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밀플뢰르]
<햄넷>(클로이 자오, 2026) : 이야기와 현실
햄넷과 햄릿은 사실 같은 이름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트랫퍼드의 기록 문서에서는 완전히 혼용되었다.
- 스티븐 그린블랫(Stephan Greenblatt), The Death of Hamnet and the Making of Hamlet.
1596년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Hamnet)은 세상을 떠나고, 1601년 『햄릿』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저 문구는 셰익스피어의 오랜 연구자였던 스티븐 그린블랫이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글로, 신뢰하는 것이 좋아 보여요. 영화는 『햄릿』이 셰익스피어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애도하며 집필한 비극이라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햄릿』을 따져가며 어느 부분이 그의 슬픔을 반영하는지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 제 관심은, 그가 아픔을 서사화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1596년에서 1601년까지의 6년은 서사가 되기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적 거리였을까요? 혹은 그 통각을 끝내 견디지 못해서 서사로 만들 수밖에 없던 것일까요. 심연처럼 아득해서 짐작할 수 없는 그의 내면을 우리도 상상할 수 있도록, 클로이 자오는 <햄넷>을 만들었습니다. (<햄넷>의 원작인 소설 『햄닛』의 작가인 매기 오패럴도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로 이름을 올렸네요.)


[사진 1] 『햄닛』의 표지와 <햄넷>의 포스터
그렇다고 셰익스피어(이하 ‘윌’)만 강조되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짚어야 해요. 햄넷을 잃은 아픔은 그의 아내 앤 해서웨이(극중 이름은 ‘아녜스’)에게도 동일한 통각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영화의 주요인물은 햄넷의 부모인 윌(폴 메스칼)과 아녜스(제시 버클리)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실제로도 8살의 나이차이가 있었다고 하죠? 신분과 문화, 성격, 삶 앞에서 보이는 태도와 같은 많은 지점에서 둘은 차이를 보입니다. 저는 그것을 신화와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컨대 아녜스가 신화적인 인물이라면 윌은 이야기적 인간입니다.
아녜스는 등장부터 신화적 존재처럼 보여요. 영화의 첫 장면은 아녜스가 숲 속에서 웅크린 모습을 담습니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놓은 이 모습은 어머니 뱃속 태아처럼 보이네요. 그녀를 향해 세상은 이런 별명을 붙여주었죠. ‘숲속 마녀의 딸’. 아네스가 어둡고 음침한 숲에서 자주 지낸다고 그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별명은 절반의 진실처럼 보여요. 그녀는 “난 엄마의 딸이야”라고 강변하거니와, 그것 역시 사실임이 틀림없지만, 첫 장면은 그녀의 기원이 숲(자연)임을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숲의 딸’ 답게 그녀는 쑥과 질경이로 세상의 역병과 악독에 저항합니다. (“기억하라 쑥이여, 네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세상의 악과 불행에 저항한다.”) 살갗에 상처가 났다면 쑥을 붙이고, 속에서 앓는다면 그것을 달여 먹으며 질병에 대항하는 것이죠.
그와 관련해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녜스는 주도적이고 독립적이며, 자립적입니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녀는 윌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윌이 유약해보인다며 마뜩잖아 하는 동생 바르톨로뮤(조 앨윈)에게는 ‘자신이 본 남자 중 지금까지 보지 못한 대단한 것을 품고 있다’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하며 안심시키죠. 그리고 아녜스는 출산의 땅으로 숲을 택합니다. 자신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곳 말이에요. 하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녀조차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쑥 닥쳐온 죽음과 같은 운명입니다.
![[사진 2] <햄넷>(클로이 자오, 2026)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3/1773973247073599.jpeg)
죽음은 처음엔 주디스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숲에서 난 약초들을 동원해도 갑작스럽게 불덩이가 된 주디스의 몸은 열이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다음날 정작 죽음의 낫에 베인 사람은 햄넷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 극중 인물들은 의아함과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지만, 관객은 압니다. 용감한 어린 햄넷이, 주디스와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서 죽음이 데려갈 사람을 속인 것이라고요. 죽음 앞에서의 당당함과 용감함은 엄마를 꼭 닮은 것 같아요.
아녜스는 죽음이 주디스, 햄넷을 데려가지 못하게 안간힘을 다합니다. 가문 대대로 의지해왔던 신화적인 힘들에 의지하기도 했죠. 하지만 죽음 앞에서 쑥과 질경이─자녀를 살리기 위한 발버둥─는 무력하기만 하네요. 햄넷의 죽음 이후 주디스가 극도의 우울감에 빠진 것은 단지 자녀를 잃은 슬픔만이 아니라 그녀가 지금껏 신뢰했던 힘이 정작 필요할 때 자신을 외면했다는 배신감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녀를 지탱하던 세계 자체가 그 속에서 아예 붕괴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떤 가혹한 단절이 그렇듯,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요.
죽음 앞에서 무력한 것은 신화만이 아니라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런던에 있느라 기박한 사태의 현장에 이틀이 지나서야 온 윌은 생과 사를 오가던 주디스와 햄넷을 살리는 데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죠. 다만 그는 사후적으로 세마포에 싸인 햄넷의 시신을 멍하게 볼 따름입니다. 아녜스는 그런 윌에게 참지 못하고 책망합니다. “당신은 머릿속 세계에 사로잡혀 있어. 그것이 현실이지.” 이야기는 아녜스의 말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윌이 머물던 런던과 아녜스의 스트랫퍼드처럼 현실과 이야기의 거리는 이렇게나 머네요.
![[사진 3] <햄넷>(클로이 자오, 2026)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3/1773973322556849.jpeg)
그러나 제게 <햄넷>은 이야기에도 효능이 있다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바꾸는 권능이 아니라 그럭저럭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에요. 아들의 이름을 딴 비극의 제목이 그렇거니와 윌의 연극 『햄릿』은 많은 것들이 그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것임을 눈치채기 어렵지 않습니다. 극의 배경이 되던 빼곡한 나무들, 거기 작게 그려진 붉은 열매(아녜스가 극중 내내 입었던 붉은 옷을 상기시키죠.) 겉보기에 죽은 선왕을 위한 복수를 외치는 것 같지만 정작 깊은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햄릿까지. 처음 아녜스는 이 연극이 아들을 모욕하는 것 같다며 거부감을 보입니다. 하지만 극중 유령으로 나온 윌과 햄넷의 외모를 꼭 닮은 주연배우 햄릿을 보곤 그녀는 마음을 열어요. 이야기에서 현실을 힐끗 봤기 때문일까요?
『햄릿』의 마지막, 햄릿은 독백합니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으로 우리의 정신과 육신이 겪는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말이다. 단검 하나로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없는데 누가 이 짐을 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갈 것이냐. 어떤 자도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땅.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견디게 한다.” 이 독백은 아들의 죽음을 견디던 아버지 윌의 심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녜스는 모르지 않습니다. 쓰러지는 햄릿의 얼굴을 향해 그녀는 연극과 객석의 경계를 뚫고 손을 뻗습니다. 그녀는 그순간 배우에게서 아들 햄넷을 본 걸까요. 현실과 이야기의 벽은 이렇게 무너지고, 아녜스는 그제야 최초의 미소를 짓습니다.
![[사진 4] <햄넷>(클로이 자오, 2026)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3/1773973358710632.jpeg)
이 장면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죽은 아들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죽음을 살아있게 만들 수는 있다고요. 그것이 허구라서 거짓인가요. 그러나 그 허구 안에 진실이 있습니다. 햄넷은 죽었지만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햄릿으로 인해 햄넷은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또다른 효능이기도 하죠. 삶의 필멸을 막아설 수는 없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러니 우리는 기억하자고. 소설 속 윌의 이런 대사처럼요.
그애가 어디에 있는지 늘 궁금해. 얘가 어디로 갔을까. 머릿속에서 바퀴 하나가 쉴새없이 도는 느낌이야. 무슨 일을 하던 중이든, 어디에 있든, 생각하는 거야.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지? 그냥 사라져버릴 수는 없으니까. 어딘가에 있어야 하잖아. 내가 찾아내기만 하면 돼.
그애가 어디에 있는지 늘 궁금해. 얘가 어디로 갔을까. 머릿속에서 바퀴 하나가 쉴새없이 도는 느낌이야. 무슨 일을 하던 중이든, 어디에 있든, 생각하는 거야.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지? 그냥 사라져버릴 수는 없으니까. 어딘가에 있어야 하잖아. 내가 찾아내기만 하면 돼.
- 매기 오패럴, 『햄닛』, 홍한별 옮김, 문학동네, 2020, 424쪽.
*밀플뢰르(millefleurs)는 직역하면 ‘천 송이의 꽃’인데요. 14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 프랑스에서 융성했던 직조 방식으로, 벽걸이 양탄자에 작은 꽃들을 촘촘하게 배치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 영화를 보며 떠오른 사유와 정동과, 기독교적 필터를 거친 해석을 한계없이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코너명에 담겼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글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3월 21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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