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4. 어른들을 위한 동화

Issue 4. 어른들을 위한 동화 

픽사는 영향력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 한 곳으로 현재는 디즈니의 자회사이지만 원래는 그래픽 작업이 가능한 컴퓨터를 개발하는 독자적 기업이었습니다. 픽사는 실사 촬영 장면을 디지털화하고 VFX를 입힐 수 있는 맞춤형 컴퓨터를 개발하는 부서와 개발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부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자금 사정으로 컴퓨터 부서를 스티브 잡스에게 매각하면서 픽사의 기틀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잡스가 운영한 픽사의 주요 영역 역시 처음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은 아니었어요. 주는 그래픽 컴퓨터 판매였고, 애니메이션은 어디까지나 개발한 제품 홍보를 위한 영역에 불과했습니다. ‘픽사 = 애니메이션’ 단초는 홍보용으로 제작한 단편 <룩소 주니어>가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르게 된 이후입니다. 이 일로 잡스는 기술과 예술이 하나로 합쳐진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어 매년 수익과는 별개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픽사 = 애니메이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답니다.

참고로 룩소 주니어는 현재 픽사의 상징이자 마스코트인 전기스탠드 캐릭터에요. 영화 시작 전 PIXAR의 알파벳 위를 뛰어다니다 ‘I’를 깔아뭉개고 그 자리에 우뚝 서는 녀석이 룩소 주니어랍니다.😄 잡스의 지원과는 별개로 픽사는 꽤 오랫동안 재정난에 시달렸어요. 재정난 극복을 위해 디즈니와 몇 편의 영화 제작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탄생한 영화가 <토이스토리>입니다. 지금도 픽사 하면 가장 먼저 <토이스토리>를 떠올리는 분들이 있을 만큼 픽사가 제작사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은 단연 <토이스토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며 재정난을 극복하고 디즈니와도 결별, 독자적인 제작사로 도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디즈니가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면서 픽사와 지분을 맞교환하는 형태로 픽사를 인수하여 지금의 디즈니/픽사 구조가 완성됐습니다.

픽사의 작품은 관객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의 평도 좋습니다. 이는 픽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가 탄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픽사의 스토리는 픽사 스튜디오 안 ‘스토리 룸’이라는 방에서 탄생한다고 합니다. 스토리 룸 안에서 이루어지는 회의를 지칭하는 ‘개그 세션’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발언하며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거죠.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유롭게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픽사만의 창의적인 스토리의 근원인 셈이죠. 기술과 예술 사이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길을 잘 찾아왔기에 지금의 픽사가 존재하고, 아카데미 수상작을 10편이나 만들 수 있었겠죠.

<라따뚜이 (Ratatouille)>, 브래드 버드, 2007년 개봉

절대 미각에 빠른 손놀림까지 겸비한 레미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요리사 구스토를 보며 요리사의 꿈을 키웁니다. 문제가 있다면 레미는 생쥐라는 거죠. 어느 날 범람한 하수구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레미는 운명처럼 구스토의 레스토랑 앞에 떨어집니다. 생쥐 신분으로 주방은 꿈도 꿀 수 없지만 향긋한 허브 향에 이끌려 요리혼이 불타오른 레미는 결국 금단의 영역이었던 주방에 몰래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요리에 재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견습생 링귀니를 마주칩니다. 그러나 해고 위기에 처했던 링귀니는 레미가 요리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보고 서로 의기투합 하기로 합니다. 과연 레니와 링귀니의 공생공사 프로젝트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까요?

쥐와 요리라는 상극의 소재를 이토록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는 건 픽사이기에 가능하겠죠?😊 영화에서 레미는 햄스터를 닮은 귀여운 쥐가 아니라 실제로 보면 기겁할 회색빛의 시궁창 쥐입니다. 그런데 요리에 대한 열정을 쏟아내는 레미를 보고 있으면 구스토의 가르침이기도 한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Tout le monde peut cuisiner)’는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요리와의 조합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쥐임에도 불구하고 레미가 한 요리는 정말로 맛있을 것 같거든요. 영화의 제목인 라따뚜이는 채소를 겹겹이 쌓아 만드는 프랑스 가정식 요리입니다. 남프랑스 산 가지인 주키니와 호박, 양파, 토마토, 마늘, 당근 등 제철 야채를 겹겹이 쌓아 올리브 오일을 두른 후 프라이팬에서 뭉근히 익힌 후 뜨겁게 혹은 식혀서 차갑게 먹습니다. 원래는 ‘야채를 대충 섞어 익힌 잡탕’이라는 의미의 요리로 맛없는 음식의 대명사로 통하며 천대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흥행을 거두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인기 없던 요리를 단숨에 메뉴판 상단에 올릴 만큼 <라따뚜이>는 픽사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이자 호평받은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개봉 당시 100만을 넘겼다고 해요. 세상에서 결코 인정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요리사 레미를 주인공으로 ‘세상은 과연 작은 이들의 재능에도 친절할 수 있는가?’를 따뜻하게 그려냈습니다. 모두에게 로망의 도시인 파리를 아름답게 담아낸 그래픽도 영화가 사랑받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라따뚜이>는 애니메이션이지만 동시에 요리 영화이기도 한데 프랑스 식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로 프랑스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제작진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파리로 날아가 일주일 정도 생활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배경을 그리고, 최고급 레스토랑의 요리를 맛보면서요. 직접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어 보면서 요리사들의 섬세한 행동을 관찰한 후 캐릭터에 반영했고 이는 CG 작업을 통해 사실적으로 구현됐습니다. 파리가 배경이고 프랑스 요리를 다룬 영화이기도 한만큼 영어 더빙이 프랑스어식 억양으로 되어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영어 더빙 버전보다 프랑스어 더빙 버전으로 감상하기를 추천합니다.

까칠하고 때로는 독선적으로 보이는 요리 비평가 안톤 이고가 레미가 만들어준 라따뚜이를 먹고 남긴 비평문의 한 구절입니다. 픽사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잘 담겨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대체로 세상은 새로운 것에 불친절하지만 사람들의 편견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본인에게 달려있으니까요. 레미가 그랬던 것처럼.

<업 (UP)>, 피트 닥터 , 2009년 개봉

칼은 아내와 사별 후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집에 집착하며 고약한 성질의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함께 앙헬 폭포 보기를 소망했던 아내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칼은 수천 개의 풍선을 매달아 집을 통째로 남아메리카로 날려 버립니다. 그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 꼬마 탐험가 러셀이 예기치 않게 칼의 모험에 동행하게 됩니다. 세상 어울리지 않는 칼과 러셀이 함께하는 모험은 끝은 어떻게 될까요?

<업>은 <라따뚜이>에 이어 픽사의 전성기를 이어간 작품입니다. 2009년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고, 다음 해 영국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 장편 애니메이션과 음악상을 받았습니다. 아카데미에서는 최우수 작품상 후부로도 노미네이트 되었는데 이는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 이후 20년 만에 애니메이션이 노미네이트 된 것이라고 합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칼 할아버지의 집은 실제 집을 배경으로 설정됐어요. 이디스 메이스필드라는 할머니가 살던 집이 그 주인공으로 할머니의 집을 허물고 대형 쇼핑몰을 지을 계획으로 건설사 책임자가 찾아와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했음에도 할머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추억이 서려 있는 집을 파는 것을 끝끝내 거절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사연을 들은 책임자는 할머니 집을 그대로 두고 쇼핑몰 공사를 진행하자고 설득하고, 완공 후에도 할머니를 극진히 모셨고요. <업>은 실제 집과 집에 얽힌 이야기가 영화의 모티브가 된 거죠.😄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건설사 책임자에게 유산으로 집을 남겼고, 집을 처분하면서 새로운 소유자를 거쳐 경매에 부쳐졌다 지금은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마을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해요. 2013년부터는 할머니 이름을 딴 메이스필드 음악 축제도 열고 있고요.

픽사는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만드는 제작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업>이야말로 이 수식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평생의 꿈을 포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좋았던 시절의 기억에만 매몰되어 다가오는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께 전달합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현재의 지친 삶이 잠시 머물 쉼터가 될 수는 있지만,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기쁨과 추억을 발견하는 것까지 가로막아서는 안 되겠죠. <업>을 연출한 감독 피트 닥터의 말처럼 “모험 정신은 저 바깥에 있을 수도 있지만, 밖에 나가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만이 모험은 아니며, 지금 여기에서 매일 펼쳐지는 우리의 일상 또한 모험”이니까요.

<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5분 남짓한 오프닝 시퀀스를 고를 것 같습니다. 픽사가 남긴 전설의 오프닝 시퀀스이자 관객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저는 이 장면으로 픽사는 단순히 그래픽 기술만 뛰어난 제작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님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만이 구현할 수 있는 마술인 ‘시간의 압축’을 가장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뭉클함을 선사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요? 저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Epilogue

디즈니가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를 잘 만든다면 픽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평론가들에게도 우수한 평을 받는 편이고요. 픽사의 작품은 사회 통념을 깨부수는 신선한 주제로 고정관념이나 클리셰를 부정하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그려지는 경우는 드물어요. 대신 주인공 스스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는 것이 픽사 작품만의 특징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평범하거나 때로는 부족한 부분이 더 많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따뚜이>에서는 주인공이 요리사를 꿈꾸는 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깨우치는 것이 인생은 마냥 아름답기만 한 동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신 각자의 동화 속 결말은 스스로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픽사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요. 저는 이러한 요소들이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용기를 주기에 픽사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 전문 제작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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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와 디즈니의 공통점은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는 사실 말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주옥같은 사운드트랙! 픽사의 작품도 디즈니 못지않게 두고두고 듣고 싶은 좋은 음악들이 참 많은데요. 그중 발행인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한국에서는 요리 프로그램의 BGM으로 자주 들어봤을 ‘Camille – Le Festin’을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샹송 중 한 곡이기도 합니다. 번역된 가사를 찾아보시면 은유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철학적인 면모도 담겨 있답니다. 가사가 참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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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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