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린랲은 주방제품 중에 제가 가장 애용하는 제품입니다. 마트 PB상품으로 나온 저렴한 랲을 샀다가 애먹은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흔들렸다가 잘 뜯기지도 감싸지지도 않는 경험은 사소하지만 정말 화나는 일이더군요. 그 후로는 망설임 없이 크린랲을 장바구니에 넣고 있습니다. 보이기엔 다 같은 투명한 비닐이지만 거기에도 차이가 존재했던 겁니다.
그러던 중 마트에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제 인식 속에 품질 좋고 주방에 쓰기에 깨끗한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는 크린랲 포장에 건전지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똑같은 포장이 마트 매대에 한가득 나와있었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크린랩 홍보를 위한 사은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착각이었습니다. 정말 크린랲에서 나온 건전지 제품이 맞았습니다.
이때 느낀 감정은 마치 샘표 로고가 박힌 캔 커피를 봤을 때나, 코카콜라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우유를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이질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물론 생활 용품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보면 랲도 건전지도 거기에 속한 제품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크린랲은 주방에 있을 때, 건전지는 거실이나 안방이 더 어울리죠.
물론 크린랲에서 제가 모르는 엄청난 화학적 기술력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건전지를 만들만한 노하우를 말이죠. 마치 후지필름이 그랬던 것처럼요. 필름 카메라 시장이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급격히 대체되면서 존재감이 희미해진 코닥에 비해 후지필름은 필름 화학처리 기술을 이용해 LCD 패널에 사용되는 필름을 만들면서 성공적으로 시대에 맞는 산업으로 잘 전환했습니다.
제약과 화장품, 특히 화장품은 사진 필름의 주요 구성 물질인 콜라겐이 주요 소재였습니다. 우연찮게도 콜라겐은 사람 피부의 70프로를 구성하는 성분이기도 하니 후지필름의 노하우와 기술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분야가 될 수 있었죠. 그렇게 2015년 대비 2020년 172% 매출 성장 혁신의 아이콘으로 변신한 기업이 후지필름입니다.
그런데 크린랩의 건전지가 과연 후지필름과 같은 기술적 연관성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이 아마도 제가 마트에 진열된 크린랩 건전지를 보면서 혼란스러웠던 이유였겠죠.
크린랲은 몇 년 전에는 'Cleanlab'이라는 영문사명으로 새롭게 브랜드 리뉴얼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최고 브랜딩에이전시로 손꼽히는 플러스엑스에서 진행했죠. 감싸는 '랲 Wrap'이 아니라, 생활 실험실을 뜻하는 '랩 Lab'으로 해석한 절묘함이 참 좋았습니다. 이번 브랜드 리뉴얼의 가치를 단번에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궁금해서 크린랲에서 나온 제품들과 브랜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건전지를 빼고는 굉장히 많은 제품들을 생산 유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던 '랲'만 만드는 회사는 아니었습니다. '랲'과 관련이 있는 주방용품들인 고무장갑이나 수세미, 위생수저, 젓가락 등은 제품 확장에 있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소비자들의 신뢰를 착실히 잘 쌓아왔기 때문에 주방 관련된 가벼운 도구들로 확장하는 건 전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청결 Clean'이라는 브랜드의 핵심 키워드에 어울리게 세탁 관련 세제, 유연제 등으로의 확장도 좋았습니다. 여기에는 '크린랩+'라는 세탁류의 카테고리 브랜드로 기존 크린랩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패키지로 디자인되어 브랜드의 전체적인 표정이 더욱 풍부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소포, 밀대 등의 청소용품의 제품라인도 잘 이어졌습니다.
전체 제품을 보면서 사업 전략상 한 가지 큰 고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식품 보관용기'로의 확장입니다. 크린랲이 음식을 씌워 포장하는 개념에서 본다면 락앤락과 같은 식품 보관용기로의 확장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일회용 '랲'에서 발전해 완벽한 식품 보관을 위한 반영구적인 용기로까지 브랜드의 제품 라인이 이어진다면 어떨까?라는 상상도 잠시 해봤습니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기까지는 큰 모험이기도 하고 크린랲이 가진 '간편함'이라는 정체성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겠더군요. 태생이 무겁고 오래 써야 하는 제품이 아니라 일회성의 소모품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식품 보관용기를 생산하던 락앤락이 냄비, 프라이팬, 접시 등 각종 조리도구까지 확장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주방 '랲'을 만들던 크린랩이 주방 용기까지 확장하는 건 버거워 보이는 이유입니다.
'라잘'이라는 건강식품브랜드로의 확장도 의문이었습니다. 건강과 미용의 관점에서 크린랩에서 나온 비타민을 먹을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크린랩의 핵심가치는 청결함과 편리함이지, 건강이나 아름다움은 아니니까요.
반면에 '일리 illy'라는 캡슐 커피의 유통은 식품이기도 하고 간편하게 즐기는 커피라는 점에서 크린랩이라는 브랜드의 철학에 드러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사를 하면서 다시 보니 제가 마트에서 봤던 다소 충격적인 건전지 패키지는 이제 사라지고 개별 브랜드를 강조하는 전략으로 선회한 걸로 보입니다. Hypermax라는 제품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기업 브랜드 로고의 노출은 축소, 약화됐습니다. 좋았던 점은 새롭게 리뉴얼된 브랜드 로고가 건전지에도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는 점입니다. 크린랲의 색깔을 많이 빼고 개별 브랜드가 강조되니 이전에 있었던 인식의 혼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제품 보증의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도 체계가 안 잡힌 느낌입니다. '크랜랲'이라는 대표 제품 브랜드로 보증해야 할지, 리뉴얼한 'Cleanlab'으로 보증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브랜드 이미지 측면에서는 당연히 랲 제품 연상이 강한 '크랜랲' 로고보다는 'Cleanlab' 기업 브랜드 로고로 보증하는 게 더 좋아 보입니다. 물론 보증으로 적용되는 기업 브랜드 로고는 적용 시 패키지 전체에서 비중을 크지 않게 하고 Hypermax라는 제품 브랜드를 돋보이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연히 본 크린랲 건전지를 도발적인 충격이 이렇게 브랜드 체계와 확장 전략까지 설명드리는 기회를 만들게 됐습니다.
사실 이런 인지 부조화를 방지하고 브랜드를 확장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모기업을 감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네시스 브랜드가 현대차를 감춥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말이죠. 그럼으로써 아반떼 - 소나타- 그랜저 이어지는 대중적인 차들과는 급이 다른 이미지를 만듭니다. 남양유업이 백미당이라는 유기농 아이스크림, 커피 브랜드를 만드는 것도 브랜드의 헤리티지와 프리미엄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샘표는 한식, 간장이라는 소비자의 고정된 인식에 부조화를 위해 'Fontana'라는 서양식 소스 브랜드를 만듭니다. 제네시스, 백미당, 폰타나처럼 모기업과의 보증이 도움이 안 될 때 사용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이와는 달리 어떻게든 모기업을 붙여 도움을 받으면서 브랜드를 확장하려는 사례도 있습니다. LG SIGNATURE 같은 명품 가전브랜드가 그렇습니다. 가전하면 LG라는 소비자 인식을 강화하기 위한 할 수 없는 선택이겠죠. 삼성 스마트폰 브랜드인 Galaxy도 마찬가지입니다. SAMSUNG이라는 브랜드를 노출해야 제품에 더 이득이 된다는 판단이겠죠. 감춰서 독립적인 제품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일단 모기업을 드러내 그 인지도와 브랜드 파워의 도움을 받는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LG SIGNATURE, SAMSUNG Galaxy라는 브랜드는 각각 원래 해오던 산업인 전자, 모바일이라는 제품 카테고리가 그대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결합이고 확장입니다. 크린랲이 건전지 패키지의 전면에 나와 당황스러웠던 것과는 반대로 말이죠.
브랜드의 확장 사례들은 크린랲 말고도 웬만한 규모 이상의 기업에서는 다 고민하는 부분일 거라 생각합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타깃에 따라, 제품의 용도에 따라, 새로운 제품이나 브랜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하다못해 저희 같은 소규모의 회사도 그 고민을 할 정도니까요.
새롭게 런칭할 브랜드가 모기업과의 연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보장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럴 때 저는 '지금 브랜드의 확장은 우리 고객의 인식을 거스르고 있는가, 아닌가?'(고객관점에서)라는 질문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지부조화로 인해 고객들에게 부정적인 놀라움을 주고 우리 제품과 브랜드의 이미지를 해치고 있지 않을지 점검해 보면서 말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은 '우리 제품이나 서비스의 DNA는 무엇인가?(기업입장에서)'입니다. 앞으로 할 사업 영역이 기존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우리 기업과 결과 성격에 맞아야 성공 가능성은 올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랜랲 말고도 브랜드 확장의 경우 사례가 너무 많다 보니 앞으로도 눈에 띄고 의미 있는 확장 사례들은 분석해서 리포트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 [브랜딩브릭] 리포트에서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우현수 @woohyunsoo
브랜드 컨셉 빌더 [브릭] BRIK.co.kr을 설립해 브랜드 스토리와 스타일 구축을 돕고 있습니다. 저서 <일인 회사의 일일 생존 습관>을 실천하며 더 나은 미래를 차곡 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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