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즉 눈이 펑펑 내리던 작년 2월, 나는 E-HOUSE 203동 307호에 새 둥지를 틀었다. 오늘은 내가 서울에서의 첫 사계절을 보낸 307호와 그곳에 덮어둔 추억을 파헤쳐 보려 한다.
새내기에게 통금은 매~우 걸리적거린다. 술자리가 끝나고 가끔 자정을 지나 귀가할 때면 꼭 두세 벗들이 나처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통금 시간이 지나면 중앙도서관과 법학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지름길이 막히기 때문에 높은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종종 하늘에서 주먹으로 언덕을 쾅쾅 내려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조형관을 지나 중앙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곱등이 압사 다발 지역이다. 휴대폰 전등을 켜지 않고 걸어가다가 발밑에서 튀어 오르는 곱등이를 발견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소리를 꽤 지르고 도망쳐야만 했다. 방학 끝물이 되면 통금을 너무 많이 어겨서 퇴사 위기에 처한 벗들이 통금 시간을 맞추기 위해 축지법을 쓰곤 했는데,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지라 11시 59분에 가까스로 들어와 로비 소파에서 20분 동안 숨을 헐떡인 적도 있다. 처음 보는 벗들과 FBI 수사대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가 우르르 쓰러졌던 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렇게 푹 젖은 빨래처럼 소파에 널려 있으면 새벽에 전화를 하러 내려오는 벗들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나도 밤이면 밤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충 말아 올리고 편의점에서 요맘때 하나를 산 뒤 해 뜨는지도 모르게 떠들었다. 본가에서 세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친구나, 저멀리 동쪽 대학을 다녀 우리 둘의 접선지는 무조건 종로여야만 하는 친구와 '엉덩이는 한 개냐 두 개냐' 같은 시답잖은 주제로 재잘거린 적도 있고, 그러다 아주 가끔 "곧 이대역인데 잠시 얼굴 보고 가도 되냐"는 말을 들으면 들뜬 마음으로 헐레벌떡 뛰어 내려가던 2층 돌길도 생각난다.
하늘이 제법 낮아진 가을에는 우주 공강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나는 기숙사생이었으니까! 그때는 아침 11시 수업이 끝나면 오후 3시까지 낮잠을 자는 게 월요일과 목요일의 루틴이 돼버렸다. 좁고 긴 창문으로 들어오던 여린 회색빛의 하늘과, 얼굴을 피해 내리는 고소한 햇빛, 거기에 적당히 바삭거리는 솜이불을 덮어주면 누구보다 달콤한 낮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방 앞에 큰 돌벽이 있어서 채광이 좋진 않았지만 나는 그 약간의 어둑함마저 마음에 쏙 들었다.

기말고사 기간에는 첫눈도 보았다. 방에서 책만 펼쳐 놓고 딴 짓을 하던 그때, 하얀 무언가가 소복이 쌓이는 걸 발견했다. 어릴 적부터 '쌓인' 눈이 보고 싶었던 나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저번 메일에서도 말했다시피 나의 고향 경상도는 눈이 귀하다...) E-HOUSE는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새내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는 환호성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겨울에도 눈이 부실 수 있음에 신기해하며 나 또한 난간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두었다.
나에게 307호는 행복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물론 자주 오발령된 화재 경보나, 여유로운 평일 아침을 방해하는 검침 기사님들이나, 배수관 공사 때문에 천장이 뚫린 채로 살았던 겨울 방학을 생각하면 미화된 감이 있지만... 그곳에서 나는 때때로 설레었고, 더없이 싱그러웠고, 아직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며 쓰다듬을 받는 듯했다. 자취방으로 이사한 후 혼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졌지만, 어느샌가 기숙사 방보다 작은 틀에 나를 가두는 것만 같았다. 콘텐츠학 전공부터 형법 교양까지, 1학년 때의 나는 거의 모든 단대를 들렀을 만큼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뭐든지 하고 싶었고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작년의 내가, 지금은 '상경 학사가 꼭 있어야 한다더라', '학회를 꼭 해야 한다더라', '졸업은 빠를수록 좋다더라' 같은 말에 휘둘려 흥미는 그닥이지만 또 싫은 건 아니라 어영부영 해내는 무신경한 일들에 파묻혀 버렸다.

“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다”, 내가 힘들 때 가장 큰 힘을 주었던 구절이다. 이번 수필에서 추천할 책을 찾기 위해 아끼는 문장들을 모아놓은 필사 노트를 뒤적거리다 오랜만에 마주쳤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좇으라는 사람들의 말에 코웃음 치는 회의주의자가 된 지 오래다. 이제는 내가 만든 것, 내가 하려는 것, 그리고 나 자체에도 ‘팔림직 함’을 평가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번 기말고사도 학점을 올려 잘 팔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채찍질하던 중, 갑작스럽게 마주친 저 구절에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보통 따르려는 인물을 뽑을 때 존경스러운 위인이나 한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인물을 선정한다. 하지만 나는 작년의 나를 앞세워야 할 것 같다. 어디에나 꼭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서리를 갈아내면 나의 항체는 어떤 항원에도 대응할 수 없어진다. 더불어 그것이 울퉁불퉁한 까닭은 항원이라는 위험을 막아서기 위함도 있지만, 내가 진정으로 맞물리고 싶은 것과 합체 되기 위해서는 굴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다듬어 원형이 된다면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덜그럭 거리기도 쉬울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모양을 훑어보려 한다. 내가 어떤 모양인지 알아야 나와 맞물릴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을 좇으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낙천적이고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원형이 된 당신은 어디에도 멈추지 못하고 결국 지쳐 쓰러질 것이다. 나는 그럴 당신을 걱정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두각을 발휘하는 면모가 있다면, 한 번 쯤은 그대로 들이 박아보는 게 어떨까?
당신의 모난 구석을 매만져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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