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B2B SaaS 회사 영업 리더와 통화를 했습니다. 자랑하듯 말하더군요. "이번 분기 컨버전이 좋아요. 영업이 만난 리드 중 30%가 계약까지 갔어요." 저는 그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되물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 숫자는 자랑이 아닙니다. 무서운 신호입니다.
2026년 B2B 시장에서 영업이 처음 미팅을 잡은 시점에 구매자는 이미 의사결정의 70%를 끝내놓은 상태입니다. 2020년에는 57%였습니다. 6년 만에 13%포인트가 올라갔습니다. 영업이 손쓸 수 있는 구간이 그만큼 사라진 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SiriusDecisions의 추적 데이터에 따르면, 영업이 첫 통화를 잡은 그 순간 81%의 B2B 구매자는 이미 선호 벤더를 정해놓고 있습니다. 영업이 멋진 데모를 보여주고, 케이스 스터디를 꺼내고, 가격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도 게임은 끝났습니다. 그 미팅은 이미 정해진 결정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의례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영업의 사후 처리화'라고 부릅니다. 영업이 만든 매출이 아니라, 영업이 만나기 전에 결정된 매출을 행정 처리하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회사는 여전히 영업 조직에 100을 투자하고, 마케팅에는 30을 투자합니다. 게임의 무게중심이 바뀌었는데 자원 배분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개념을 같이 봐야 합니다. 다크 퍼널입니다.
다크 퍼널은 우리 마케팅 시스템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구매 검토 활동을 말합니다. 슬랙 워크스페이스에서 동료에게 "이거 써본 사람 있어?" 묻는 것, 링크드인 그룹 채팅에서 추천 받는 것, 레딧과 디스코드를 뒤지는 것, 친한 동종업계 친구에게 디엠 보내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ChatGPT나 Claude에게 "B2B 데이터 분석 툴 5개만 추천해줘"라고 묻는 것. 이 모든 게 다크 퍼널입니다.
2026 분석에 따르면 B2B 구매 여정의 73%가 이 다크 퍼널 안에서 일어납니다. GA에는 잡히지 않습니다. CRM에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마케팅 자동화 툴의 어트리뷰션 모델은 마지막 클릭을 잡아내지만, 그 클릭 이전에 일어난 73%의 활동은 통째로 사라집니다.
가장 흔한 실수는 이 73%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트리뷰션 리포트를 펼쳐놓고 "구글 검색 광고의 ROAS가 좋다"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그 리드가 구글 검색을 하기 전에 슬랙에서 5명의 추천을 받았고, ChatGPT가 우리 회사를 1순위로 꼽았다는 사실은 어트리뷰션 모델이 절대 보여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충격적인 변화가 등장합니다.
의사결정자의 84%가 ChatGPT, Claude, Perplexity 같은 AI 어시스턴트로 벤더 후보군을 짭니다. 그 중 68%는 구글을 열기 전에 AI를 먼저 엽니다. 구매자의 94%가 AI로 솔루션을 리서치한다는 데이터도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CMO 한 명이 마케팅 자동화 솔루션을 찾는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2022년이라면 구글에 "마케팅 자동화 솔루션 비교"라고 쳤을 것입니다. SEO 잘 해놓은 우리 콘텐츠가 SERP에 떴다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2026년에는 다릅니다. 그 CMO는 Claude에게 직접 묻습니다. "200명 규모 B2B SaaS에 맞는 마케팅 자동화 5개를 한국 시장 기준으로 비교해줘."
Claude의 답에 우리 회사가 포함되지 않으면, 그 CMO의 후보군에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글 1페이지에 떠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 CMO는 구글을 열지 않았으니까요.
이게 GEO(Generative Engine Optimization)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입니다. SEO가 사람의 검색 행동을 가정한 것이라면, GEO는 AI 모델의 추론 행동을 가정합니다. AI가 어떻게 정보를 인용하고, 어떤 소스를 신뢰하고, 어떤 구조의 콘텐츠를 잘 끌어다 쓰는지에 맞춰 우리 콘텐츠 자산을 재설계해야 합니다.
저는 이 변화를 마케팅 역사상 가장 빠르게 일어난 채널 전환으로 봅니다. 모바일이 데스크톱을 따라잡는 데 8년이 걸렸지만, AI 검색이 구글 검색의 일부를 잠식하는 데는 18개월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더 인간적인 변화가 따라옵니다. B2B 구매자의 61%가 영업과 한 번도 말하지 않는 완전한 셀프 서비스 구매를 선호한다는 조사입니다. 5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숫자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정보의 비대칭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영업이 정보의 게이트키퍼였습니다. 가격, 기능, 호환성, 사례, 이 모든 정보가 영업의 입에서만 나왔습니다. 지금은 G2 리뷰, 레딧 토론, AI 어시스턴트의 요약, 그리고 솔직히 말해 경쟁사 영업의 비교 자료까지 5분이면 손에 들어옵니다. 영업이 갖고 있던 정보 우위가 0에 가깝습니다.
둘째, 영업 미팅의 거래 비용이 너무 비싸졌습니다. 미팅을 잡는 데 캘린더 핑퐁이 3번 오가고, 미팅 가서는 본론까지 가는 데 20분이 걸립니다. AI 시대의 구매자에게 이건 견딜 수 없는 비효율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무료 트라이얼로 30분간 직접 써보고 결정하고 싶어 합니다. PLG(Product-Led Growth) 흐름을 무시한 B2B 회사들이 지금 매출에서 신호를 받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회사 영업팀이 친절하지 않아서 매출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업팀이 친절할 기회를 받지도 못한 채 거래가 다른 회사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B2B 마케팅의 일이 바뀌었습니다. 리드를 모아 영업에 넘기는 깔때기 관리자가 아니라, 다크 퍼널에서 우리 브랜드가 어떻게 인용되고 추천되는지를 설계하는 인플루언스 매니저로 역할이 이동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했던 일들 중 상당수가 시간 낭비가 됩니다. 폼을 잠근 이북, MQL 카운트, 등록만 받는 웨비나. 이 모든 게 새로운 게임의 규칙 안에서는 점수를 못 만듭니다.
폼을 잠근 이북 다운로드 캠페인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북의 내용을 ChatGPT가 5초면 요약해줍니다. 폼을 잠그면 잠글수록 우리 콘텐츠는 AI 검색 결과에서 사라집니다. 폼을 열고 콘텐츠 자체로 신뢰를 쌓는 쪽이 100배 낫습니다.
MQL을 KPI로 쓰는 것도 위험합니다. MQL은 우리 시스템 안에 들어온 사람만 셉니다. 73%의 다크 퍼널은 아예 카운트에 안 들어갑니다. MQL 1,000건이 들어왔는데 분기 매출이 안 늘었다면, 그 1,000건은 이미 결정을 끝낸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폼을 채운 흔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케팅이 매출을 견인했다고 착각하면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가 지난 6개월간 효과를 본, 그리고 동료들이 효과를 봤다고 보고하는 실천이 다섯 가지 있습니다. AI 가시성 모니터링을 KPI에 넣는 일, 영업 첫 미팅을 가치 검증의 자리로 재설계하는 일, 다크 퍼널 표면을 늘리는 일 등인데, 각 항목을 구체적인 실행 단계까지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케터 개인이 새로 익혀야 할 세 가지 능력—한국에서 거의 가르치는 사람이 없는 그 스킬셋이 무엇인지도 본문에서 다뤘습니다.
가장 위험한 자리는 이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예전의 KPI와 예전의 캠페인 방식을 유지하는 마케팅 팀입니다. 일하긴 열심히 하는데 매출 기여가 안 보이고, 어느 분기에 영업 리더가 "마케팅이 도대체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 순간이 옵니다. 그 다음은 예산 삭감입니다.
특히 마지막 다섯 번째 실천은 한국 B2B 시장 분위기상 반발이 가장 큰 부분입니다. 어트리뷰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제 결론은 본문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걸 안 보고 넘어가면 81%의 결정된 고객을 영원히 따라가는 입장에 머무릅니다. 결론을 봐야 그림이 완성됩니다.
원문 보기: https://medium.com/p/ece4433584f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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