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뭐라도 시원하면 됐지._이준아

이나미의 「마디」를 읽고

2026.08.14 | 조회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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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리병이에요.

당신의 해변에 편지가 도착했답니다.

  이번엔 어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요?

  같이 한번 읽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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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애인도 없고 직업도 없는 여자가 머리를 밀었다. 애인이라고 믿었던 남자는 아마도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 같고, 십 년간 가까스로 이어온 대학 강사 자리는 드디어(라고 해야 하나) 맥이 끊겼다. 그녀에겐 많은 것이 없었지만 참 좋은 머릿결이 있었다. 단골 미용실에서 늘 감탄하던 천연 갈색에 탐스러운 머리카락.

잘라버리자. 아니, 숫제 밀어버리자.

소설은 그런 그녀를 따라간다. 메이크업과 헤어까지 완벽하게 세팅하고 사진 한 장 박으려던 그녀를. 찾던 스튜디오가 문을 닫은 것을 알고는 미련 없이 목욕탕으로 가서 모든 걸 벅벅 지워버리는 그녀를. 그 후엔 아무 미용실이나 들어가 삭발을 해달라는 그녀를.

이나미 작가의 소설집 수상한 하루에 수록된 단편 마디2007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최근 아주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되었는데, 과거의 소설이 나의 현재를 관통하는 일이 일어날 때면 나는 또 운명 신봉론자가 된다. 이 이야기가 이제야 내게 올 수밖에 없었던 어떤 거대한 우주의 신호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하는 뭐, 그런 마음.

2007년 호기로웠던 20대의 시선으로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세상살이 다 뒤틀려 머리를 밀어버리는 마흔 살 여자의 마음에 요망하게도 연민의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6년의 나는 그 충동을 완전히 이해하고 말았다. 내 엄마와 같은 해에 태어난 소설가가 지금의 내 나이 즈음에 쓴 소설, 그 안에서 내 또래의 화자가 먹은 에라이 씨발, 나도 이제 모르겠다의 마음을 말이다. 나는 그런 일탈이 반가웠다.

화자는 기어코 머리를 밀어서 (삭발할 때만큼은 단골 미용실에 가지 못하는 그 마음도 나는 너무 알겠는 거고) 과거를 소환한다. 어쩌면 과거에 놓였던 덫에 다시 걸려들고 싶어서 삭발이라는 핑계를 댔을지도 모른다. 민머리가 되며 드러난 오래된 흉터를 매만지며 그녀는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가를 되짚어 본다. 그녀의 덫이었던 한 쪽 귀의 청각장애가 시작된 시점을 (무려 작곡 전공인데 제 의지로 대학원까지 가놓고) 굳이 들춰낸다. 그 아득한 과거 속 구구절절한 사연과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현재가 된다. ,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 이후로 하나씩 꼬리를 물다가 현재의 는 강사 자리도 잃고 무직이 되는구나,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의구심이 들었다.

근데 말이야, 그때 그거 때문에 망한 게 맞겠지?

차마 망하지 않았다는 정신 승리는 못해도 덫이라 믿었던 것에 관대한 마음 정도는 품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어렴풋이 인정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었던 책임 전가의 대상이 실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여기서 더 중요한 게 있다. 그 책임이 온전히 내 몫도 아니라는 것. 그녀의 말처럼 인생이 모 아니면 도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개나 걸도 있는데. 윷 같은 보너스도 종종 있는데.” 마구잡이로 잘라낸 것처럼 보여도 상처의 마디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굵고 튼실해진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몽당 나무들처럼, 그다음이 또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막말로 없으면 또 어떻고.

지구가 절절 끓고 있다. 더워서 죽겠는 와중에 소설 속 화자가 내게 다가오는 상상을 해본다. 그녀의 이름은 윤주혜. 이제 막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한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나 뜨거운 하늘 아래 서있다. 어쩐 일인지 초록이 무성한 나무를 바라보기만 하고, 그 아래 펼쳐진 그늘로는 가지 않는다. 쨍하고 내리쬐는 해를 그대로 받고 있다. 머리카락이 없어서 땀방울이 걸릴 곳 없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데도 제법 당당하게, 흔들림 없이 서 있다. 불혹을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 하니 어디 한번 곧게 서 있자, 결심한 그녀의 텅 빈 정수리 위로 손차양을 해주고 싶다. 그렇게 잠시 같이 서 있고 싶다. 내 친구 같기도 하고, 어쩌다 마주친 내 엄마의 마흔 같기도 한 그녀 옆에 서서 꼭 말해줘야지.

그래, 뭐라도 시원하면 됐지.

 

이나미, 『수상한 하루』, 랜덤하우스, 2010
이나미, 『수상한 하루』, 랜덤하우스, 2010

 

from 이준아

이준아

이준아. 202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청소년 장편소설 정답은 아직이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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