. 이번 달 찾아온 이야기를 씁니다. 

[계절 표기법]과 [월말 산문]은 한 개의 단어를 공유합니다. [인터뷰&레터] 이달의 작가와의 시간 속에서 건져올린 단어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트랙에서 움직이며, 종종 마주칩니다.

『전부 취소』, 호영 작가님과 보낸 6월. 이달에 채집한 단어는 ‘모호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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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청의 월말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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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선명한 모호

 

 

서울에서

 어느 날 친구가 말하길, “네게 연재 청탁이 들어올 것 같아”. 나한테? 왜? 라고 물었는데, 왜 되물었냐면 내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내 것이 아닌 어느 지면에든 글을 연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표라고 하긴 좀 이상하긴 해. 기획서를 쓴 것도 아니고 연재 제안을 넣어본 것도 아니고. 그저 써야 하는 글, 그것도 내가 정한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니, 이것은 그래, 소망에 가깝겠지. 나는 친구의 전언이랄까 예감이랄까, 아무튼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그런데 성사된다면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근심을 하며, 희망이랄 게 없으나 실망도 예정하지 않은 궁리를 성실히 시작하는 것이었다. 

 희망 없음을 오해하지 말 것. 실망하지 않을 방어벽으로서는 더더욱 아니다. 요즘 내게 자조란 추억에나 있다. 지금 나는 있었던 것이 사라진다거나 없었던 것조차 사라진다거나 하는 일들에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는다. 어쨌든 무언가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이미 이루어져 있음. 그 사실을 제때 혹은 뒤늦게 알게 될 것을 안다. 그러니 미지의 미래에 거는 기대보단 스스로 정한 작은 생활들을 지키지 못해 실망하는 일이 더 어렵고 두렵다. 그렇잖아요.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 얼마나 어렵게요? 그러니 어려운 건 자기 마감이겠죠. 라고 쓰고 나서 드는 생각은: 지금 꽤 괜찮은 말을 한 거 같은데, 뭐지? 이 가진 거 없는 자의 가진 척하는 언사들. 이런 글은 언제쯤 써야 정상일까? 정상이란 말은 웃자고 쓴 말이긴 한데, 정상성을 의식하지 않은 적 없다는 점이 가장 우습다. 언젠가 어떤 점쟁이가 내게 당신은 10대와 20대 때 이미 생의 기력을 다 소진했다고 말했었지. 진짜 웃기지도 않은데 맞는 말은 같았단 말이지. 그런 마음으로 가상의 연재에 붙일 제목이나 정해보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정해진 건 없어 보인단 얘기. 하지만 정해야 한단 얘기. 

 

 

제주에서

 일요일. 나는 친구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제주 중산간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종일 비가 오갔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거나 분처럼 고운 안개비거나. 김녕 바다를 뺀 모든 곳에 비가 내렸다. 비수기 여행의 비가 비의 비는 아니지만 내 여행에 비가 따르지 않은 적 없음으로 비추어 누군가 말했듯 내가 비사람이거나 또 다른 누군가 말했듯 비수기의 비에 비는 원래부터 포함인 것인데, 누구의 의견을 따라도 나는 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차는 딱히 위로 자랄 생각 없어 보이는 어두운 나무 터널 사이를 구불구불 달렸다. 아닌가. 내내 비가 내린 건 다음 날이었나. 중산간도로의 낮은 나무 터널들도 내일의 일인가. 다이빙 스폿에서 뛰어내릴까 말까, 아니 그전에 펜스를 넘을까 말까, 넷이서 가만히 점점 어두워지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날의 일이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아무튼 비가 왔고, 중산간도로를 달리다(가 그랬다 치고), 맨발에 약간의 모래를 묻힌 채 한 낮은 아파트로 향하며 나는 본 적 없는 작은 수첩에 관해 물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필요할 때 열린다는 수첩이었다. “있잖아, 아까 들은 얘긴데… 당신에게 수첩이 있다지?” 친구는 그런 걸 안 가진 사람도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이때 핸들을 잠시 놓았던 것도 같고), 유유한 화물선의 여가 시간처럼 이마가 둥근 낚시 보트, 아니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악셀을 밟으며 말했다. 어떻게 생긴 수첩이라 했다. 오래됐는지 낡았는지 까만지 빨간지 한 권이랬는지 열 권이랬는지 어째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거기엔 그가 오랜 시간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낱말들이 적혀 있다 했다. 그것은 마치 까마귀의 단어 모음 같았는데, 아니다, 그보단 어떤 나무 가구와 흡사하다. 한 대상에게서 자기가 가진 줄도 몰랐던 풍미를 끄집어내거나 부여하는 향신료 서랍장. (이름부터가 뱃사람인 그의 꿈이 대항해시대 향신료 무역상임을 읽은 바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연상이긴 하다.) 잘 분류되었거나 엉망진창인, 다만 먼지 한 톨 없는 서랍장을 열고 꺼낸 한 꼬집의 글자들. 그것들은 한 줄 요약의 단순명료함이라든가 잘 기억되고 잘 읽히기라든가, 그런 거 너머의 폭 넓은 가능성을 탐험하는 모래 속 스파이스 같기도 한데요. 언젠가 그가 쓴 어떤 말들을 여전히도 종종 떠올리는 나로서는 그의 서랍인지 수첩 속에서 쨍그랑댈 낱말들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헤드라이트로 수국 덤불을 비추며 깔깔 웃는 친구가 말한다.

 그찮아. 언니도 그런 수첩 있을 거잖아.

 난? 없는데? 왜 없지 내 수첩?

 나는 가진 적 없는 수첩의 행방을 더듬으며 말을 잇는다. 아니 무슨 수국이 저래? 활짝 핀 파랑, 보라, 자줏빛과 핑크의 뵌 적 없는 부처님 머리만 한 꽃들. 꽃잎 하나 헐지 않은 완벽하게 어마어마한 수국들이 안개비인지 장대비가 내리는 깜깜한 아파트 주차장, 자동차 불빛 속에서 잘 꾸민 깡패처럼 무리 지어 흔들대고 있다. 제철 수국이란 유행가 같지. 너무 사랑하기엔 조금 머쓱하지. 이견 없이 멋진 것들을 갈등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까? 그땐 그런 상념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이곳은 제주. 우리는 생애 첫 벤자리 회를 먹으러 달려가던 중이었다. 여기까지가 새로 쓸 여행기의 서두.  

 

 

우리가 나눈 것들

 단어는 글의 픽셀. 글의 해상도는 단어들이 문장에 얼마나 빼곡히 모이고 쪼개졌나로 결정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글이 선명한 생각일까? 어떤 글은 높은 해상도를 도구로 흐린 곳까지 나아간다. 사람의 삶을 정확한 주장이나 매끈한 서사로 완성하지 않음을 기꺼이 선택함으로써, 읽는 이와 쓰는 이가 조우할 모호함이란 공통의 지대를 도모한다.

 이곳은 가장 선명한 작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밑줄을 긋거나 수첩을 펼치거나 향긋한 서랍을 열어 제각각 가져갈 것들을 주머니에 넣는다. 흩어져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비로소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보는 것이다. 이게 뭐였더라? 들여다보면서 각자 좋아하는 위치에 올려두곤 하는 것이다. 예컨대 로즈힙. 그것은 해안도로 어느 시멘트 담 위, 서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놓여있다. 나는 처음에 내가 문어를 보고 있는 줄 알았다. 바다 쪽으로 난 작은 도로 위 뒤집힌 문어. 그만큼 선명하고 그래서 모호한 열매. 어쩌면 꽃다발. 6월의 호영 작가는 자기 몸보다 큰 종이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길고 흰 꽃다발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한 다정한 이가 모두에게 나눠주라며 건넸다고 했다. 모임이 끝난 후 우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꽃을 받아 돌아갔다. 꽃들은 모두 남영동에서 출발하여 저마다의 동선으로 서울 모처를 돌아다닌 후 각자의 자리로 갔다. 내 꽃은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에서 내린 후 청계천과 광화문을 지나 지금은 우리 집 나무 장 위 데낄라 병에 꽂혀 현관을 바라보고 있다. 나누고 가지고 이동하고 바라보는 선명함들. 이토록 구체적인 모호.  

 

 

202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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