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아의 요즘 한국영화
서울에 봄이 오려면
<서울의 봄>(김성수, 2023)
김성수 감독과 함께 황정민, 정우성 등 굵직한 배우들의 홍보가 무르익고 <서울의 봄>의 흥행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에 서둘러 극장을 찾았습니다. 전두광을 분한 황정민 배우의 분장과 연기에 감탄하다보면 141분은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문제는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착잡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영화 속 사실과 허구 앞에서 좀 더 믿고 싶은 이야기는 허구라는 것이 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해소할 길 없는 답답함과는 별개로 <그때 그사람들>(임상수, 2005)이나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2020)이 연출한 10.26사태 이후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그렸다는 지점에서 한국의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조명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시도로 여겨집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극 중 이태신(정우성)은 모티브로 삼고 있는 실존인물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인물은 직위나 이름, 외모적 유사함을 통해 누군지 알 아볼 수 있었는데, ‘이태신’은 이름도 생소할 뿐 아니라, 거의 완벽한 남성상에 가까운 캐릭터였기 때문이죠. 인터뷰에 따르면 정우성이 분한 이태신은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과 유사성이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감독의 상상력이 가미된 캐릭터로 설명됩니다.
이태신이 실제 인물같지 않았던 첫 번째 장면은 행주대교를 진입한 2공수를 혈혈단신 혼자의 몸으로 막아냈던 부분이었습니다. 한강을 건너는 순간 정권이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그는 홀로 탱크 앞을 가로 막아섰지요. 무모해보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곧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수도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투영된 모습이지요. 그런데 그가 트럭을 향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을 때 그의 속마음이 들립니다.
‘돌아가라, 제발 돌아가라’
아무리 굳건한 책임감과 의지로 똘똘뭉친 사람이라도 모든 일에 결과를 알고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방법 안에서 해보는 것이겠지요. 이 방법이 통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영화 말미에 이태신은 마지막 전면전을 위해 수경사 야포단를 준비시키고 가동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을 동원해 신군부에게 투항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립니다. 그러나 신군부에게 발각된 국방부장관은 방송을 통해 이태신 수도사령관의 직위가 해제되었음을 공포했고, 이에 전두광은 더 이상 자신을 맞설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승리감이 그를 휘감기 시작했지요. 한편 마지막 진압작전 코 앞에서 직위 해제라는 허망한 말 한마디에 이태신은 장갑차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곤 부하직원들에게 이제는 따라오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바리게이드를 하나하나 넘어가기 시작하지요. 가시철망에 옷이 걸리고 찢기고 넘어져도 이태신은 오직 전두광만을 응시하며 계속해서 돌진하고, 카메라는 그의 전신을 로우앵글로 찍으며 그의 걸음걸음을 보여줍니다. 김성수 감독은 전두광과 이태신의 마지막 대립장면에서 무엇을 의도하며 이태신 장군이 바리게이드를 넘어가는 장면을 연출했을까요? 극 중 이태신을 분한 정우성이 아무리 긴 다리를 가지고 있다 한들 두텁게 배치한 철조망이 뒤엉켜 있는 바리케이드를 넘고 넘는 모습은 절대 폼나지 않는 장면인데 말입니다.
직위가 해제되고 난 이태신은 이제 어떤 자격이나 명분, 혹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직원이나 첨단무기 같은 것이 아닌, 그저 이 나라의 한 국민이자 인간으로서 전두광에 대한 항거로 읽을 수 있게 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는 이태신이 오직 눈빛 으로 의지를 보여주며 헤쳐가는 모습은 도의를 잃고 오직 자신의 신변을 위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무리에 굴하지 않는 정신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승리감에 취해 전두광을 태우러 온 노태건과 무리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걸어 들어가겠다는 전두광의 옆모습에는 어렴풋한 혼란스러움이 서려 있습니다. 그의 승리가 정당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곳은 화장실뿐이었지요.
감독은 관객들이 이미 그 결론을 아는 <서울의 봄>을 보면서 하나회와 전두광의 비열하고 야비한 모습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금치 못할 것을 알았을 테지요. 육군 본부 지휘관들의 안일한 자세와 사태 파악의 아둔함에 답답해할 것도 예상했을 겁니다. 아마도 감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날의 9시간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우리 역사가 기억하지 못해왔던 군인의 참모습을 보여줬던 개인들을 조명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무엇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태신으로 분한 정우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2023년 지금도 변함없이 필요한 그 정신 말이지요.
글 : 박일아
편집디자인 : 강원중
2023.12.17.토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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