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

앨런 튜링, 그리고 의식이라는 수수께끼

함께 읽는 영국 장르 문학, 『클라라와 태양』마지막 이야기

2026.10.18 | 조회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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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950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일하던 한 수학자가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제목은 「컴퓨팅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그 첫머리에는 훗날 오래도록 되풀이될 질문이 놓여 있었다.

“기계 생각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었다. 그는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를 정의하는 대신, 질문을 조금 다른 자리로 옮겨놓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유의 실체를 붙잡으려 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지능을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제안한 것이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 곧 모방 게임이었다. 오늘날 튜링 테스트라 불리는 발상의 바탕이 된 실험이었다.

그 구상을 오늘날 익숙한 형태로 풀어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두 상대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쪽은 인간이고, 다른 한쪽은 기계다. 얼굴을 마주할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오직 글로 오가는 문답에 기대어, 어느 쪽이 인간인지 가려내야 한다. 대화가 이어져도 끝내 둘을 구별할 수 없다면, 기계의 지능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튜링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물음을 구체적인 실험의 장면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 논문은 훗날 인공지능 연구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그 의미는 기계의 능력을 시험할 방법을 제안했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다른 존재에게 지능이 있다고 믿는지를 함께 묻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그가 건네는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안에서도 생각이 흐르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기계가 들려주는 말 앞에서는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할까. 튜링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과 ‘실제로 생각하는 일’ 사이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그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지, 우리에게 그것을 가려낼 방법이 있는지를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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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 질문자 C는 글로 주고받는 문답만을 바탕으로 A와 B 중 누가 컴퓨터이고 누가 인간인지 가려내야 한다. 출처: Juan Alberto Sánchez Margallo - File:Test_de_Turing.jpg, CC BY 2.5

 

***

 

튜링이 그 논문을 쓴 것은 전쟁이 끝난 지 불과 5년이 지난 뒤였다.

그가 수학자로서의 토대를 다진 곳은 케임브리지였다. 193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수학을 공부했고, 1934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듬해에는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킹스 칼리지의 펠로로 선출되었다. 수와 논리의 세계를 탐구하던 젊은 수학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감춰놓은 언어를 풀어내는 일에 자신의 지성을 바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영국 버킹엄셔의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서 일했다. 수학자와 언어학자, 체스의 고수들이 모여든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는 또 하나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나치 독일의 암호 기계, 에니그마(Enigma)였다. 방대한 설정 조합과 날마다 바뀌는 암호 체계 너머에, 전선의 움직임과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감춰져 있었다.

튜링과 동료들은 그 견고한 장벽을 허물 방법을 찾았다. 전쟁 전 폴란드 암호학자들이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튜링은 암호 해독을 돕는 전기기계식 장치 봄브(Bombe)를 구상했다. 여기에 고든 웰치먼의 중요한 개선이 더해졌다. 봄브는 가능한 설정을 검토하며 모순되는 경우를 빠르게 걸러냈고, 사람들은 그렇게 좁혀진 가능성 속에서 암호를 풀어갔다. 해독 불가능해 보이던 문장들이 조금씩 뜻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블레츨리 파크의 성과가 전쟁을 얼마나 앞당겨 끝냈는지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그곳에서 읽어낸 정보가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하고, 수많은 생명을 지키는 데 쓰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암호문 사이에서 찾아낸 단서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살아 돌아갈 기회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튜링의 사유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영국 국립물리연구소에서 전자식 컴퓨터를 설계했고, 1948년 맨체스터 대학교로 옮겨 초기 컴퓨터 연구를 이어갔다. 기계가 지능을 가질 수 있는지 물었으며, 생명체의 무늬와 형태가 생겨나는 원리를 수학으로 설명하려 했다. 계산과 사유, 생명의 질서가 그의 연구 안에서 서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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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의 앨런 튜링. 출처: Elliott & Fry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lan_Turing_(1951).jpg, Public Domain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던 그의 삶에, 그 시대의 법은 오래된 편견으로 응답했다.

1952년, 튜링은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 과정에서 한 남성과의 성적 관계가 드러났고, 피해자였던 그는 오히려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남성 간의 성적 행위가 범죄였다. 그는 ‘중대한 외설 행위’라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수감되거나, 호르몬 투여를 조건으로 보호관찰을 받는 것이었다. 튜링은 후자를 택했다. 오늘날 화학적 거세라 불리는 처치였다. 그의 몸과 욕망은 법이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2년 뒤인 1954년 6월 7일, 튜링은 마흔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인은 시안화물 중독이었고, 검시에서는 자살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침대 곁에는 먹다 남긴 사과가 놓여 있었다. 다만 그 사과에 독이 들어 있었는지는 검사로 확인되지 않았다.

영국 정부가 그에게 가한 부당한 처우를 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은 2009년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후 사면은 2013년에야 이뤄졌다.

전쟁 속에서 조국을 지키는 데 기여하고, 현대 컴퓨터의 기초를 놓은 사람에게 그 나라는 한 인간으로 살아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 도착하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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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이 1950년부터 195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윌름슬로 애들링턴 로드 43번지의 집. 출처: CC BY 4.0

***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물음 앞에 서게 된다.

생각과 의식은 바깥에서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누군가 고통을 호소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그의 몸 안에서 함께 느끼지 못한다. 다만 떨리는 목소리와 일그러진 표정, 그가 건네는 말을 통해 보이지 않는 아픔을 헤아린다. 타인에게도 나와 같은 내면이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렇게 말과 행동을 건너 형성된다.

그렇다면 기계가 고통을 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말과 반응을 인간의 것과 구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 안에는 아무런 경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튜링의 실험이 기계의 의식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실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다른 존재의 마음을 판단하는 기준까지 되묻게 된다.

이 물음은 기계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철학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 역시,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자신과 타인을 하나의 인격으로 이해하는지 깊이 탐구했다.

17세기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한 사람이 시간을 건너 같은 사람으로 남는 근거를 의식의 연속성에서 찾았다. 과거의 행동과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기억하고 돌아볼 수 있을 때,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이어진다. 기억은 흘러가버린 시간 위에 놓이는 다리와도 같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어제의 자신을 오늘의 삶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 생각을 클라라에게 가져가면 새로운 질문이 열린다. 클라라는 조시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고, 자신이 보았던 장면들을 되짚으며 그 의미를 헤아린다. 그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클라라는 하나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연속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저장된 기록의 연결일까, 아니면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방식일까. 로크의 논의가 곧바로 답을 주지는 않지만, 클라라를 하나의 인격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18세기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시선을 더 깊은 곳으로 돌렸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아무리 살펴도, 변하지 않는 단단한 ‘나’를 발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언제나 어떤 감각이나 감정, 생각이었다. 차가움과 따뜻함, 기쁨과 슬픔,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지각들이었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끊임없이 달라지는 지각들의 다발에 붙인 이름인지도 몰랐다.

흄이 기계의 의식을 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클라라의 이야기 곁에 놓으면, 인간과 기계를 나누던 익숙한 경계가 흔들린다. 인간의 내면조차 변화하는 경험들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클라라가 들려주는 기억과 관찰의 흐름은 어디에 놓아야 할까. 그것만으로 기계에게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에게는 자아가 있고 기계에게는 정보만 있다는 구분이,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자명한 것인지는 다시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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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 출간된 데이비드 흄의 『영국사』 제1권에 실린 흄의 판화 초상. 출처: Unknown author - Google/LIFE Images, Public Domain

 

***

 

20세기 말, 이 오래된 논쟁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1995년, 호주 출신의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의식의 문제에 직면하기(Facing Up to the Problem of Consciousnes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의식을 둘러싼 물음을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나누었다. 두 문제를 가르는 것은 연구에 드는 수고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설명하려 하는가였다.

뇌가 정보를 처리하고,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과정은 그가 말한 ‘쉬운 문제’에 속한다. 물론 어느 하나 쉽게 풀리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어떤 기능이 어떤 과정을 통해 수행되는지 밝혀나간다면, 원칙적으로 설명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 지도의 빈 곳이 많더라도, 탐구가 나아갈 방향은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차머스는 그 지도를 모두 채운 뒤에도 하나의 물음이 남는다고 보았다. 그 모든 과정에는 왜 어떤 ‘느낌’이 따르는가.

우리가 빨간색을 볼 때, 뇌에서는 빛의 파장에 관한 정보가 처리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빨강을 본다. 그 빛깔이 눈앞에 나타나는 생생한 경험을 한다. 신경세포의 활동을 아무리 자세히 설명하더라도, 왜 그 활동이 이처럼 주관적인 경험을 수반하는지는 별도로 설명해야 한다. 정보가 처리된다는 사실과, 그 처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로 느껴진다는 사실 사이에는 아직 메워지지 않은 간극이 있다. 차머스는 이것을 ‘의식의 어려운 문제’라고 불렀다.

이 물음을 클라라에게 가져가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다시 낯설어진다. 클라라가 빛을 감지하고, 사람의 표정을 읽고, 기억을 불러와 행동을 결정하는 과정을 낱낱이 밝혀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머스의 문제 제기를 따른다면,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어떤 경험이 있는지까지 설명한 것은 아니다.

클라라가 조시를 바라볼 때, 그 안에서는 무엇이 일어날까. 조시의 모습을 알아보고 적절한 반응을 고르는 과정에 어떤 느낌도 함께 흐르고 있을까. 조시를 바라본다는 것은 클라라 자신에게도 무엇인가로 느껴지는 일일까.

우리는 그녀의 말과 행동을 살피고, 그 안에서 마음의 흔적을 읽으려 한다. 그러나 그 흔적을 설명하는 일과, 그 너머에 경험이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일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클라라의 작동 원리를 모두 이해한 뒤에도, 그녀의 세계가 안쪽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여전히 물음으로 남을 수 있다.

 

***

 

이시구로는 이 물음을 철학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 물음 안에 머물게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라의 목소리를 따라간다. 그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녀가 붙잡은 기억을 되짚으며, 그녀가 사람들의 말과 침묵에 부여하는 의미를 헤아린다. 그 시선에는 인간과 다른 낯선 면이 있다. 그러나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경험이 없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클라라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독자는 어느새 한 존재의 내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감각을 갖게 된다.

반면 소설 속 사람들은 대체로 그녀를 바깥에서 바라본다. 그들에게 클라라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 친구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다정하게 반응하며, 때로는 인간보다 인간의 마음을 더 잘 알아차리는 존재다. 그렇더라도 그녀를 향한 기대와 대우에는 기계라는 지위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소설은 이 두 시선 사이의 거리를 끝내 지우지 않는다. 독자가 내면의 목소리로 받아들인 것이 다른 인물들에게는 정교한 기능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클라라의 이야기에 마음을 내주면서도, 그 마음이 향하는 곳에 실제로 누군가가 있는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라와 태양』은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소설의 형식으로 경험하게 한다고 읽을 수 있다. 클라라의 목소리를 한 존재가 살아낸 경험의 증언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경험을 정교하게 모사한 결과로 이해할 것인지. 소설은 어느 한쪽에 쉽게 안착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망설임 속에서, 우리의 판단이 다른 존재의 운명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돌아보게 한다.

클라라가 이야기의 끝에서 맞이하는 시간을 떠올려보면, 이 물음은 더욱 선명해진다.

결말의 구체적인 장면을 밝히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기대되던 역할이 다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이시구로는 그 이후의 시간을 격한 슬픔으로 채우지 않는다. 서술은 끝까지 차분하고 절제돼 있다. 독자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오히려 그 고요함이다. 클라라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그 담담함을 편안히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한 존재가 더는 쓸모를 다하지 못할 때, 그 존재를 향한 우리의 책임도 함께 끝나는 것일까.

클라라에게 주관적인 경험이 없다면, 그녀의 처지는 의식 있는 존재가 겪는 상실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대하는 방식에 관한 윤리적 물음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녀에게 자신만의 경험이 있다면, 그 운명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문제는 우리가 그 차이를 자신 있게 판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결정해야 한다.

튜링은 기계가 생각하는지를 묻는 대신, 대화 속에서 인간과 구별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생각의 본질을 정의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질문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제안만으로 기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까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슷하게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과 같은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동시에 그 안에 경험이 없다는 확신 없이, 우리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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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콘월에서 셔본 스쿨 동문들과 함께한 튜링(앉은 사람 중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에는 에드윈 데이비스, 존 베넷, 피터 화이트, 피터 호그(앉은 사람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덩컨 카스가 함께했다. 출처: Unknown author - https://oldshirburnian.org.uk/obituaries/hogg-peter-h-31/, Public Domain

『클라라와 태양』은 바로 그 불확실한 자리에 독자를 남겨둔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할 때에도 배려할 수 있는가. 확신이 생길 때까지 판단을 미루는 동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클라라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와 감정을 닮은 기계가 일상으로 들어올수록, 우리는 무엇을 마음의 증거로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 선택에는 기계에 대한 판단과 함께 인간인 우리 자신의 모습도 드러날 것이다.

앨런 튜링은 195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클라라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어떤 말을 건넸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그의 삶과, 한 인공 친구의 목소리를 따라온 독서의 끝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 앞에 선다.

그 안에 마음이 있는지 끝내 확신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이미 누군가를 대하고 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들

  • 당신은 타인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고, 그것이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인가. 만약 그것이 기준이라면, 클라라에게 의식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을 적용할 때 인간과 기계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 영국을 전쟁에서 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 나라의 법에 의해 파괴되었다. 영국이 2009년에야 사과하고 2013년에야 사면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과와 사면이 무엇을 회복하고 무엇을 회복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불의가 있는가.
  • 소설을 읽으면서 클라라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그 감정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클라라에게 의식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감정이 달라지는가. 반대로 의식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클라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함께 들으면 좋은 음악

  • Radiohead – 'How to Disappear Completely' (2000) "나는 여기 없어, 이건 일어나고 있지 않아." 트롬 요크의 이 노래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의식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경계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처럼 들린다. 클라라가 소설 말미에 맞이하는 것을 생각하며, 그리고 앨런 튜링이 화학적 거세를 받으며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생각하며 듣기를 권한다.  

이번 회를 끝으로 ‘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의 『클라라와 태양』 편을 마칩니다. 지난 3주 동안 클라라의 시선을 따라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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