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026, 21세기 채신 소설_김쿠만

정영문의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읽고

2026.09.25 | 조회 147 |
첨부 이미지

안녕하세요. 유리병이에요.

당신의 해변에 편지가 도착했답니다.

  이번엔 어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요?

  같이 한번 읽어 봐요..!

첨부 이미지

사실 나는 매년 추석마다 똑같은 단편을 읽곤 하는데, 마침 내 편지가 도착할 날이 2026년 추석 연휴였고, 이번 기회에 그 소설에 대한 소개를 실으려다가 나온 지 너무 오래된 소설―혹시나 궁금해 하는 사람을 위해 살짝 알려주자면 이상우 작가의 「중추완월」이다―이라 그만두고 다른 마땅한 소설을 물색하던 중 결국 이것밖에 없는가 하면서 집어든 책이 한 권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소개할 작품, 『프롤로그 에필로그』다.

눈치 챈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내가 발문으로 쓴 첫 문단은 전부 한 문장으로 이뤄졌는데, 뭣 하러 이런 괴상망측한 짓거리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프롤로그 에필로그』의 모든 문단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구태여 답할 것이고, 소설이 그런 모양새니, 그 소설을 소개하고 있는 이 편지 또한 그런 모양새를 취해야 하지 않냐고 반문할 터이니, 혹시라도 보기 불편하다면 지금 즉시 스크롤을 최하단까지 내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세 줄 요약을 찾길 바랄 뿐이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굳이 이 소설, 『프롤로그 에필로그』의 시놉시스를 살짝 읊어보자면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방에 도착한 소설가인 ‘나’는 함께 그곳에 간 미국인 친구와 권태롭기 그지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와중, 과거 근처 해안가에서 주인 없는 발이 열네 쌍이나 파도에 떠밀려 왔었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발목과 주인이 없는 그 발들에게 흥미를 느낀 ‘나’는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해변을 떠돌며 혹시나 열다섯 번째, 열여섯 번째 발들이 새로 떠내려 오지 않을지 살펴보는 한편, 그 발들과 발들의 주인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지만, 이 소설은 정영문 작가의 소설이고, 발목과 주인 없는 발들의 관한 이야기는 금세 강물에 떠내려간 7인의 사무라이들처럼 어느샌가 유야무야 사라지고, 대신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서나 찾을 수 있는 비버―수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와 딱따구리에 관해 이야기하다, 아브라함과 노스트라다무스가 만들어낸 젤라토에 대해 떠들다가 티라미수와 아이스크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종막에는 왕가위와 장국영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게 되는데, 이쯤 되면 도대체 이게 무슨 소설인가 싶겠지만, 정영문은 책 첫 장에서부터 이 소설이 긴말할 것 없이 하나 마나 한 이야기라는 것을[1]​ 아주 친절하게 알려준다.

작가의 이런 스탠스는 『어떤 작위의 세계』, 혹은 그 이전인 『바셀린 붓다』부터 이어져 왔는데, 그는 언제나 서사의 흐름보다 생각의 흐름을 더 많이 다루는 작가였고, 혹자는 그것을 소설이 아닌 산만한 산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독자는 그런 산만한 산문도 문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행위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는 게 아닌 건가 싶은데, 아마도 혹자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작가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사람, 수많은 작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정영문을 일독하는 것을 권해봤지만, 내 추천이 제대로 먹힌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었는데, 사실 보통 소설 읽듯이 이런 소설을 읽는다면 길을 잃기 십상일 것이고, 어떠한 의미도 못 찾을 게 분명할 텐데, 애초에 정영문 작가는 동시대의 소설가들이 20세기 소설조차 아닌, 서사가 끈덕지게 붙어 있는 19세기 소설[2]​을 쓰고있다는 발칙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이야기의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선처럼 파악하여 하나의 서사담화를 찾아내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독서 방식과는 거리가 몇백, 몇천 개의 파도만큼이나 한참 떨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 오래 남는 걸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 쓰인 작품이 아니라 잠시 동안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서사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습관을 멈추게 하기 위해 쓰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프롤로그 에필로그』라는 제목은 참으로 잘 지은 제목인 게 분명하다.

이제 앞서 약속한 세 줄 요약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고자 하는데, 세 줄 중에 벌써 한 줄을 써버리고 말았으니 두 줄 요약으로 갈음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벌써 두 줄을 써버리고 말았으니, 이 하나 마나 한 세 줄 요약은 그만두고 반 서사, 안티 내러티브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정영문의 『프롤로그 에필로그』와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라는 하나 마나 한 추천만 남기고 마무리 짓고자 한다.

모두에게 특별한 사건 없이 이것저것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복된 한가위가 찾아오길.

 

첨부 이미지

 

from 김쿠만

김쿠만

소설집 『레트로마니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판교』, 장편소설 『신들린 게임과 개발자들』, 『인류는 정지했습니다』를 출간.

 

 

각주

  1. [1] 정영문, 『프롤로그 에필로그』, 문학동네, 2022년, 7p
  2. [2] 같은 책, 127p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보틀 레터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다른 뉴스레터

© 2026 보틀 레터

우연히 만난 한국 소설. 둘째 주, 넷째 주 금요일에 발행.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