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뉴스레터를 장식하는 고전은 연말과 어울리는 훈훈하고 따뜻한 내용의 ‘작은 아씨들’입니다. 콩쥐팥쥐나 신데렐라처럼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책 제목이죠.
네 자매가 나온다는 것만 알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났지만 마치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는 것 같은 상식처럼 여하튼 ‘재미있는 책’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전처럼 두꺼운 책이 배송돼서 그 분량에 일단 충격 받았고, 발간 당시 아이들을 주요 독자로 목표했던 책인지도 몰랐던 탓에 첫 장을 읽으면서 너무 반듯한 문체에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이런 문체, 이 두께의 책이 널리 읽히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엔 좀 의아했죠.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읽는 동안 작가의 필력에 자주 감탄했고 때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왜 이걸 이제야 제대로 읽었을까 후회하면서 영화까지 찾아보게 되었어요.
올해 가장 기분 좋고 재미있게 읽은 ‘작은 아씨들’, 약 160여 년 전의 미국 평범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왜 이토록 아직까지 사랑을 받는지, 제가 느낀 이 책의 매력을 적어봤어요.
인상적이었던 문장들 먼저 옮겨봅니다.
*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 및 '작은 아씨들'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1. 각자의 서사를 지닌 소녀들
한 집에서 자매들이 복닥거리며 지내는 모습 자체가 일단 흥미로울 수밖에 없어요. 각기 성격 다른 네 자매라니, 극에 등장하는 일화들, 누군가의 행동 양식 중에 공감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척 많아지죠. 아름답고 성숙한 맏이 매그, 선머슴 같다고 눈총을 종종 받지만 재능 많고 야심도 있는 둘째 딸 조, 자매 중 가장 착하고 순수한 셋째 베스, 욕심도 많고 호감형의 싹싹한 막내 에이미, 그들이 다투고 화해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실제 있지도 않은 자매들을 상상 속에 만들어서라도 추억을 떠올리고 싶은 욕심마저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중심은 소녀들이 차지합니다.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콩쥐 팥쥐도 심청전도 모두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이 책의 네 자매는 다른 동화 속 소녀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서사 사이에 끼어서 그 속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그저 약자의 모습으로 동정을 얻으며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아닌, 인격과 성격이 부여된 인물로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고, 칭찬과 꾸지람을 들으며 극에서 각각의 몫을 해내지요. 제 어린 시절처럼, 혹은 학교 다닐 때 짝꿍이나 옆 반의 누구처럼 그렇게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서사가 있는 아이들이에요.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 잭과 콩나무의 잭, 빨간 머리 앤의 앤과 마찬가지로, 네 자매는 각자 자신의 성격에 맞는 삶의 모험을 해 나가며 그 생동감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습니다.
각기 다른 성격만큼 자매들 모두 원하는 삶의 방향도 다른데 어릴 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허황된 생각이나 허영심, 괜한 욕심 등을 차츰 다듬어가며 자신의 자아에 걸맞게 성장해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현모양처가 되기도 하고, 가식은 떨쳐내고 자신만의 취향을 가꾸어 마음까지 우아한 아가씨가 되기도 하며, 부단히 글을 써서 작가로 커리어를 쌓아 나가기도 하죠. 그 당시 사회상을 고려하면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들이 살아갈 법한 삶을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이상적이지만 자연스럽게 담아낸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2.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인생관
160년 전 쓰인 동화인데 지금 시대 소녀들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들이 등장해서 놀랐었어요. 아이들을 위한 소설 답게 매그 부인이 교훈적인 이야기를 딸들에게 전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인생의 소박한 진리들이 담긴 밑줄 치고 싶은 대사들이 가득해요.
에이미가 잘못을 해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체벌을 당하고 오자, 딸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으면서도 그 선생님의 훈육 방식은 잘못되었으니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강단도 놀라웠고, 돈이란 것은 유용하고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고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돈을 좇다가 자존심과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정답이지만 타협이 넘치는 요즘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죠.
쌍둥이 독박 육아에 지쳐 남편과의 시간이 서먹해지면서 가정의 평화에 균열이 오기 시작해 서러워하는 첫째 딸에게 매그 부인은 많은 젊은 엄마들이 겪는 시행착오라며 신랑을 아이 방에서 밀어내지 말고 육아에 동참시키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가끔씩 맡기고 미뤄둔 집안 일과 운동도 하며 부부간의 시간도 보내라는 조언을 합니다. 전혀 전투적인 모습이 아닌 자연스럽고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표현된 정답으로 가득한 장면들을 그 옛날 소녀들을 위해 쓰인 책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리고 매그 부인은 한마디 더 보태어 바깥세상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조언도 잊지 않습니다.
3. 삶의 한 부분, 죽음
매 에피소드 모두 특별하지만, 셋째 딸 베스의 죽음을 가족들이 받아들이며 준비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틀 안에서 반듯하고 간결한 문체로 가족의 죽음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룬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거니와 슬픈 과정을 그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일 수 있는 방법으로 설정한 이야기의 구성에도 감탄했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한 베스가 혹시 좀 더 건강해질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조가 계획한 두 자매만의 바닷가 여행에서, 둘은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해요. 조도 동생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는 걸 직감하고 있지만 당연히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이야기할 엄두는 내지 못하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베스는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어해요. 베스의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조는 그저 선한 의지에 따라 막무가내로 긍정적인 희망만을 이야기합니다.
이후 병으로 힘들어하는 베스 곁에서 온 가족이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 동안 사랑을 베풀고 기분 좋은 시간들을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베스를 포함해 가족 모두 언젠가 맞게 될 이별의 순간을 슬프지만 차분하게 준비하는 모습, 죽음 또한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며 결국 베스가 떠나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굉장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묘사해요.
4. 장르의 특성
이 책은 장르를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자면, 청소년 소설 정도일 듯 하네요. 애초에 올콧의 아버지가 동화를 쓰길 원했다고 하나, 출판 업자는 청소년 독자들을 겨냥한 출판 시장이 활발하지 않아 그 틈새를 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본주의적인 발상으로 올콧에게 권한 장르이지만, 결국 이 책으로 그녀는 수 세기를 지속할 명성을 거머쥐게 되죠.
동화같이 반듯하고 교훈을 설파하는 듯한 문체의 이 책이 발간된 순간부터 세대를 아우르며 오랜 시간 세기를 넘어 사랑받고 고전으로 여겨지는 것은 결국 좋은 책의 본질인 좋은 문장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단순한 문장으로 삶 속에서 경험할 만한 모든 감정에 대해 놓치는 것 없이 세심하게 그려냅니다. 누구나 느끼고 겪지만 잘 설명하기는 늘 쉽지 않은 행복, 성취감, 그리움, 사랑, 실연, 상처의 극복,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가 읽고 공감할 수 있는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영화에 빗대어 보자면 잘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달까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관람객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멋진 화면들과 함께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의 즐거움을 찾고 어른들 또한 마음의 울림을 느껴 울컥하는 감동을 느끼기도 하는 만화영화처럼 이 책 역시 누가 봐도 아름다운 표현들과 나이를 불문하고 즐거움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범 세대적인 작품이에요. 결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이 책의 특성이 사람들 내면의 복합적인 감정과 경험에 대한 표현에는 오히려 전혀 제약이 되지 않고 독자층을 더 넓히는 역할을 하는 셈이죠.
5. 미국적인 자유로움의 반영
상대적으로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느껴지는 장면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미국 하면 떠오르는 개척자 정신, 자유라는 단어들에게 기대하는 올바른 미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6. 영화 ‘작은 아씨들’
책을 다 읽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부랴부랴 2019년 제작되어 우리나라에선 올해 초 개봉한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도 찾아봤어요. 책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했다가, 책과는 별개로 이 영화에 푹 빠져버렸네요. 영화에서는 아예 조를 중심에 두고, 회상하는 장면들을 위주로 이 책의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을 보여주는데 21세기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대상에 대한 설명을 자연스럽게 추가하기도 했고 빠르고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그리고 지금 시대에 맞게 조금 더 각색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글로 읽을 때 느꼈던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대단히 잘 담아냈고, 자매들의 연애 또한 책만큼이나 낭만적이고 자연스럽게 그려냈어요. 특히나, 조가 아예 올컷의 분신에 가깝게 느껴지도록 설정한 후반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7. 21세기의 작은 아씨들
네 자매와 마치 부인 모두 당시에 있을 법한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평범하지만은 않은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어요.
둘째 딸 조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으며, 남자들처럼 지내고 싶다고 거칠게 말하곤 하지만 실제 그 속뜻은 여성이라는 제약, 인습 속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독립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어요. 가난하지만 기꺼이 더 힘든 이웃을 돕고, 딸들이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돈 만을 쫓으며 어리석고 불행한 인생은 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마치 부인은 딸들이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을 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동정하지는 않아요. 부유하게 살았을 때 심심해서 배워 둔 요리와 살림이 지금 이렇게 가난해지니 자신이 사랑하는 딸들에게 직접 식사를 준비해 줄 수 있는 기술이 되어 유용하다고 가르치고, 일상과 일의 소중함을 계속 일깨워주죠. 현모양처가 되고자 하는 첫째 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어릴 때는 세속적인 것만 쫓으려 했던 막내까지,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개성을 지닌 각각의 자매를 통해 각자의 자아를 지키면서도 끝내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지금 시대에 올콧이 이런 작품을 쓴다면 어떤 자매를 창조했을까 상상해보며 감상을 마무리 합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외모도 마음도 아름답고 어진 아내는 존경받을 만하니 매그는 여전히 평범한 가정의 따뜻한 안주인으로 설정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아예 배우의 꿈을 이룰 수도 있겠죠. 조는 작가라는 정체성은 유지하되 비혼 주의자나 성소수자, 혹은 혼인신고하지 않고 동거하는 파트너가 있는 사람으로, 미적 감각이 뛰어난 욕심 많은 에이미는 의류나 리빙 사업 분야의 임원이나 멋진 CEO로, 남들에게 베풀기 착하고 피아노를 잘 치는 베스가 차라리 조 대신 21세기 인본주의를 내세우는 학교를 건립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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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주
에이미와 로리 조의 삼각관계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영화에서는 급한 해피엔딩으로 조에게 짝을 만들어준 것 같지만 책으로도 다시 한번 봐야겠어요! 베스가 떠나는 부분은 엄청 몰입이 되네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가족 이야기는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것이 많고 참 공감이 되어요. 추천 감사해요!
안느의 고전 읽기
그러고 보니 조와 로리 부분이 영화는 책이랑은 약간 다르게 표현되긴 했네요. 책은 여러 설명이랑 정황이 좀 더 길게 표현되어있어서 의구심 바로 해결되실거에요 ^^ 이번에도 정성껏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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