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베란다, 맥주
스물아홉, 빚을 내서 여행을 갔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럴 형편도 안 됐는데 얼떨결에 공항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모든 게 서른을 앞두고 갑자기 결정되었다. 친구 A는 곧 결혼할 예정이었고, 친구 B는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서른이 넘으면 다 같이 여행가는 게 불가능할 거라며, 무조건 가야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여행경비까지 빌려준다는 친구의 말이 결정타였다. 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비행기 예약이며 숙소 예약까지 착착 진행되었고, 여행 당일이 되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들뜬 친구들과 달리 나는 우울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야 친구에게 빌린 돈이 얼마나 큰 돈 인지 실감됐다. ‘이걸 언제 다 갚지?’ 텅텅 빈 통장잔고만 떠올랐다. 오사카에 도착하고서야 조금 기운이 났다. 한 번도 온 적 없는 낯선 도시의 감각이 나를 자극했다. ‘그래, 기왕 온 여행 즐겁게 즐기자.’ 하지만 여행이 항상 그렇듯 시작부터 삐끗거렸다.
가고 싶은 장소, 먹고 싶은 음식, 쉬고 싶은 시간 등등. 네 명의 의견이 달랐기에 여행 내내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겼다. 아니 처음부터 이 여행이 내키지 않은 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친구에게 빌린 돈은 먹구름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니 어떤 일에든 시큰둥했고, 친구들 말은 뭐든지 비꽜고, 여행 내내 혼자 겉 돌았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즐겼던 시간은 밤이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몸을 씻고 마시는 맥주 한 캔. 우리가 묵었던 3층 숙소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한 구석에 세탁기가 있고, 천장에는 빨랫줄이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난간에 서면 다른 집의 지붕이 내려다 보였다. 멀리 빌딩숲이 보였고, 그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벽과 바닥은 낡아서 곳곳에 균열이 갔고, 화분 하나 없는 휑한 공간이었다. 수많은 일본영화를 보며 베란다 로망을 키웠던 내 눈에는 그 장소가 꿈만 같았다.
매일 밤 그 베란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맥주를 마셨다. 친구 A는 넓은 방을 놔두고 왜 밖에서 술을 마시냐고 타박했지만(A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베란다에 앉아야만 보이는 밤풍경과 시원한 밤공기가 좋았다. 일본의 여름은 끈적끈적하게 무더웠다. 맥주가 한 캔, 두 캔 비어지면 밤하늘이 밤바다가 되었다. 파도가 부드럽게 넘실거리고 발 사이에 묻은 모래 알갱이는 서걱거렸다. 바닷바람이 끝없이 불어 와 한 밤의 무더위를 식혀 주었다. 우린 파도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이 순간만은 친구와의 서먹함, 돌아가서 마주할 일상, 불안한 미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그 장소의 기억이 첫 책 <나라의 숲에는>을 그리게 했다. 만화는 친구 네 명의 여행이야기지만, 나에겐 배경이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교토 거리의 낮은 목조주택들, 나라의 오래된 숲, 온천을 하고 나와 걸었던 강가 도로, 오사카 항구의 대 관람차. 우연히 만난 사소한 풍경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던 나를 포근하게 감싸줬다. 어떤 장소에는 기운이 깃든다고 생각한다. 그 곳에서만 느껴지는 공기와 감각,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과 감정을 온전히 만화에 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삐딱했을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돈까지 빌려줬는데) 그럼에도 그 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을 거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만 했던 스물아홉. 친구들은 회사에 취직해서 경력을 쌓고 결혼도 하는데 나는 모아 놓은 돈 하나 없이 엄마한테 얹혀서 만화만 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만화를 그려야 할지, 만화가가 될 수 있긴 한 건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못한 채 나이만 먹는 게 두렵고 막막했다.
살다보면 경계에 서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서른’이란 나이가 그랬다. 나는 ‘서른’이란 숫자에 너무 많은 미래를 우겨 넣고 빨리 답을 찾고 싶었다. 과거로도 미래로도 가고 싶지 않았던 나. 친구들의 변화를 애써 무시하며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다. 왜 그대로일 수 없는 지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베란다에 앉아 있던 것 같다. 경계에 서 있기가 힘겨워 잠시 주저앉았던 것 같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그 곳에 앉아 환하게 밝혀진 방과 깜깜한 밤거리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별 거 없는 시시한 대화를 했다. 그 순간만은 어떤 선택도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 시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는 걸.
같이 여행을 갔던 친구들은 서른이 되자 몇 년 차이로 결혼을 했다. 또 몇 년 차이로 아이를 하나, 둘 낳았다. 이제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고,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일도 드물다. 아이와 하루 종일 투닥거리다보면 한 달이, 일 년이 금세 지나갔다. 베란다에 앉아 웃고 떠들던 우린 이런 삶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마 말도 안 된다고,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한바탕 웃지 않았을까.
지금 나는 식탁에 마주 앉은 남편과 맥주를 마신다. 아이들은 자꾸 옆에 와서 뭘 해달라고 보채고, 이것저것 해주다보면 맥주는 미지근하게 식는다. 편하게 맥주 한 캔 마시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 몰랐다.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를 일주일에 한 번 아껴 마시게 될 줄도 몰랐다. 몸은 자주 아프고, 마음은 종종 너덜해진다. 마흔이 된 나는 다시 경계 위에 서 있는 걸까?
미지근한 맥주를 마저 마신다. 팔에 닿는 밤바람이 시원한 걸 보면 벌써 여름인 듯 하다. 5월이 봄이 아니고 여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젠 계절도 달라진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떤 변화들은 되돌릴 수가 없다. 마흔을 맞는 일도 낯설고 두렵지만 서른처럼 조급해지진 않는다. 때론 경계에 서야만 나를 볼 수 있다. 그 여행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풍경들. 그 풍경은 내 안에 깊게 뿌리를 내려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다. 너무 애쓰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내 뒤엔 환히 빛나는 따뜻한 방이 있고, 내 옆에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으니까. 깜깜한 미래에 발을 딛기만 하면 삶은 다시 흘러갈 거야.
나의 스물아홉은 언제나 싱그러운 여름 한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마사오카 시키의 하이쿠를 빌려 그 밤을 떠올린다.
“사람 쉬었다 가는 여름, 베란다에서 맥주 한 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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