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글은 유료회원 전용으로 쓰던 글입니다.
그런데 최근 구독자가 많아져서 감사한 마음에 전체 공개로 발행합니다.
구독자가 100명 넘어가면 유료로 전환하겠습니다. 😉
제가 가끔 들어가 보는 사이트가 하나 있습니다.
archive.org
'Internet Archive'라는 곳입니다.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트인데 들어갈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분명 인터넷 사이트인데 저는 자꾸 판타지에 나오는 대도서관이 생각납니다. 마치 제가 좋아하는 만화 《도서관의 대마법사》의 '아프차크 중앙도서관'처럼 말이죠.

세상의 모든 책이 모여 있다는 엘프들의 도서관, 멸망한 왕국의 역사서부터 금지된 마법서까지 보관하는 성소, 아니면 수천 년을 산 용이 취미로 인간들이 버린 기록을 자기 동굴에 미친 듯이 쌓아두는 곳. 'Internet Archive' 라는 곳이 좀 그렇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용이 금화를 모으는 대신 책과 잡지, 영화와 음악, 게임과 소프트웨어, 심지어 웹사이트까지 모은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인터넷의 대도서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곳의 사서들이 자료의 격을 별로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고전 옆에 오래된 제품 설명서가 있고, 유명한 영화 옆에 기업 교육영상이 있고, 근사한 디자인북 옆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카탈로그가 있습니다.
판타지 대도서관의 사서에게 누군가 묻는다고 생각해봅시다.
“대마법사님, 이건 1982년 전자레인지 카탈로그....”
“그래. 넣어.”
“이건 1997년에 어느 중학생이 만든 개인 홈페이지인데요?”
“넣어.”
“내용도 별로 없습니다.”
“닥치고, 일단 넣어. 다모아!”
ㅋㅋㅋ 저는 이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지금 별것 아니라고 해서 나중에도 별것 아닌 건 아니니까요.
이 도서관에는 시간을 돌리는 마법도 있습니다
'Internet Archive'에서 가장 유명한 기능이 'Wayback Machine'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터넷 타임머신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처음 듣는 분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는 분도 있겠죠?
이곳의 검색창에 웹사이트 주소를 입력하면 과거에 저장된 그 사이트의 모습을 날짜별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네이버 주소를 넣고 몇 년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회사가 리뉴얼하기 전 홈페이지를 볼 수도 있고, 이미 문을 닫아버린 서비스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1999년, 2004년, 2011년. 달력에서 날짜를 고르고 그날의 인터넷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직접 타고 운전해 보면 타임머신이라기보다 고고학 발굴에 더 가깝습니다. 오래된 홈페이지를 열었는데 사진 몇 장이 깨져 있고, 버튼은 남아 있는데 눌러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페이지 일부가 통째로 사라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석에서 GIF 하나는 아직도 열심히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고대 신전에서 기둥 몇 개와 벽 한 조각만 살아남은 것처럼, 2001년에 누군가 밤새 만든 홈페이지에서 로고와 메뉴 몇 개만 남아 있는 겁니다.
인터넷에도 폐허가 있습니다.
'Wayback Machine'은 그 폐허를 발굴하는 장비에 가깝습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오래 남기려면 돌에 새겼는데, 이제는 URL을 서버에 저장합니다. 참 이상한 시대입니다.
'코드명 J'에서는 사람 머리를 하드디스크로 썼습니다
이런 곳을 보고 있으면 저는 오래된 SF 영화 《코드명 J》도 생각납니다. 키아누 리브스가 머릿속에 데이터를 넣고 운반하던 영화입니다. 정보가 너무 중요해서 사람 뇌를 저장장치로 써버리는 세계죠. 'Internet Archive'는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것을 대신 기억하는 거대한 외부 기억장치에 가깝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홈페이지를 만들고 잊습니다. 회사는 서비스를 만들었다가 종료하고, 잡지는 폐간되고, 게임은 서비스를 끝내고, 서버는 내려갑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뒤를 돌아다니며 계속 폐지를 모으듯 주워 담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이트가 SF라기보다 오히려 판타지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왕국 하나가 멸망할 때마다 달려가 책 한 권씩 빼오는 사서들, 누군가 역사를 전부 지우려고 해도 어딘가에는 복사본 하나를 숨겨놓는 수도원,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인간들의 기록을 수집하는 용.
그게 바로,
'Internet Archive'입니다.
디자이너는 여기 들어가면 좀 위험합니다
디자이너가 오래된 자료를 찾다 보면 아주 익숙한 일이 생깁니다.
혹시 '핀터레스트'나 '비핸스'를 즐겨 쓰시나요?
쯧쯧... 그렇다면 당신은 겉핥기만 하는 하수입니다.
Pinterest에서는 근사한 이미지 하나를 발견하고 저장해도, 누가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원래의 출처를 알기 힘듭니다.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어느 책에 실렸는지도 모릅니다. Tumblr에서 Pinterest로, Pinterest에서 블로그로, 다시 인스타그램으로 떠돌다 보면 출처가 다 떨어져 나간 이미지입니다. 사진은 남았는데 맥락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Internet Archive'에서는 가끔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어디선가 본 이미지 한 장을 발견했는데 앞 페이지가 있습니다. 뒤 페이지도 있고, 목차도 있고, 발행연도와 제작자가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작업까지 볼 수 있습니다. 갑자기 이미지 한 장이 끝없이 병풍처럼 펼쳐져 어마어마한 자료실이 됩니다.
멋있는 이미지 한 장만은 단순한 레퍼런스지만,
그 앞뒤의 자료가 붙으면 인류의 역사가 됩니다.


'Type specimen'을 검색하면 오래된 서체 견본집이 나오고, 'Corporate identity'를 찾으면 기업 아이덴티티 자료가 나옵니다. 오래된 광고 연감, 제품 카탈로그, 인쇄물과 매뉴얼도 줄줄이 튀어나옵니다. 여기에 1968, 1975, 1982처럼 연도를 붙이기 시작하면 검색이 아니라 시대 이동이 됩니다.
저도 처음엔 분명 1970년대 CI 매뉴얼을 찾으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1958년 냉장고 카탈로그를 보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도 모릅니다. 근데 밤새고 삼천포에 빠져 허우적대게 됩니다. ㅎㅎ
처음에는 그냥 오래된 자료가 잔뜩 쌓인 '고물상'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생각이 바뀝니다. ‘고물상’인 줄 알았는데 ‘보물섬’이 거기 있습니다. 문제는 보물지도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습니다. 지도가 없으니 헤매고 헤매다 새로운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보물섬은 Google에서 보는 것보다 안쪽이 훨씬 깊습니다. Google에서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오던 자료가 'Internet Archive' 안에서는 너무 쉽게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Google은 크롤링한 모든 페이지를 다 색인하는 것도 아니고, 'Internet Archive' 검색은 제목이나 설명 같은 메타데이터뿐 아니라 별도의 전체 텍스트 검색으로 스캔된 책의 OCR 내용까지 뒤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Google에서 안 보인다고 자료가 없는 게 아닙니다.
Google이 대도서관 앞 안내 데스크라면, 'Internet Archive' 내부 검색은 지하 서고에 직접 내려가 카드목록을 뒤지는 것에 가깝습니다. 가끔은 검색엔진보다 창고 관리인이 더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료에 목마른 우리는 그 창고 관리인과 친해져야 합니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의 뒷 이야기
찾아보면 영화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유명 영화보다 영화가 아닌 영화들이 재미있습니다. 교육영화, 기업 홍보영상, 산업영화, 뉴스릴, 다큐멘터리, 개인의 일상, 가족의 특별한 날, 정부 제작 영상, 광고, 16mm 필름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자료를 보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믿었는지가 보입니다. 1950년대 사람들이 생각한 미래의 집, 이상적인 직장인과 주부, 이상적인 자동차, 가전제품 하나만 사면 인간이 무지 행복해질 것 같은 표정들.


요즘 영화에서 재현한 1950년대를 보는 것과 1950년대 사람들이 직접 찍어놓은 자기 시대를 보는 건 전혀 다릅니다. 후자가 더 이상합니다. 직접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ㅋㅋㅋ
- 영화·영상 전체 검색
영화는 허구를 만듭니다. 그런데 광고와 교육영화는 때때로 그 시대 사람들이 진짜 믿었던 허구를 보여줍니다. 저는 그게 훨씬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곳엔 유명 영화에 관련된 기사와, 감독 코멘터리 이상의 다양한 인터뷰 기사, 그리고 당시의 관련 자료들이 넘쳐납니다. 그것만 있겠어요? 잡지들을 찾아보면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평론과 영화로 인해 유행한 패션과 음악들에 관련된 자료도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지금은 잊혀진 조연들과 100년전 찍어둔 최초의 영화자료, 광고자료, 그냥 일상의 영상들도 검색됩니다.
그러니 여기 들어가면 잠을 자겠어요? 못 자겠어요?
애니덕후는 작품만 찾으면 반만 보는 겁니다
애니메이션 쪽도 작품 자체보다 당시 잡지를 통째로 보는 게 더 재미있습니다. 캐릭터 설정화가 있고 감독 인터뷰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장난감 광고가 있고, 다음 페이지에는 음반 광고가 있고, 그 뒤에는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애니가 나옵니다.
- Animage 검색
우리는 2026년에 1988년 애니메이션을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작품 하나만 떼어 봅니다. 하지만 1988년에 그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잡지를 봤고, 완구를 가지고 놀았고, 음반을 샀고, TV 광고를 봤고, 다른 애니들과 한꺼번에 소비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잡지를 보면 작품뿐 아니라 그 작품이 살던 환경이 보입니다. 저는 잡지에 실린 광고도 다 봅니다. 광고를 왜 보냐고요? 그 시대 사람들도 그 광고를 봤으니까요. 그리고 광고는 당시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로고,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까지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뭐하러 어렵게 레트로 자료를 찾나요. 여기 다 있는데.
작품 하나만 보면 콘텐츠지만,
그 주변까지 보면 문화가 됩니다.

금서목록이 여기 있다!!
그리고 만화덕후 여러분.
그리고 올바른 성인이지만 음흉한 여러분.
여기쯤 오면 여러분이 무슨 생각하는지 압니다.
“근데 야한 것도 있나?”
네, 그럼요. 있습니다. ㅋㅋㅋㅋ
정확히는 오래된 에로티카, 성인잡지, 성인용 만화와 일러스트, 성인영화 관련 자료 같은 것들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플레이보이나 허슬러요? 다 있습니다. 그 외에 세계 각국에서 만든 포르노 잡지요? 화보집이요? 네네! 있다구요. 그럼 BDSM이나 변태들의 자료도 있냐고요? 말해 뭐해요.

“나의 보물?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잘 찾아봐. 이 세상 전부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까.”
원피스의 '골 D. 로저'가 말한게 떠오를 정도의 보물들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착한 해적이 되어 이제 그랜드라인을 넘으면 됩니다. 해적시대가 열렸습니다. 'Internet Archive'에 원피스가 있습니다.
“금서목록? 잘 찾아봐. 이 세상 별별 걸 거기에 다 두고 왔으니까.”
전 세계 오타쿠들이여!! 어서 키보드를 들고 출항하십시오!!
- Adult comics 검색
- 언더그라운드 코믹스 검색
- Playboy 검색
물론 'Internet Archive'가 성인사이트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는 건 성인문화도 결국 인간이 남긴 문화라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춘화는 수백 년이 지나면 박물관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1960년대 에로틱 잡지는 그냥 야한 잡지라고 버려버리면 좀 이상합니다. 당대 사람들이 무엇을 야하다고 느꼈는지, 어디까지 허용됐고 어디부터 금지됐는지, 몸을 어떻게 그렸고 욕망을 어떤 식으로 포장했는지도 결국 문화사입니다.
100년이 지나면
음란물이 민속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시간은 참 무서운 세탁기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성인자료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야한 거’가 아니라 시대별 인간의 욕망을 기록한 자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정말 문화사를 연구하기 위해 들어가시는 건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믿숩니다!
일단은. ㅋㅋㅋ
지하에 음반창고도 있습니다
음악도 있습니다. 음원만 있는 게 아니라 라이브 공연 녹음, 오래된 음반의 디지털화 자료, 라디오 방송, 인터뷰와 각종 음성기록까지 있습니다. 자료에 따라 실제로 바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게 오래된 78rpm 음반이나 라이브 녹음입니다. 요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보통 가장 깨끗한 버전을 듣습니다. 리마스터하고, 리믹스하고, 노이즈를 제거하고, 음량을 맞춰서 완벽하게 닦아놓은 소리입니다.

'Internet Archive'의 오래된 녹음은 반대입니다. 노이즈가 있고, 관객 소리가 들어가고, 녹음 상태가 엉망인 것도 있습니다. 누가 옆에서 떠드는 소리까지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게 재미있습니다.
음질은 나쁜데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1983년 어느 공연장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세워놓고 녹음했던 소리가 40년이 지나 제 스피커에서 나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료에 따라 녹음 날짜, 공연 장소, 연주자, 트랙 목록, 원본 매체, 업로더 설명 같은 정보도 함께 붙어 있습니다.
애플뮤직이나 스포티파이에서는 노래를 듣습니다. 'Internet Archive'에서는 가끔 그 노래가 살았던 자리까지 같이 보여줍니다. 음악과 당시 공연 영상, 또는 그 시절의 풍경까지도요. 음악덕후라면 이 차이가 꽤 큽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과 좋아하는 음악을 발굴하는 것은 다른 재미니까요.

이 도서관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옛날 자료가 엄청 많은 곳이구나’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Internet Archive'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료의 양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박물관은 무엇을 남길지 결정합니다. 중요한 작품, 중요한 인물, 중요한 사건처럼 이미 가치 있다고 판단된 것들을 남깁니다.
'Internet Archive'에는 그것과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오래된 매뉴얼, 실패한 소프트웨어, 촌스러운 홈페이지, 잡지 광고, 게임, 제품 카탈로그, 별로 유명하지 않은 영상, 누군가의 개인 홈페이지까지 그 당시에는 아무도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중 일부가 갑자기 엄청난 자료가 됩니다. 1996년에 누군가 만든 못생긴 홈페이지가 초기 웹디자인을 연구하는 자료가 되고, 평범한 슈퍼마켓 광고가 그 시대 물가와 생활을 보여주고, 싸구려 성인잡지가 당시의 성문화를 보여주고, 전자제품 카탈로그가 사람들이 미래를 어떻게 상상했는지 알려줍니다.
오늘의 쓰레기가 내일의 사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Internet Archive'의 철학을 마음대로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럴 것 같습니다. ‘뭐가 중요한지는 지금 결정하지 말자. 일단 남겨두자. 판단은 미래 사람들이 하게 하자.’ 이게 참 좋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판타지에서 모든 책이 모여 있는 도서관은 대개 성스러운 장소로 나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무섭습니다. 잊혀야 할 기록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지우고 싶은 기록도 있을 겁니다. 읽으면 안 되는 금서도 있겠죠. 그래서 판타지의 대도서관에는 항상 사서가 있고, 문지기가 있고, 금서고가 있습니다.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록을 어디까지 보존해야 하는지, 저작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개인의 기록은 언제 지워야 하는지, 공공의 기억과 개인의 권리 사이에서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하는지. 모든 것을 보존하려고 하면 결국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판타지였으면 대마법사들이 원탁회의를 열었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여기있는 자료를 상업용으로 마구 쓴다면 변호사가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 진짜 본인이 해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ㅋㅋㅋ
대량의 기록은 오히려 망각을 만듭니다
기록을 가장 많이 만드는 시대가 가장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게 제일 이상합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매일 기록을 만들었던 적은 없을 겁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음악을 만들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SNS에 매일 무언가를 남깁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기록들은 엄청나게 쉽게 없어집니다.
서버 종료, 서비스 종료,
계정 삭제, 회사 폐업, 도메인 만료.
끝입니다.
책은 서가에 꽂아두면 100년 뒤에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석판은 몇천 년도 갑니다. 그런데 웹페이지는 회사가 다음 달 서버비를 안 내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기록을 조금 만들고 오래 남겼습니다.
우리는 기록을 미친 듯이 만들고
미친 듯이 잊어버리며 잃어버립니다.
가끔 판타지에서 이런 곳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이 모여 있는 도서관. 수천 년 동안 사서들이 기록을 모았고, 멸망한 문명의 책도 딱 한 권은 남아 있는 곳. 어릴 때는 그런 장소가 당연히 허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이미 그 비슷한 걸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법 대신 크롤러를 쓰고, 수정구 대신 서버를 쓰고, 대마법사 대신 사서와 엔지니어가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서고 어딘가에는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1998년 홈페이지 하나, 1947년 냉장고 설명서 하나, 정체불명의 만화책 한 권, 누군가 공연장에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하나도 조용히 누워 있을 겁니다.
누가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누군가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
그래서 저는 'Internet Archive'를 단순한 인터넷 자료창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거창하게 부르고 싶습니다. 인터넷 문명이 만든 기억의 성소.
그렇다면 여러분 그 성소에 들어갈 땐 이것만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분명 서체 견본집 하나만 보려고 들어갔는데 세 시간 뒤에 1947년 냉장고 사용설명서를 읽고 있을 수도 있고, 만화자료 찾으러 갔다가 금서고 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120%
이곳의 대마술사는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지만 시간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니 너무 깊이 빠지진 마시고 주말에 즐겁고 가볍게 방문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다음주에 또 재밌는 자료와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아...아니다. 요즘 너무 글이 길어진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조금 짧은 글로 찾아올게요. ㅋㅋ
끝
'구독자' 님은 인터넷에서 사라져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아보고 싶었던 적 있으신가요? 예전에 좋아했던 홈페이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글, 오래된 잡지 한 권,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영상 같은 것들 말입니다.
시간이 나실 때 'Internet Archive'의 문을 한번 열어보세요. 찾던 걸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찾지 않던 이상한 보물을 세 시간째 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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