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52. 세상을 바꾼 변화

세상을 바꾼 변화

MBTI를 믿지 않지만,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간파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요. 정리 강박에 가까운 J성향을 들켰을 때와 끊임없이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N성향이 들켰을 때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주 하던 공상 중 하나는 ‘만약 천재로 태어났다면, 나는 세상을 바꿀만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인데요. 평범 조차 쉽지 않은 이의 공상 치고는 터무니없지만😂 비범한 이들의 업적을 돌아보며 이들의 성취 이면에 가려진 인간적 고뇌에 공감하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이번에 소개할 2편의 영화는 모처럼 저의 공상에 다시 불을 지핀, 비범한 능력으로 세상을 바꾼 변화를 이룩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미테이션 게임>과 <히든 피겨스>입니다.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모튼 틸덤, 2014년 개봉

<이미테이션 게임>은 실존 인물인 앨런 튜링의 실화를 바탕으로 나치 독일의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는 실존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고증을 토대로 한 전기 영화의 방식보다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깨우치며 변화하는 과정에 집중했는데요. 이를 통해 앨런 튜링의 내면과 성정체성에서 비롯된 비극적 운명을 그의 천재적인 면모와 함께 균형 있게 담아내 호평받았습니다. 영화는 개봉 당시 아카데미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앨런 튜링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로 현대 컴퓨터과학을 정립한 인물인데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에니그마 해독에 성공해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종전 후에도 초기 컴퓨터 개발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인공지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요. (당시 논문에서는 AI의 광범위한 사용을 예측하기도 했다고 해요.😲) 앨런 튜링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알고리즘과 계산 개념을 ‘튜링 기계’라는 추상 모델을 통해 형식화하여 컴퓨터과학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앨런 튜링 역을 맡아 그의 천재적인 면모와 함께 이면에 가려져 있던 고독함을 섬세하게 표현해 호평받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튜링 테스트(Turing test)’로 불리는 시험을 말하는데요. ‘기계의 인공지능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앨런 튜링이 제안한 것으로 컴퓨터가 지능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시험’입니다.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는 인간이 인간과 유사하게 반응하는 기계와 자연어로 소통했을 때 상대가 기계인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으면 기계도 지능이 있다고 보는 것을 합격 기준’으로 삼는데요. 기계에 해당하는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대화할 수 있다면 결국 기계도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다고 보고 대화 이외에도 연산, 시각 및 청각 기능 등 난이도를 높여가며 테스트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튜링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한 컴퓨터는 개발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머지않아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는 기계가 나올 것만 같은 건 제 착각일까요?🥹

매 순간 3명이 죽어 나가는 사상 최악의 위기에 처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나치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로 인해 연합군은 매번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연합군은 고심 끝에 각 분야의 수재들을 모아 기밀 프로젝트의 일환인 에니그마 해독팀을 만듭니다.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은 암호 해독팀에 지원해 에니그마 해독을 위한 특별한 기계를 발명합니다. 하지만 독단적인 그의 성격은 팀원들과 불화를 야기하고 그의 기계는 24시간마다 바뀌는 에니그마 체계를 뛰어넘지 못해 번번이 좌절합니다. 과연 앨런 튜링과 그의 암호 해독팀은 에니그마 해독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앨런 튜링의 업적이나 천재적인 면모보다는 사회성 없고 독단적이었던 앨런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동료들과 가까워지며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조금 더 집중하는데요. 저는 그의 인간적인 면에 집중하는 방식이 그의 비범함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발명하고자 하는 기계와 앨런이 닮아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앨런이 자신의 기계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동료들에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설득할 수 있게 되는 변화하는 과정이 기계가 에니그마를 마침내 해독해 낼 수 있게 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앨런이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친구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특이하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다는 앨런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남들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았던 앨런이 결국에는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크리스토퍼의 대사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데요. 그의 업적과는 별개로 불행했던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면 “당신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었다”는 조안의 대사 역시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이미테이션 게임>이 명작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비범함에 우월감을 부여하지 않고, 타고난 천재성을 인간적인 시선에서 그렸다는 점이 아닐까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데오도르 멜피, 2016년 개봉

<히든 피겨스>는 1962년 미국 나사에서 우주 임무 그룹을 맡았던 흑인 여성 3인방의 실화를 다룬 작품으로 마고 셰털리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마고는 어린 시절부터 나사 출신 아버지에게서 과학자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는데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아카이브를 토대로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의 업적을 발견하고 그녀들의 이야기에 집중한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는 작품성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성공했는데요.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각색상,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 위주였던 나사의 역사를 새롭게 그렸다는 점에서 좋은 평을 받는데요. 미국 최초의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흑인 여성 3인방의 이야기를 양지로 꺼내 제목 그대로 ‘숨은 공로자’들을 세상에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최초’가 되기 위해 이들이 겪어야 했던 불합리한 차별을 오로지 그녀들의 능력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감정보다 이성에 집중해 긍정적이고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영화에 등장한 우주 임무는 ‘머큐리 계획(Project Mercury)’으로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된 미국의 첫 유인 우주 계획인데요. 냉전 당시 우주 경쟁에서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미국보다 먼저 우주로 나가면서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낸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후 머큐리 프로젝트가 조금씩 발전해 아폴로 프로젝트가 되었고 결국 미국이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타고 태어난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나사에 근무하는 흑인 전산원들의 리더이자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흑인 여성 최초로 나사 엔지니어를 꿈꾸는 메리 잭슨. 미국과 러시아의 치열한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냉전 시기, 천재의 두뇌와 재능을 타고난 3명의 흑인 여성은 나사 최초의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선발되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사회적 편견과 따가운 시선에 점점 지쳐 갑니다. 한편,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는 예상치 못한 난항에 부딪히고 해결책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수학 공식을 찾아내는 것뿐인데요. 과연 캐서린과 도로시 그리고 메리는 사회적 편견과 한계를 뛰어넘어 미국 항공 우주 역사상 ‘최초’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을까요?

영화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한창 심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인종차별을 비롯해 성 차별에 대한 내용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데요. 기존의 인종차별을 다루는 영화들과는 궤를 조금 달리 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에 집중하기보다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사회적 편견과 차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 방식은 영화를 한층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데요. 개인적으로 <그린북>과 함께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히든 피겨스>에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실력으로 극복한 세 명의 주인공들 만큼 기억에 남았던 것이 하나 더 있는데요.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머큐리 프로젝트의 책임자 알 해리슨입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전설의(?) 화장실 신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조차 어렵게 만드는 관습과 제도에 울분을 토하는 캐서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기관의 책임자로서 몸소 변화를 실천하던 모습과 유색인종 화장실 간판을 때려 부수고 남긴 대사는 손에 꼽힐 만한 명대사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세 여성이 자신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게 되는 결말이 관객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 아닐까요.

Epilogue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열차의 도착(The Arrival of a Train)>, 뤼미에르 형제, 1896년 & <달세계 여행(A Trip to the Moon)>, 조르주 멜리에스, 1902년

함께 보기 좋은 추천 콘텐츠는 영화계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열차의 도착>과 <달세계 여행>입니다. <열차의 도착>은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이자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엄밀히 따지면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최초의 영화로 불리는 이유는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이 드라마틱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사실 영화라고 하기에는 40초 남짓한 길이에 열차가 시오타 역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전부인데요. 이전 작품들 역시 4-50초 길이에 주변 환경을 ‘키네스코프’로 촬영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이 최초의 영화로서 의의를 가지는 것은 ‘일종의 다큐멘터리로서 세상을 기록해서 보여주었기 때문’인데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정립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세계 여행>은 조르주 멜리에스의 작품으로 최초의 SF영화로 불리는데요.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으로 당시의 2분 남짓한 길이의 영화들과 달리 러닝타임이 14분이나 됩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특수효과라고 할 수 있는 촬영 기법과 후반 작업에 해당하는 편집기법들을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지금의 프로덕션 방식에 해당하는 제작방식을 따랐는데요. 무대, 의상, 메이크업, 특수효과 등이 사전에 준비된 스튜디오에서 연극적 요소를 가미해 촬영함으로써 당시 카메라 기술이 가진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 Reference (씨네아카이브 참고자료 출처 표기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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