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리병이에요.
당신의 해변에 편지가 도착했답니다.
이번엔 어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요?
같이 한번 읽어 봐요..!

소설에 대한 에세이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돼지갈비를 주문해야 한다는 사실이 퍼뜩 생각났다. 내일 시아버지 칠순 상에 올릴 갈비찜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활자를 기다리는 빈 화면을 앞에 둔 채 마켓컬리 앱을 켜고 돼지갈비 2kg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양념이 되어줄 사과와 배, 대추와 생강도 함께 담았다. 샛별배송을 이용하면 초고를 완성할 즈음 문 앞에 도착할 것이다. 마감 시간이 촉박한데 청소며 요리며 챙겨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꼭 소설 「곰 사냥」에 나오는 컬트적 불가리아산 유인원 난쟁이 ‘잭’이 내 머리통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만 같다. 시아버지 칠순 상을 손수 차리기 위해 허둥대는 며느리라니, 나는 이렇게 구시대적이며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수동 공격성을 안전하게 쏟아부을 곳을 찾아 소설 쓰는 사람이 된 건.
오한기의 단편소설 「곰 사냥」에는 한때 문학청년이었던 다섯 친구가 등장한다. 나, 너, 한상경, 이상, 카프카. 그들은 서로를 ‘훌리오 코르타사르, 이상, 장미셸 바스키아, 프란츠 카프카’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이름으로 부른다. 또 자본의 상징인 은행을 터는 것만큼 상징적인 행위는 없다며 다 같이 은행을 털 계획도 세운다. 문학을 위해서라면,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만 있다면, 비루한 현실을 전복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은행에 나타난 건 ‘나’와 귀여운 염소뿐이고, ‘나’는 안전하고 따뜻한 은행에 평화로이 앉아 차라리 친구들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소위 '소설가 소설'만큼은 쓰지 않기로 선언한 작가도 있지만, 나는 늘 이런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작가가 소설가 이야기를 써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소설가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소설 속 문청들이 보여주는 치기어림을 질투하며 살아왔다. 도대체 얼마나 유복하게 자랐기에 문학을 하겠다고 대학에 간단 말인가? 그들은 예술가적 포즈를 취한 채 ‘괴짜’ 소리를 들을 것이고, 재미난 일화를 생산해 낼 것이다. 그 과정을 소설의 소재로 써먹으며 예민한 감수성을 벼려 문장으로 담아낼 것이다. 아, 부러워라.
예고나 문창과 진학은 꿈도 못 꿀 만큼 가난했던 나는 현실과 타협해 국어교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내가 머리 아픈 수험서나 펼쳐 들고 있을 때, 제2의 카뮈가 될 거라며 비대한 자아상을 드러내고야 마는 ‘문학 하는 애들’을 보면 질투심에 속이 울렁거렸다. (물론 이 역시 나의 치기어림이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면, 결국 실패한 전위 예술 이후 그들은 점점 멀어진다. ‘나’는 학습지 방문교사, ‘카프카’는 보험판매원이 되었고, ‘이상’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소설 속 청자인 ‘너’는 대기업 홍보팀에 입사해 비교적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결혼해 아이도 있다. 앞서 말한 난쟁이 ‘잭’은 문청 시절의 ‘너’를 괴롭히던 ‘광기와 우울’을 상징하는 환상적 존재다. 하지만 너는 어느새 잭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생활인이 되었고, 지금은 말기 암 환자가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다섯 명 중 소설가로 이름을 얻은 이는 한상경뿐이다.)
소설 속 ‘나’가 토로하듯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으로 살지도 못한 채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가. 예술가를 꿈꿨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란 또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어려운가. ‘나’의 말처럼 비현실적인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 그건 더 이상 비현실이 아닌 현실일 것이다. 그런 현실에 마지막 일격이라도 가하고 싶었던 걸까. 암 환자가 된 ‘너’를 제외한 ‘나, 카프카, 이상’은 ‘곰 사냥’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곰’이라는 전제부터 말이 안 되는 그 일을 당장이라도 실행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 셋은 그 길로 곰 사냥에 나선다. 과연 그들의 곰 사냥은 결국 성공할 수 있을까? 하이라이트는 이제부터니 꼭 사서 읽어보길 바란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글로 세상(=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이들이 사회에 제대로 발붙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으로 슬픈 일이다. 상상의 힘으로 펼쳐낸 은행털이나 곰 사냥 이야기는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드는데, 그 감정은 현실일까, 비현실일까.
예술에도 급을 나눠 문단 권력이 내어주는 손을 잡지 못하면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구조 역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이미 소설을 쓰고 있는데 등단을 하지 못했다고 소설가가 아니라니, ‘잭’이 안 나타나고 배기겠는가? 나는 문학 시장에서 목숨만 부지한 이 패잔병들의 이야기가 지독한 현실로 보이고, 그래서 더 애틋하다. 자본을 비웃어야 할 문학의 한가운데가 사실은 가장 폐쇄적이고도 자본주의적인 세계라니. 이런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해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소설로 보여주는 이 작품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그리고 원고를 완성한 지금, 손가락 하나로 배달되어 갈비찜으로 변신해 있는 나의 한돈 돼지갈비는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현실에 발붙이려고 지독히 노력해 온 내가, 이제는 소설가가 되어 자진해서 비현실로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나는 이쯤에서 못된 불가리아산 유인원 난쟁이가 든 총구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놓고 싶다. “나, 진짜 성공한 예술가 되고 싶으니까 너, ‘광기’는 남기고 ‘우울’은 꺼져!” 팡!

from 이날아

모모
<#7 뭐라도 시원하면 됐지.>를 읽고.
이준아 작가님 글은 처음 읽어 보았는데 너무 좋네요! 머리를 빡빡 미는 충동이 제게도 있었던 것처럼 몰입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