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이번 한 주는 또 어떻게 보내셨나요? 토요일까지도 비가 오고 춥더니, 이제는 한국도 완연한 봄이 왔다고 들었어요. 한국의 꽃이 얼마나 예쁠지, 궁금하고 놓쳐서 아쉬워요. 월요일에 출국할 때보니 벚꽃이 피고 있더라구요.
저는 당분간은 노마드의 삶으로, 해외에서 여러분께 레터를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시차 깜빡하지말고 잘 맞춰서 보내야할텐데요.)
코로나 동안 세계여행을 하는 유튜버들을 보며 참 부러워했는데, 저는 세계여행까지는 못하지만 기약이 없는 여행을 왔어요. 버킷리스트에 “편도로 끊고 해외여행 가보기!”가 있었는데, 이번에 쉬는 기간에 실행해 보기로 했어요.
제 버킷리스트에는 여행 관련된 게 많아서 과연 이번에 얼마나 체크할 수 있을지 궁금해요. 버킷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써 볼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적어놓고 나니 자꾸 들여다보고 실행해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다들 쓰라고 하나봐요.
여러분도 버킷리스트를 한 번 작성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떤 것들이 담기게 될지 궁금해요.
오늘은 어떤 내용의 레터를 쓸지 고민이 많이 됐어요. 요새 저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하거든요. 마음이 불편했다면 이렇게 멀리 여행을 나오지도 못했을거예요.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이제 소속이 없어진지 1년이 되었고, 앞으로의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이 상태가 불안해야하는 데 말이죠. 그 고민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지금이 아둥바둥 동동거리던 대학원 다닐 때보다 포닥할 때보다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죠?
살다 보면 우리는 삶이 내가 계획한 대로 흐르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돼요. 성적, 시험, 입시, 구직, 창업.. 여러 가지 일에서 내가 원하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받아들게 되는 경우가 생겨요. 사람들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순간들을 만나요.
저는 포닥자리를 휴직하고 퇴직하면서 그 감정을 강하게 느꼈어요. 중간 중간 갭이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쉰 적 없이 열심히 달렸으니까요. 누구보다 말을 잘듣고, 나름대로 성실한 학생이었거든요. 학부때도 과외가 없는 날이면 늘 10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대학원에 와서도 읽히지도 않는 영어논문을 읽는다고 새벽까지 노트북과 머리를 쥐어잡고 있었어요.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냥 자연스레 그렇게 될거라 생각했어요.
내 20대 중후반, 30대 초반을 보낸 미국 학계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게 마치 제가 그 커리어를 다 포기하고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느낌이었어요. 한 번 미국 학계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어려울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실적이 뒤쳐지면 소위 말하는 R1, 좋은 연구 중심학교에 교수로 가는 건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커리어가 그렇게 거기서 끝나는 기분이었어요.
총기사건도, 교통사고도 내가 원한 게 아닌데. 그냥 어쩌다보니 그런 일들이 겹쳐 생긴건데, 그래서 내가 지금 멘탈이 나간건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건데. 좀 억울하더라구요. 자의 반으로 타의 반으로 멈추기로 결정하고는 어쩐지 실패한 것 같아 자꾸 움츠러들더라구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도 초반에 한동안은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어요.
구독자님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들 때문에 모든 계획이 흐트러졌을 때 그 억울함과 상실감?
저는 그렇게 한동안 어두운 터널 같은 곳에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터널같은 시간을 지나, 이제는 조금 더 건강하게 스스로를 그리고 실패를 바라보게 된 거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실패라고 생각했던 순간, 그 너머에 있는 것
작년 한 해, 스레드에 브런치에 글을 정말 많이 썼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여러 책도 읽으려고 노력했는데, 곽미성 작가님의 <다른 삶>이라는 책을 읽고 이 부분을 몇 번을 읽고 입으로 되뇌었는지 몰라요.
한번 꺾여 보았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 적이 있다는 의미다. 나는 그런 위기가 누구나의 인생에 몇 번쯤 찾아온 다고 믿는다. 삶의 본질은 불안정성에 있다. 이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도, 타인의 인생에도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길게 보면 인생은, 실패를 어떻게 대면해 왔느냐의 차이로 달라진다. 그리고 실패는 필연적으로 지금 이대로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겠다는 생의 의지 뒤에 오는 것이다.
곽미성 <다른 삶> 중에서
(이 책은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겪은 작가님의 삶에 관한 책인데, 제가 지금 파리에 와 있는 건 정말.. 우연일까요?)
이 구절,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 여러 번 곱씹어 읽었어요. 함께 하나씩 풀어볼까요?
첫째, 실패를 했다는 건 도전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실패를 했다는 건, 우리의 현재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무언가 도전을 했다는 말이에요. 계속 편안한 일,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만 했다면 실패를 만날 일이 없으니까요. 저는 실패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이 내 실패를 아는 게 싫어서 도전 자체를 피해본 적도 있거든요. 여러분은 그러신 적 없나요?
사실 모두가 그런 마음이 있죠. 이미 잘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는 게 훨씬 더 편안하니까요. 그런데 그러다 보면 우리는 안전지대에만 머물게 되고, 성장은 멈추게 돼요.
그러니 ‘실패’라는 단어 뒤에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대로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생의 의지’에 따라 도전했다는 사실이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해요.
둘째, 실패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일 수 있다.
실패를 결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그 뒤로 도전을 이어가면 그건 결국 또 하나의 과정이 되는 거에요. 긴긴 우리의 삶에 한 순간일 뿐, 끝이 아니더라구요. 물론, 같은 일을 다시 도전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일을 도전할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의 삶은 계속 흘러갈테고 이 실패는 그 삶의 과정 중 하나로 기억될 거에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을까요?
무엇이든 어떻게 내가 프레이밍하는 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될 수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포닥을 그만둔 것을 인생의 큰 실패처럼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건 제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였던 것 같아요. 아직도 저는 제게 교수라는 길이 맞을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이 열릴지 여러가지 준비를 병행하고 있지만, 지금 이렇게 다양한 일을 시도하는 시간이 너무 귀하고 감사해요.
제가 포닥을 그만 둔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거라고, 이렇게 여러분께 매 주 편지를 보낼 용기를 못 냈으리라 생각해요. 제가 그랬듯, 우리는 언젠가 넘어지더라도 또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다시 걷게 될거예요.
셋째, 실패의 경험은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가 겪은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창문이 돼요. 내가 실패하고 넘어진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고 믿어요.
고등학교 때 서울대에서 수학 학석박을 다 하신 선생님이 계셨어요. 대화를 몇 마디 해보면 그 선생님이 정말 똑똑하다는 건 느껴졌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이해가 안돼 답답해하셨어요. ‘이걸 왜 못하지?’ ‘이게 왜 안될까?’ 아마도 선생님은 수학이 너무 쉬우셨던 거겠죠…?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는 걸 그 때 어렴풋이 느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실패가 싫었고 무서웠어요.
제가 포닥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서럽게 눈물을 흘릴 때, 그 때 저를 보살펴주셨던 집사님이 해주신 말씀이에요.
지혜야, 네가 계속 포닥을 하고, 또 교수로 가고. 그렇게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스무스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일들과 이 경험으로 인해서 너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 때도 머리로는 그 말을 받아들였지만 당장 내 ‘실패’가 더 크게 다가와 마음으로는 못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이 말을 조금 더 온 마음으로 믿어요.
예전에는 머리로 미루어 짐작했던 자의로든 타의로든 휴식기를 가져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는 더 깊게 이해가 돼요. 휴직, 퇴직을 결정하는 가운데 여러 반대의 말도 들었고 상처도 받았었기에, 이제는 어려운 결과를 받고 어려운 결정을 하는 사람들 본인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가장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말을 조금 더 아끼고, 그 사람을 응원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내가 ‘실패’를 해보니 실패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더욱 겸손하고 겸허해지는, 그렇게 성장하는 거름이 되더라구요.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예상치 못한 굴곡이 있기 마련이에요. 저에게는 포닥을 그만두는 결정이 한동안 실패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 결정과 그 시간이 제게 많은 깨달음과 성장을 선물처럼 안겨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도전들을 준비할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여러분도 지금 어떤 '실패'라고 느껴지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기억해주었으면해요. 실패는 우리가 도전했다는 증거이고, 그 경험은 우리를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예요.
💡 오늘의 작은 실천
1. 지금까지 경험한 실패 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2. 그 실패가 여러분에게 남긴 소중한 선물(새로운 시각, 만난 인연, 발견한 강점)을 하나 찾아보세요.
3. 그리고 그 실패에 케이크를 선물한다면, 어떤 문장을 케이크 위에 적고 싶은가요? (e.g., “2년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지만, 그 덕분에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알게 됐어.”)
실패는 언제나 무언가를 남깁니다. 때로는 아주 소중한 것을.
중요한 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예요.
😊 함께 나눠요!
이 뉴스레터가 당신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요. 지금 느끼고 있는 고민이나 걱정, 또는 당신을 위로했던 경험이 있다면 저와 나눠주세요. 익명으로 공유해주신 이야기는 다음 뉴스레터에서 소개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해요. 답장을 기다릴게요. 😊
지금 저는 파리의 도서관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제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결정 덕분에 제 버킷리스트 한 가지가 가능해졌다는 게 신기해요. 인생이란 참 예측할 수 없는 선물 같은 것 같아요. 곽미성 작가님이 말한 것 처럼, 삶의 본질은 우리를 아주 힘들게도 하지만 또 예상치 못한 선물을 안겨주는 '불안정성'에 있는지도 몰라요.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우리 모두 그 선물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당신의 하루가 조금 더 가벼워지길 바랄게요.
당신을 응원하며,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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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오늘 레터 감사합니다. 최근 진학 실패 이후 마음이 많이 어려웠었다가, "난 이 길 아니면 안돼" 이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른 길을 탐색하는 중입니다 (당장 일은 진학하려고 했던 분야 일을 하고는 있지만요). 정말 박사를 하는게 맞을지, 한다면 다시금 유학을 도전할지 아니면 국내 박사를 할지, 또는 직장을 구하는게 맞을지, 아니면 아예 제 3의 길을 갈지, 하면서요. 여전히 이 실패가 뼈아프게 다가오긴 하지만, 한편으론 그동안 하나만 바라보며 불안과 걱정 한가득인 상태로 달리기만 했지만 이제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레터에 말씀하셨던 것 처럼 이 실패도 언젠가 하나의 과정으로 기억되는 날이 오겠죠? 모두가 다 각자의 길이 다르니까요.
지혜의 편지
안녕하세요 요한님! 이 시기가 언젠가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 지금도 이미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걸 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신 것 처럼요. 그럼요, 각자 모두 자신의 길이 있고 자신의 속도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길이 꼭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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