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리병이에요.
당신의 해변에 편지가 도착했답니다.
이번엔 어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요?
같이 한번 읽어 봐요..!

이 글을 쓰는 건 7월 7일. 오작교 위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 1년 만에 찐하게 회포를 푼다는 칠월칠석의 뜨거운 오후(사실 칠월칠석은 음력 기준인지라 한 달 넘게 시간이 남았지만….) 중요한 건 오늘의 햇볕이 견우와 직녀의 애절하고 곡진한 사랑만큼이나 몹시도 뜨겁다는 것이고 나는 인류세의 기후위기를 절감하며 세상 모든 온실가스를 저주하는 마음으로 연희문학창작촌에 숨어 있다.
연희문학창작촌에 온 것은 내가 입주 작가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놀러 온 것이다. 이곳이 무릇 문인 호걸이라면 한 번쯤 궁둥이를 붙였다 가는 핫플레이스라고 하니 과연 얼마나 대단한 곳일까 정탐을 온 것이다. 연희문학창작촌은 그 명성에 걸맞게 적잖이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숨 막히게 귀여운 치즈냥이들이 있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도 있다. 나는 더위를 피해 이곳 도서관을 게걸스레 이용하기 시작했다. <보틀 레터>를 써야 했다. 그리고 이내 생각했다. 서가 수준이 형편없군. 내 책이 없잖아.
내 소설을 아무도 모르는데 남의 소설은 왜 소개해야 하는 거지? 이런 우울함 속에 서가 앞을 전전할 때였다. 심통 간 한 권의 책 앞에 멈춰 섰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잊고 있던 어느 감상이(해당 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건 바로 박형서 『핸드메이드 픽션』의 수록작, 「나는 『부티의 천 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이하 「나부쓸」)에 대한 감상이다.
박형서의 「나부쓸」을 처음 읽은 건 소설이라는 게 뭔가 대단히 대단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겁먹고 있던 몇 년 전의 무렵이다. 처음 이 작품을 읽고서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소설이란 게 대단하긴 한데 막 그렇게 속절없이 대단한 건 아니구나(positive)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도 되는 거구나, 하는 방식으로 나를 소설의 세계로 끌어들였달까. 그러니까, 나도 대단히 장난치고 싶었던 것 같다. 농담을 하면 곧잘 혼나기나 했는데 이 아저씨는 그럴싸한 방식으로 농담을 해서 책도 팔고 근사한 추천사도 받아서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는 책날개에서 무척 진중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부쓸」은 소설에 대한 소설, 즉 메타픽션이다. 작품은 주인공(박형서)이 어느 늦은 밤 “성북구 정릉의 혐오시설 <한분태 뼈다귀 해장국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그곳에서 주인아저씨가 꾸벅꾸벅 졸다 말고 갑자기 훌쩍이며 우는 것을 보곤 자신의 “위대한 장편소설 『부티의 천 년』”에 대한 구상을 벼락같이 떠올린다. 박형서는 이 아이디어를 도둑맞기 전에 자신이 그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지 미리 밝히고자 이 작품을 쓴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장황한 줄거리 소개, 혹은 선포가 소설의 골자다.
그 줄거리란 인도 여신의 축복을 받아 불사의 몸을 얻게 된 음유시인 ‘뷘팅’이 천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인도와 유럽, 아시아를 거쳐 한국 땅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광활한 시공간을 펄쩍펄쩍 넘나드는 대담한 서사성, 그리고 요즘 보기엔 조금 고루하고 민망하지만 아무튼 간혹 웃기긴 해서 자존심을 날카롭게 긁는 유머가 작품의 백미다. 특히 작가는 소설의 중간마다 거듭해서 ‘이 부분은 무엇이 어쩌고 저째서 대단한 대목이 될 것이고…’ 하는 식의 문장을 첨언하며 도래할 자신의 소설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데, 이게 무척이나 뻔뻔해서 어쩐지 읽는 이의 마음까지 덩달아 담대해진다. 궁금하면 언젠가 도래할…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박형서의 위대한 장편소설 『부티의 천 년』을 기다려보자. 생각해보니 나는 그걸 기다리다가 작가도 되고 책도 내었네. 별로 부러워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돌롱도르 베테르는 한 작품을 좋아하기 위해 세 번을 완독하지 않으면 그건 무엇이든 가짜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음사 편집자 김민경은 다 알고 싫어하고 대충 알고 좋아하자고 말한다. 나는 세 번은 좀 많은 것 같고 두 번 읽었다. 모쪼록 다시 읽으며 느낀 감상이 있다. 「나부쓸」에는 소설의 가장 즐거운 순간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대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순간일 것이다. 모든 작가는 얼마간 자신의 작품이 위대한 걸작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때는 자신의 글감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인류 보편의 심금을 꽝꽝 울리며 불멸하는… 이를테면 『견우와 직녀의 천 년』 같은 이야기가 탄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터무니없는 기대가 사람을 창작의 시작점 위에 올라서게 한다. 이때는 그 생각을 품은 것만으로도 작품이 이미 내 손에 주어진 것만 같고, 컨디션이 허락한다면 젊은작가상이니 늙은작가상이니 뭐든 탈 수도 있을 것 같고, 들떠서는 주변에 피곤한 사람들을 붙잡고 이 이야기가 어떨 것 같은지 떠들기도 한다. 책임 없는 쾌락의 순간이다.
아저씨 농담만 한가득인 이 소설이 즐거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소설을 어떻게 쓸 거냐면…”으로 시작해 그 이야기만 줄창 신명나게 떠드는 이야기. 나는 이만큼 작가에게 행복한 형태의 글쓰기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신나게 쓴 소설을 좋아한다. 읽고 있자면 ‘이 작가님 아주 신나서 썼구만!’ 느낌을 주는 소설. 그런 작품을 읽고 있으면 덩달아 신이 난다. 위로와 공감에 작가의 진심이 중요하듯 유쾌함에도 작가의 진심이 중요하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쓰게 만드는 막연한 두근거림과 간질거림. 누군가로 하여금 망상일지라도 도약을 시작하게끔 부추기는 터무니없는 충만함.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소설에 쏟아 놓고 있다. 이 진심에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부티의 천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그런 작품은 도래하지 않는다. 달뜬 마음으로 작정하고 쓰면 허튼 생각이니 삿된 농담이니 자꾸만 껴들다가 겅중겅중 뛰던 이야기는 지지부진 굼떠진다. 그리고 손가락들의 헛스윙 끝에 박하신의 소설 같은 게 탄생한다.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생각한다. 이상하다 처음에는 뭔가가 있었는데….
하지만 그 시작과 끝 사이에서 잃어버린 무언가. 그걸 찾지 못했기에 다시 쓰는 것도 맞다. 다음에는 정말로 무엇인가 찾을 수 있을 것만 같고, 찾고만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다시금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그러다 마침내 박하신의 소설집 같은 게 완성된다). 「나부쓸」은 이 거듭되는 되풀이의 노정 어딘가에 위치한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부티의 천년』을 상상하며 우리를 창작의 노정에 올라타게 하는 유희의 순간. 그곳에서 손짓하는 부름의 이름이 『부티의 천년』에 다름 아니다.
한편 나 역시 작품을 읽는 내내 <보틀 레터>를 쓰기 위한 참신한 아이디어가 청아한 샘물처럼 줄곧 샘솟았다. 신나게 쓴 작품을 읽으면 나도 신이 나고 그러면 신나게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담아내기엔 <보틀 레터>의 1회 차 분량으론 부족하다. 뷘팅이 천 년의 시간 동안 굽이굽이 풀어내는 곡진한 질곡에 대해서는 아직 다루지도 못했다. 콸콸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미리 밝히자면, 그 글에서는 동시대 기술매체이론과 사회담론을 문학 비평의 진단 도구로서 유용한 뒤 찰스 올리베이라의 소용돌이 구조 안에서의 쓰레기통 모형에 입각해 박형서에 대한 연구사 검토를 진행할 것이다. 나아가 세르반테스 이후 이야기꾼의 계보 안에서 박형서를 어디쯤 위치 지을 것인지 첨예한 실랑이 끝에 윤석열 이후의 한국에서 그의 문학이 지닐 수 있는 잠재적이고 생성적인 함의를 짚어내고자 한다. 한국 문학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한 그 글에는 이름난 동시대 철학자들 이름이 열댓 명은 언급될 것이고 벽돌 만한 원서의 각주도 마흔 개는 족히 달릴 거라서 인용되지 않은 이론가 입장에선 무척 분통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연희문학창작촌에 기증될 것이다. 그렇게 이곳 서가에도 내 책이 한 권 쯤 꽂혀있게 되겠지. 그러므로 이 글은 내가 <보틀 레터>를 어떻게 쓸 것인지 밝히는 선포에 가깝다. 나의 <보틀 레터>는 언젠가. 아마도 조만간. 아니다 그냥 언젠가 도착할 것이다.

from 박하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