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17] 깨끗한 옷을 입고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은 오늘, 차분한 마음으로 인사 보내요.

이번에도 기차 안에서 인사말을 적고 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본가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며칠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데요, 후련함의 눈물 핑 돌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극적인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네요.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도 재신과 저는 '시작과 끝(혹은 끝과 시작)'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글을 썼습니다. 18호에 실어보낼 재신의 시 ⟨유리⟩ 첫 문장은 '나는 끝으로 시작해 끝까지 견고하다'고요, 저의 시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은 '입춘'이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밀고 나간 '시작'과 '끝'이 어떤 모양으로 이어졌을지, 흥미롭게 살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작'이라 하니 저는 새해의 기대 하나를 두고 가겠습니다. 일월 일일에는 깨끗한 감촉의 니트를 새로 살 예정이에요. 흰 기운이 많이 섞인 옅은 회색이면 좋겠습니다. 몸을 조이지도, 훌렁훌렁 흐르지도 않는 정직한 모양이었으면 좋겠어요. 꼭 새해에 사고 싶어서 이 주 동안 기다렸어요. 어떤 것으로 고르게 될지, 그것이 제 몸에 어떻게 맞을지 궁금합니다.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맞이할 새해가요. 

차재신

유리는 이상한 사물이다. 벽의 역할을 하는 주제에 벽 너머를 가리지도 못하고, 쉽게 깨진다. 심지어 깨질 때 요란스럽기까지 하다. 와장창 쨍그랑, 연약한 벽. 연약한 유리. 그런 면에서 유리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사물이 아니라 그냥 대뜸, 유리로 있는 것 같다. 실수로 태어난 사물처럼. 

대개 생명이 없는 사물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느낌이다. 사물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모를수록 더욱 그렇다. 테이블, 간판, 벽돌, 의류수거함, 은색 나이프... 이런 것들은 꼭 영원히 있을 것만 같다. 나보다 오래갈 사물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기분. 

몇 년 전, 달리는 고속버스에서 비상용 망치에 붙은 안내문을 보았다. 비상 탈출 시 쓰는 용도라며, 창문의 양쪽 모서리를 가격하면 유리가 쉽게 깨진다는 문구가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읽고 나니, 버스 안의 창문들은 꼭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상함을 느낄 때 쓰게 된다. 진실이 거기 있는 것 같아서. 

일상 속에서 느끼는 부조화, 혹은 부조리 같은 것.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사물'이라고 의미를 가둔다면, 나는 사물이면서 동시에 사물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목적을 찾는다. 바꿔 말하면 평생 부조화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다. 나의 용도는 매 시간, 장소, 관계마다 달라지니까. 

나의 시창작론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래서 무언가 띠꺼워야 쓸 수 있다. 요즘 띠꺼움을 별로 못 느끼는 것을 보니 나도 배가 부른 것 같다. (내가) 시를 계속 쓰기 위해서는 계속 띠꺼워해야 한다. 사춘기 상태를 유지하는 것. 꼴통의 상징, 벌꿀오소리처럼. 

잠시 딴 길로 샜다. 이번 시는 유리다. 유리가 띠꺼웠다. '그렇게 박살날 거면 뭐 하러 태어났지?'하고 아니꼬웠다. 시 스터디를 하던 시절, 친구들은 나에게 "너는 네 시에 대해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내가 쓴 거니 내 맘대로 할 거다.

연정모

고백할 것 하나. 나는 폭력에 내성이 심각하게 없다. 며칠 전엔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신체가 훼손되고 변형되는 장면을 똑바로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깜짝 놀라 뒤따라나온 동행을 보자마자 왜앵 울어버리기까지 했다. 혐오감 때문에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백할 것 둘. 일상의 절반쯤을 견디거나 버티는 채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나 좋은 동시에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세상에 말들이 지나치게 많다. 외출한 나는 거의 대부분 의욕적인 상태지만 집에 도착할 때쯤 되면 어디로든 숨고 싶어진다. 수치심과 훼손됨과 바닥남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상태, 그러나 수치심이나 훼손됨이나 바닥남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나 멀쩡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 또 괜찮아지고 다음의 의욕적인 하루가 시작된다.

삶이 너무 과격하다.

선하고 안전한 것들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글을 쓴다.

그것은 희망도 소망도 아니고 삶을 유지하는 나름의 작동 방식.

요 며칠 동안엔 시를 꽤 많이 썼다. 퇴고할 것은 생각도 안 하고(실제로 안 하고 있음) 초고를 무작정 여러 개 써냈다. 전부 뜨겁고 빛나는 기후 속에 있는 시들이다. 

아마도 굳어지고 무거워진 내 겨울 신체가 그것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땀 흘릴 일 없는 날씨, 옷감들에 겹겹이 쌓여 팔다리가 부자연스럽게 묵직해지는 날씨, 웅크린 채로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또다시 이 계절 속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피부로 곧바로 와닿는 뜨거운 광선을 바란다. 몸이 데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중 한 편의 시, 18호 메일로 실어보낼 시의 제목은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 지난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둘러보는 것에서 시작됐다. 올해 2월, 베트남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후에 남긴 짧은 메모 둘로, 아래에 첨부한다.

어떤 것은 입속에서 불쑥 탄생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이란 말도 그랬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던 순간 태어나 머릿속을 계속 맴돌던 말.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

휴가 땐 내내 수영만 했다. 뒤통수와 상체의 일부만을 태양 광선 아래에 노출시킨 채로 물속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그러고 있자면 시간과 소리를 아주 먼 곳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물 그림자 외엔 그 어떤 것도 선명히 볼 수 없었고 그것이 좋았다. 이곳에서만 실현되는 작고 선량한 세계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휴양지의 리조트라는 게 일상의 고민이나 슬픔 따위는 깨끗하게 도려내진 특수한 공간이기에 이런 아름다운 감상을 읊을 수 있는 거겠지만, 내가 거기서 느낀 투명한 안전감은 조금 다른 영역에서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수영장 저 쪽에서– 나와 같은 물의 더미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그리고 선베드에 누운 동생과 엄마가 우릴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명료한 사실이면서 어떤 진술이고, 동시에 영영 반복될 진실 같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일은 나를 대단한 안도와 정교한 슬픔 속으로 데려다 준다. 그 속에서 나는 아주 시끄럽게 굴다가도 문득 사라질 듯 고요해지며, 나의 아빠와 엄마와 동생은 그런 나를 아무렇지 않게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시들은 휴대용 안식처 같은 것.

재작년이었는지, 아주 기분 좋은 꿈을 꾼 적 있다. 저 휴가를 떠나기도 한참 전이다. 

꿈 속에서 나는 아주 크고 넓은 수영장 속에 있었다. 해양 생물이 사는 수족관처럼 깊었고, 발이 닿지 않는데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물속에서 눈을 뜨는 것은 나의 오래된 열망인 동시에 두려움인데 눈을 번쩍 뜨자 아무렇지도 않게 앞이 보여 놀랐다. 각막이 따갑지도 시야가 뿌옇지도 않았다. 

몸을 웅크리듯 잠시 힘을 주었다가 슝 앞으로 당겨내면 물밖으로 튕겨나가기도 했다. 돌고래처럼. 선베드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짝짝짝 동시에 박수를 쳐주었다. 물을 가르고 휙 튀어오를 때의 느낌, 강렬한 간질거림. 잠에서 깬 후에도 계속 꿈 속에서의 감각을 붙들고 있었다. 잊고 싶지가 않았다.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이래 처음 맛보는 자유.

그런 기분을 통째로 남길 수는 없을까. 

어떤 넘실대는 순간과 기분들을, 아주 제대로 보관하는 방법은 없을까, 쓰기의 형태를 빌려.

핸드폰 케이스 안에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납작 넣고 다니는 마음으로:

언제든 꺼내서 입안에 굴릴 수 있도록:

나를 살리고 유지하는 보존하는 감각들을:

안전하게 남길 수는 없을까.

무얼 더 잘 쓰고 싶어진다면 오로지 그 마음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흥성거림과는 거리가 먼 연말을 보내고 있다. 몇 밤 후 새해가 온다니 그저 얼떨떨하다.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둘 중 무엇이 먼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 채) 밟힌 눈처럼 뒤섞여 있다. 축하나 감사는 많이 못 나눴다. 

⟨선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은 ‘입춘’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한 해의 첫 번째 절기, 아직 춥지만 봄이라는 말을 숨기고 있는 귀엽고 비장한 날. 그런 날을 더운 지방에서 보낼 수 있었단 것은 내게 어떤 가능성처럼 느껴진다. 어느 겨울에라도 더위를 상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 더위의 씨앗을 품고 살아갈 가능성. 

뜨거운 리조트 안을 거닐다가도 언제든, 내 앞에 놓인 커다랗고 너그러운 수영장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가능성과

삶의 뜨거움을 축복으로 여긴 적 있단 기억으로

선명한 육체를 가졌단 놀라움으로

겨울의 새해를 맞이한다.

🚶생활기

차재신: 마음의 고향 같은 게임을 찾는 것이 요즘 저의 목적입니다. 퇴근 후 접속해서 간간히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 몰두할 수 있는 게임. 근데 나타나지 않아요. 고향은 출생지라는 뜻인데 출생지가 없으니, 영영 집시처럼 살아갈 운명인 듯 합니다.

연정모: 회사 일로 종종 이런저런 행사를 운영합니다. 지난 주엔 2024년을 회고하는 워크숍이 있었는데 저도 참여했어요.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해였는지 돌아보았는데, 올해 내가 무엇무엇을 했다고 기록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혼자 시를 쓴 것은 이력이 되지 않으니까요. 항상 책상에 앉아 있기는 했는데 그렇게 완성한 것들은 그저 제 책상 위에만 있습니다. 그것이 조금 무력하게 느껴져 돌아오는 마음이 심란하기도 했는데… [시인이기]를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마음 때문이란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내가 믿어주기 위해서. 그걸 잊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지속된 시도를 너그러이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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