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3대 비극 중 하나라는 이번 작품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와 어머니까지 아내로 맞이한 파렴치한 숙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덴마크 엘시노어 성의 왕자 햄릿의 복수극입니다. 햄릿의 상심과 고뇌의 깊이가 느껴지는 멋있는 문장들이 가득하고 욕심과 야망이 가득한 인물들조차 가족과 부인에게는 더 없는 사랑을 베푸는 인간의 다면성 또한 이 작품을 풍부하게 합니다. 하지만 악인이던 그렇지 않던 결국에는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결말의 이야기에요.
‘살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라는 유명한 대사는 햄릿의 괴로운 심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극의 마지막에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햄릿은 그가 진정 복수를 원해서 행한 걸까요? 죽음으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오필리어의 죽음은 또 얼마나 허망한지요. 그들이 탐했고 추구했던 그 모든 것은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었을까요?
극 속 인물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던지는 질문, 그 고민들을 적어봅니다.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햄릿에 대한 간략 소개는 ↓
1. 선왕의 혼령
셰익스피어의 희곡 자체를 글로 처음 읽어보는 거라 기대와 함께 두려움도 있었는데 극 처음부터 선왕 햄릿 (주인공 햄릿의 아버지) 이 혼령으로 등장, 귀신이 나오는 시작이라니, 무척 흥미진진했어요. 성의 망을 보는 파수병들이 자꾸 밤마다 이 혼령을 마주치고 그들은 햄릿 왕자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절친 호레이쇼에게 이에 대해 알립니다. 파수병들의 이야기가 진짜임을 확인 한 호레이쇼가 햄릿에게 이를 전달하고 결국 그는 야심한 밤 아버지의 혼령을 만나게 됩니다.
1막에 등장하는 혼령과 소통하는 장면들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한을 품은 귀신이 나타나 자기 아들에게 복수를 요청하다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귀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믿음인가봐요. 그런데 이 복수의 요청을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시에 귀신과 소통은 우선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야만 가능하며, 라틴어로만 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해요. 즉, 가방끈 좀 길어야 접신이 가능한 것이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존재와의 대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2. 클로디어스
이 혼란스러운 사건을 일으킨 주범입니다. 욕심 많은 남자, 원하는 건 다 이루어야 하는 인물인데, 사태 파악을 아주 잘 하며 경거망동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정치력도 있어 외교 분쟁도 단번에 해결하는, 보통 아닌 사람. 극 중 그가 등장할 때는 이미 모든 권력과 원한 바를 다 손에 거머쥔 상태로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형의 장례를 치른 지 한 달 만에 형수와 결혼식을 올린 것에 대해 대신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문장이 수려하기까지 하죠.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 시킬만한 능력이 있는, 교활하고 치밀해서 사회악이 될만한 자질이 다분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권력 쟁취에 대한 승리의 트로피로 왕비를 차지했다기보다는, 실제로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점이 여러번 강조됩니다. 형수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으로 모든 일을 벌인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어요.
극 중간중간에도 드러나는 왕비에 대한 사랑은 늘 한결같고, 자신의 안전에 충분히 위협이 될만한 햄릿을 처음부터 처치하지 않은 이유도 왕비가 아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었죠. 후반부 거트루드 왕비와 햄릿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선왕을 살해한 것도 왕비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혼자 저지른 일이고, 자신이 행한 살인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일단, 형을 살해하고 형수와 결혼한다는 근친 살해와 근친상간 자체는 뭐가 되었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여지는 없죠. 하지만 500년 전 이야기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즉 늘 어딘가에는 전쟁이 진행 중이고 생명을 건 권력의 암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리고 위에 언급한 그의 행동들을 생각해본다면 클라디우스는 절대적인 악인을 표현한다기보다는 비뚤어진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권력자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3. 거트루드 왕비
햄릿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찜찜하고 의문이 남은 인물이었습니다.
도대체 셰익스피어는 극 속에서 이 여인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원했던 건지 한동안 궁금증이 떠나질 않았어요. 햄릿에게 나타난 혼령에 의하면, 숙부가 왕비의 마음을 얻었다고는 하나 구체적인 설명은 없어요. 이 극 자체가 햄릿의 고뇌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주변으로 밀려난 인물이라고 생각해볼 법하긴 하지만, 그래도 도통 그녀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해 궁금한 것 투성입니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햄릿의 입을 통해서만 서술이 되는데, 그에 따르면 정욕에 목마른 약한 존재로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집니다. 그녀의 캐릭터가 모호함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한 햄릿이 분명히 느낄 정도로 왕비가 햄릿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요. 슬픔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는 햄릿에게 학교로 돌아가지 말고 곁에 남아있어달라는 요청 또한 불안한 아들을 곁에 두고 살펴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죠. 선왕의 사망과 자신의 조급한 재혼이 햄릿에게 정서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도 이미 짐작하고 있어요. 따라서 햄릿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는 단지 정욕에 이끌려 시동생과 바람을 피우고 남편이 죽자마자 서둘러 재혼을 한 생각 없는 여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작가는 그녀의 성품이나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사실이나 진실을 알려주기보다는,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햄릿이 어머니의 모습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그래서 상처받아 방황하는 햄릿의 모습을 더욱 부각하기를 원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햄릿은 극을 통틀어 단 한 번, 자신의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에게만 속에 쌓아둔 화를 표출하죠. 아들을 달래보려 부른 왕비의 방에 도착한 햄릿은 다짜고짜 왕비를 몰아세우며 화를 내는데, 아들의 분노에 찬 이야기를 듣다가 그제서야 왕비는 클라디우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전 남편을 살해한 걸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재혼이 햄릿에게 큰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햄릿이 자신을 원망하는 말을 들으며 괴로워하는 심정은, 자신의 변심한 사랑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클라우디우스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걸로 착각해 재혼을 한 것에 대한 후회, 그로 인해 자신이 가장 보호하고 싶었던 아들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느끼는 자책이라고 생각하는 게 좀 더 설득력 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했어요.
4. 오필리어
이 작품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라 느꼈어요. 이렇게 허탈하고 허무한 삶이 있을까요. 가족들의 걱정에 휘둘려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햄릿 왕자는 돌연 광기를 보이며 사랑한 적이 없다며 험하고 알 수 없는 독설을 퍼붓죠. 그리고 그 햄릿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하기까지 합니다. 이 극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과한 욕심이나 신념에 희생되어 죽음을 맞이하지만, 오필리어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상황 자체의 희생양이에요. 본인의 의지대로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던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소녀였으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결국 정신이 나가 방황하다 사고로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그녀의 허탈하게 짧았던 삶은 거트루드 왕비가 설명하는 그녀의 익사 장면의 아름다움 때문에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죠. 오필리아의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셰익스피어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 비극적인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죠.
https://www.tate.org.uk/art/artworks/millais-ophelia-n01506
5. 햄릿
이 작품은 복수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상 복수를 행하는 사건의 전개보다는, 햄릿의 고뇌하는 심리가 그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햄릿은 갓 청년기에 들어선 젊은이로 사이좋은 부모님 사이에서 자란 지적이고 감수성도 예민한 왕자입니다.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현재 왕국의 번영을 이룩한 업적을 세운 자신의 아버지는 생전에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어요. 따라서 화목하고 더할 나위 없던 가정의 기둥이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은 햄릿에게는 돌연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듯한 충격을 줄법하고, 게다가 삼촌이 재빠르게 왕위를 이어받고 어머니와 결혼까지 해버리는 모습은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믿기 힘든 상황일거에요.
햄릿의 멈추지 않는 슬픔과 분노는 복합적입니다.
애초에 큰 존경심이나 애정이 없던 숙부가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도 인정하기 힘들죠. 성대하게 파티를 열고 화통하게 술잔을 비울 때마다 나팔을 울려대는 모습도 썩 좋아 보이지 않고 말로만 자꾸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후계자라고 생각한다면서 제대로 신뢰할만한 행동을 보여주지도 않는 것도 못마땅할 따름입니다. 어딘가 교활함이 느껴지는 숙부는 자신의 아버지에 비하면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천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죠. 게다가 선왕의 치하에서는 숙부에 대해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사람들이 이제는 권력을 쥔 그를 받들어 모시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것도 한심스럽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햄릿은 그런 못마땅한 숙부와 바로 재혼해서 왕비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는 어머니가 가장 서운합니다. 아버지의 상여를 울며 따라가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 삼촌 옆에 앉아서 행복한 듯 웃는 모습, 그 둘 사이의 간극을 감내하기 힘들죠.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어머니가 인격적으로 부족하고 그저 정욕에 휘둘리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난들은 모두 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치유되지 않은 자신의 상처를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표출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한창 우울함과 슬픔,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을 때, 아버지의 혼령을 만나게 됩니다. 이 슬픈 상황에 대한 화를 어딘가에 쏟아내고 싶은 시기에 때마침 적절하게 나타난 아버지의 혼령은 그에게 당장 복수를 할 것을 명령하죠. 햄릿은 숙부의 만행을 알게 되고 원수를 갚기 위해 마음을 모질게 먹어 보지만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할지 사실 막막하기만 해요. 한없이 인간적인 햄릿의 고뇌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살다 보면 화가 나는 일들을 겪곤 하지만 화나는 매 순간 그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백 프로 다 표출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이유로 혹은 자신의 의지로 참거나 감정을 순화하고 다스리는 게 보통 사회화된 사람이 취하는 태도죠. 복수하겠다는 한을 품는 것과 이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어마한 거리가 있습니다. 복수를 실제로 행한다는 것은, 전쟁을 치르는 강단과 결심이 필요하겠죠. 그저 미워하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런 점에서 햄릿의 망설임과 고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생각했어요. 이 상황에서의 복수는 숙부 역시 죽이는 것 혹은 최소한 왕좌에서 몰아내어 멸하는 것일 텐데, 든든한 선왕 아래서 자란 섬세한 감수성의 햄릿이 이를 쉽게 실천할 수 있다고 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을 듯해요.
아버지의 혼령을 만난 뒤로는 이제 복수는 행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업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가 혼령으로 나타나 당장 실행하라고 요청을 했음에도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햄릿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고, 그는 오히려 ‘죽음과 삶’ 사이에서 고민을 합니다. 자기 삶에 닥친 고난, 즉 피의 복수를 하고 진흙탕에 제대로 발을 담그고 망가지는 것과, 죽음으로써 비통함을 알리고 명예롭게 모든 걸 끝내는 것, 어떤 게 더 나은 선택인지 고민하고, 동시에 자신의 무력한 모습이 한심스러워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비극인 것은, 그저 마지막에 일이 잘못되어 햄릿 또한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과 결말 모두가 애처롭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상처로 그토록 괴로워했는데, 어디 따뜻하게 마음 기댈 곳이 없어 방황하다 결국 구체적으로 ‘복수하라’는 숙제까지 떠안게 돼버린 햄릿. 어디에서도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가 진정으로 복수를 원한적이 있기는 하며, 자신의 주도하에 복수를 계획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그저 어머니와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충분히 슬퍼하며 사랑하는 오필리어와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좀 더 보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런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삶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어요. 자신의 의도나 희망과는 다르게 운명의 소용돌이에 얽혀버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본인 모두 죽음을 맞게 되죠. 클라디우스의 운명 또한 결국 자신의 손으로 끝내게 되긴 하지만, 과연 햄릿이 원했던 복수의 방식이었을까요. 이 모든 죽음 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가 삶과 죽음 사이에 갈피를 못 잡던 고뇌는 결국 무용해지죠. 살아서도 괴로움을 떨쳐내지 못했고, 죽음조차 결국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하는 방식으로 맞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사실은 햄릿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맞습니다. 극에 등장하는 모두에게 삶의 끝은 갑작스럽고 허탈하게 찾아옵니다.
6. 영화 햄릿
책을 읽고 아무래도 무대에 올린 걸 봐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볼 수 있는 콘텐츠를 찾다가, IPTV로 시청이 가능한 1990년 제작된 영화 햄릿을 보게 되었어요. 멜 깁슨과 글렌 클로즈가 나오고, 놀랍게도 헬레나 본햄 카터가 아주 청순한 모습으로 오필리아를 연기합니다. 주요한 대부분의 대사는 원작 그대로 유지했고, 한글 자막은 당연히 책과 차이가 있는데, 오히려 다른 번역을 비교하며 감상하는 게 나름대로 흥미로웠어요. 언제 기회가 된다면 베네딕트 캠버비치가 출연한 연극 영상을 보고 싶고, 이 외에도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면서 각각 다른 햄릿과 거트루드, 오필리아 및 여러 등장인물들을 비교하며 보면 재미있겠다 싶네요.
7. 번역서의 한계
극적인 구성과 격언 같은 대사들을 읽으며 셰익스피어의 수려한 표현 및 감성을 건드리는 비극에 푹 빠질 수 있는 작품 햄릿.
하지만 그가 종종 구사한 언어유희는 온전히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다만 자세하게 명기해둔 각주와 책 뒤 해설을 살펴보며 이해하고 짐작해보는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어요. 번역된 대사들 만으로도 이미 문학적이고 극적인 표현들을 만날 수는 있지만, 역시 영어로 읽어야만 온전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아쉬움은 한편, 번역서로 읽었을 때 이미 그의 문장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기도 해요. 따라서 뭐가 되었든 읽고 또 읽을만한, 그리고 연극과 영화를 계속 찾아볼만한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 다음 메일은 4월 15일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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