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대화 자리에서) 한 분의 고백
“사실 저 그거 마감 기한에 맞추어 못했거든요. 그래서 못하는 기간 내내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무거웠어요.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기만 한 게 아니라,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니, 그걸 못하고 있는 제가 너무 못나 보이는 거에요. 이번만은 정말 잘 해내고 싶었는데 하면서요.”
2.
(어느 교육 시간에서) 한 분의 나눔
“진짜 저 그거 오랫동안 고민해 왔거든요.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잘 안 되요. 해야 하는 건 아는데, 잘 안 되요. 부담스럽고, 두려워요. 진짜 해야 하는 거 아는데 말이에요. 알면서도 못하는 저를 보니 마음이 무거워요. 어떻게 하면 그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코치들이 한 코칭 세션을 최선을 다하고 난 후에 몰려오는 뿌듯함도 있지만, 그 뿌듯함도 잠시, 다음 코칭 세션 전까지 고객이 하기로 한 ‘실행 계획’이 실천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코치로서 무능감이 밀려온다. 하, 내가 코칭을 어떻게 달리 했으면, 고객이 더 행동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하며.
코치로서의 성과는 결국 ‘고객의 ‘앎’이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탐구를 통해 새로운 ‘앎’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앎’의 울림이 ‘행동’까지 촉진하는 데 이어질 때 비로소 고객의 삶의 장면은 변하기 시작한다. ‘앎’으로만 끝난 코칭은 고객의 진정한 변화까지 일어나게 돕기는 어렵다.
코칭에서 아무리 코치가 고객의 삶에 있어 모든 선택은 고객에게 그 힘이 있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코칭을 하는 코치들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코칭 사례에 대해서는, 코치로서 정말 자신이 코칭을 잘 했는가 하는 ‘일에 대한 효능감‘에 있어 좌절을 피할 수 없다. (활자를 써내려 가는데, 연도별로 불어닥쳤던 나의 자괴감이 스쳐지나간다.)
나는 내가 만나는 코칭고객들, 프로그램 멤버분들이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어려워할 때, 딱 한 가지가 제일 걱정이 된다. 바로, 하지 못함(않음)으로서 그들이 힘들어질 것에 대한 걱정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아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려워서 행동하지 않은 사람이 ’행동‘을 하지 않아서 더 어려워진다니, 무슨 말일까.
나는 종종 이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안내하곤 한다. 그러니까 내가 뭘 ’행동‘하기로 결심한 순간, 내 자신이 그 말을 들은 목격자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말만 하고서 ‘행동’하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면, 그 경험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여러 차례 쌓이면, 자기 자신이 싫어진다. 믿을 수 없어진다. 그래서 차라리 무얼 하겠다는 생각, 꿈조차 꾸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또, 결심하고 하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하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 이루고 싶은 것, 시도해보고 싶은 것과 점점 멀어진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삶을 살길 바라는 내 입장에서 그것만큼 슬픈 것이 없다.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ICF에서의 8번째 역량 ’고객의 성장을 촉진한다‘와 연결되어 있다. 코치는 고객이 알아차린 ‘앎’을 ‘행동’으로 옮겨가게 함으로서 고객의 성장여정에 함께 한다. 그러니, 코치로서 내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무언가 하기로 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지점이다.
사실 나는 하기로 한 것에 대한 ‘실행(행동)’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의 사람이다. 그런 내가 코칭 장면에서는 코치로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려운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자칫하면 ‘이해하기 어려워’, ‘그게 왜 어렵지?’라는 판단이 서기 쉬운 우려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러한 고객이 마주한 어려움을 함께 하는 일인데, 나는 그것이 어렵지 않을 때, 이 지점이 나의 훈련이 필요한 영역이 되는 것이다.
코치는 고객의 빈 구석을 터치하고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번 <슈퍼리더십 코치 스쿨 4-5강> 수업 시간에서 함께 다루었다. 바로,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고객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과정을 리드하시는 권은경코치님이 참여자들에게 질문하셨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앎‘을 언제, 어떻게 ’행동‘으로 잘 옮기시는 편인가요?”
질문에 따라 ‘나는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지는 편이지?’하고 생각해보았다. 나는 매일 그 날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잘 생각하고, 가급적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데, 결국 그 기저에는 <무엇에 대한 불편함이 더 큰가(무엇이 더 고통스러운가)>에 대한 저울재기가 있다.
일단 나는 (1) 누군가와 함께 할 때, (2) 그것을 해내어보겠다고 선언했을 때 행동으로 더 잘 하는 편이다. 사실 이 (1)과 (2)를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조건이 있는데, 바로 (3) 하기로 한 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는 불편함이다. 하기로 한 것을 하지 못한 마음의 무거움이 그것을 해내는 것보다 더 힘들다. 나는 내가 하기로 한 것을 하지 못하면서, 내가 그런 나 자신을 점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험이 고통스럽다. 그래서 난 늘 그 고통으로부터 날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겨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 일을 하면서 만난 ‘행동’이 어려운 분들은, 그 하나의 행동을 하기까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서에 가까웠다. 권은경코치님 표현을 인용하자면, 손가락 하나를 까딱 움직이는 단순한 일에 어깨, 무릎, 허리 모든 근육을 동원해서 같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꼭 필요한 생각 하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한 여러가지 주변 생각들이 많이 얽히고 얽혀있어, 하나를 하는데 주변 다른 것들까지 다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보기엔 그 하나의 행동은 작더라도, 본인에겐 그 하나를 하는 데 쉽지 않은 것이다.
공감한다. 얼마 전, 버디코칭 시간에 나의 주제는 ‘사업 재무관리표 작성을 미루는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시간관리를 더 쪼개서라도 해내는 내가 그 작업에 있어서만은 계속 미뤄지는 현상에 있어서 왜 그럴까 동료코치님과 이야기 나누다보니, 한 10년 정도 지배하고 있었던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한 말, ‘기본이 안 되어 있다’와 연결되어 있단 걸 알았다. 나는 재무관리표 엑셀 하나 그냥 작성하고 싶은 건데, 10년 묵은 ‘돈에 대한 상처받은 장면들’이 같이 붙어 있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앎’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데 있어 하나의 중간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바로 ‘앎’의 여러가지 영역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앎’이 중요하단 걸 알게 되었다. 정체성,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버디코칭을 통해 나는 ‘돈’에 있어, 나에게 상처준 사람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 나는 돈에 있어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갖고 오랫동안 지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혹시 내가 재무관리 엑셀을 정리를 하면, 그 사람이 내게 한 ‘정말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나’라는 생각으로만 그쳤던 정체성이 사실로 드러나 한 번 더 직면하고, 각인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기저에 깊게 있었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엑셀 하나 정리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나, 정말 기본도 안 되어 있는 나라는 나 자신에 대한 부정과 연결되어 있단 걸 알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 안에 어떤 코어,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명명해준 것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외부에서 내부에 심겨진 것들도 있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그냥 난 그런 사람이야 상태인데, 코칭대화를 통해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느냐를 마주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내가 깨달은 현재 나의 정체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선택권.
나는 그 버디코칭을 마치고, 즉시 구글엑셀시트를 열고, 최근 가까이 하는 ChatGPT와 함께 20-30분도 걸리지 않아 2달치 내 사업 관련 재무관리표 작성을 마쳤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1) 내가 왜 그게 실행으로 잘 안 되는지 배경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기저에 (2) 내가 그 일에 있어 스스로를 어떤 사람(기본도 안 되어 있는 사람,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현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알고 나니, 나는 그 정체성을 그대로 살아가고 싶지 않아라는 의지가 발현 되어 (3) 다른 정체성, ‘나는 그냥 담백하게 해 가고 싶어.’, ‘오히려 돈에 있어서 자유해지고 싶어’를 스스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 힘은 나를 바로 움직이게(drive) 했다.
이 내 경험에 대한 권은경 코치님 표현을 빌려오면,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역량 8번, 고객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코치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고객은 ‘자기 존재 방식’이 어떠한지 스스로 분명해진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다음 행동에 대한 접근을 하기 훨씬 수월해져요. 사람이 안다라는 것은 그 사람 내부에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행동은 그 성질이 바깥으로 표출되는 거에요. 고객의 셀프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이죠.
그러한 고객의 셀프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는 방법은 다양한데, 일단 코칭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 고객이 가진 자신의 해당 주제에 대한 불편했을 감정은 조금씩 빠져나가요. 불편한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느냐가 발견되죠. 마치 자기 자신의 ‘진실’과 깊게 만나는 거에요.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렇게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나의 선택인지, 내가 정말 선택한다면 어떤 나로 살아가고 싶은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실에 대한 ‘선택’이 일어나요. 이 때 한 방식으로, 고객에게 평상시 중요한 가치가 뭔지 알고, 그 가치를 반영한 방식은 어떤 것인가 선택하면 그 방식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져요.
그런 고객의 여정을 함께 하는 코치인 우리가 먼저 편한 것과 불편한 것을 넘나들 수 있어야 되니까, 우리 코치들은 불편한 것에 편안하게 다가가는 방법들을 한 번 고안해 봐야겠죠. 그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불편함과 마주하는 거에요. 즉 코치는 자신의 ‘앎’을 ‘행동’으로 더 나아가게 해 봐야 해요. 왜냐하면 코치 개인이 자신의 삶,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커져갈 때, 코칭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코치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슈들에 나는 얼마나 수월하게 이걸 해내고 있는가에 대한 어떤 자신감은, ‘삶의 자신감’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무언가를 이루려 할 때, 그것을 매우 더더더더 쉽게 하고, 쉽게 해서 결과를 얻고, 또 하고 싶어지게 되도록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고객들 역시 자신들의 코칭목표에 대한 행동을 할 때에 더더더더 쉽게 작게 시도하고, 이뤄내는 경험들을 할 수 있게 함께 한 것 같아요.”
한다고 말하고, 하지 못하는 사람의 불편함을 함께 하는 사람, 코치. 어떻게 하면 그들이 불편함을 넘어서 ‘앎’을 ‘행동’으로 나아가게 할까. 각자 자신만의 행동에 요구되는 시간길이가 있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삶의 배경이란 것도 있고, 그 행동에 묻어있는 부정적 자기신념 등도 있다. A를 하는 데, A만 하지 않고 A + B, C, D, E….가 동반되는 한 고객의 불편함을 함께 하기 위해,
지금 이 고객은 (1) 이 행동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호기심,
(2) 그리고 사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는 존재인가라는 그 불편함 너머의 진실을 함께 하는 공간(space)을 제공하며,
단순히 어떻게 실행해보시겠어요? 하며 실행계획 설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3) 그 고객이 정말 조금이라도 더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지금 이 장면이 단순히 행동을 해내는 압박감 받는 장면이 아니라, 고객의 ‘셀프 리더십’을 조금 더 발휘할 수 있는, 성숙하게 할 수 있는 배움과 성숙의 기회로 만들 수 있도록 환경을 함께 구축해 가는 힘이 코치에게 필요하다.
나는 오늘도 자신이 살고 싶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면 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매일 마주한다. 그리고 그 분들이 어떻게 하면 그 행동을 하지 못함(않음)으로서 겪는 불편함, 고통으로부터 0.01%라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삶으로 나아가실 수 있을지 고민한다. 사람마다 다 달라서 뭐라 확실한 마법을 찾진 못했지만, 그래도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부터 내가 행동이 되지 않는 영역들을 계속 마주하고 행동으로 옮겨내어보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알게 된 위 3가지를 현재 만나고 계신 분들과의 장면에서 계속 발휘하고자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아래는 위 글과 관련한 나의 경험과 얼마 전 읽은 책 한 구절이다. 오늘도 이 시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그 행동이 잘 안 되어서 힘든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전하는 밤이다.
(책 인증 프로그램에서 한 분이 몇 일 이상 계속 인증이 없으시길래)
나: “똑똑, 그대의 인증 기다리고 있습니다.”
멤버: “아, 희소님 죄송해요. 책을 읽고는 있는데, 인증하는 게 잘 안 되네요.”
나: “오, 읽고는 계시군요. 인증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읽으시고, ㅇㅇ님 삶에서 묵상하고 있으시면 되지요. 그런데, 다른 멤버분들이 인증하는 걸 보면 마음은 괜찮으세요?”
멤버: “아, 무거워요.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면서 못해 내고 있는 제가 괴로워요.”
나: “음, 그럼 책에 눈이 안 가시면, 책 읽지 마시고, 채팅방은 보고 있다 하셨으니까, 그냥 채팅창에 올라오는 멤버들이 선정한 문장들만 가볍게 살펴보시고, 그 중 한 문장만 붙드셔서 적고, 그에 대한 통찰 하나씩만 가볍게 해내보는 건 어떨까요?”
멤버: “오, 그건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채팅창은 꼼꼼히 보고 있거든요.”
나: “좋아요, 인증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저는 ㅇㅇ님 마음이 편안했으면 해서요. 가볍게 그저 해내시며 하루하루 평안하길 바래요”
내가 내 기대대로 존재한다면 나와 잘 지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힘들어한다. '지금의 나'와 '바라는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 '자기불일치'야말로 인간의 숙명이고 본질이다. 인간은 이 불일치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발전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불일치를 조율하여 자기발전으로 나아가느냐이다.
이 자기불일치에 따른 자기조율의 실패가 바로 완벽주의이다. 완벽주의는 이상과 현실의 조율이 되지 않는 만성적인 '자기부조화 self disharmony'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늘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자기에게 요구하고, 자기 계획대로 해내야 한다고 엄포를 놓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이들의 이상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높이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 높이를 현실과 자신에 맞게 조절할 수 없다 ... 결국 이는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더욱더 조장하고 자기불화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한다.
건강한 어른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한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현실을 조율한다는 말이다. 서로 다른 마음과 상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자기를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노력을 통해 이상을 향해 다가가며, 다가가기 어렵다면 이상을 현실에 맞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율을 통해 자기불일치가 좁혀지면 또다시 좀더 높은 이상을 품으면서 자기불일치를 만들어낸다.
... 중요한 것은,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다시 하는 것이다.책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문요한 저, 85-86쪽
이번 주 사이시옷 소식: 40차 코칭스터디 모집 시작, 책 <이너 게임>
*최근 37-39차 코칭스터디 책들이 쉽지 않았던 점, 참여도에 변화가 보였던 점을 반영하여, 40차 코칭스터디부터는 기존 10쪽씩 읽던 방식이 아닌, 셀프북코칭 처럼, 1달에 1권 가볍게 읽고, 인증하는 방식으로 전환합니다. 같이 코칭인사이트를 나누고, 쉬고, 나누고 쉬고, 가볍지만 코치로서 깊이를 가져가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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