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박수를 받는 사람입니까?
오늘은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길게 해보려 합니다. 요즘 제가 왜 예전처럼 SNS에 글을 자주 올리지 않는지, 그리고 왜 어떤 말들은 열심히 써놓고도 굳이 서랍 속에 넣어두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동안 박수가 사람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먹여 살리기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더군요. 박수는 통장에 잘 찍히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습니다. 그것도 꽤 지독하게요.
누군가 나를 봐준다는 감각, 내가 한 일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감각, 내 이름이 불리고 내 말이 기억되며 내가 만든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된다는 감각. 창작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거의 연료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 연료가 꽤 빨리 소모되고, 마약처럼 중독된다는 데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다들 그걸 알면서도 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참 간사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고맙습니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 생각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 작업을 자기 삶과 연결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반응은 사람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합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부활의 주술처럼 말이죠.
더 써야겠다고, 더 만들어야겠다고, 조금 더 힘내보자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집니다. 박수가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어제보다 반응이 적으면 내가 별로인 것 같고,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 않는 것 같고, 뭔가 망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존감이란 게 생각보다 고상하지 않습니다. 숫자 몇 개에도 꽤 정직하게 흔들립니다.
분명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사람들의 반응이 내 하루의 기분을 결정합니다. 글 하나 올려놓고는 쿨한 척합니다. “뭐, 반응 없어도 괜찮아. 나는 그냥 열심히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10분 뒤에 다시 들어가 봅니다. 30분 뒤에 또 들어가 봅니다. 한 시간 뒤에는 거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리하듯 누가 봤고 누가 반응했는지 확인합니다. 박수소리가 커지고, 좋아요 수가 늘어나고, 대중의 관심이 커질수록 사람의 연비는 나빠집니다. 처음에는 한 문장을 쓰는 데 한 문장만 생각하면 됐습니다. 내가 느낀 것, 내가 본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 그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 시작하면 문장 바깥의 것들까지 같이 계산하게 됩니다. 이 말을 하면 누가 불편해할까. 이 정도 표현으로는 약하지 않을까. 더 날카로워야 하나. 더 웃겨야 하나. 더 깊어 보여야 하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른가. 그렇게 삶의 더 많은 부분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보일지 계산하는 일’에 쓰게 됩니다.
표현하기 위해 쓰던 시간은 반응을 예측하는 시간으로 바뀌고, 만들기 위해 쓰던 에너지는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소모됩니다. 처음에는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계속 관심받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태우는 일이 됩니다. 창작이 아니라 관리가 되고, 고백이 아니라 연출이 되며, 삶은 점점 연비 나쁜 운전처럼 변합니다. 기름은 계속 넣는데, 앞으로 가는 느낌은 별로 없고, 엔진 소리만 요란합니다. 멋지게 시작했는데, 어느새 볼품없이 애쓰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디자이너라는 일을 오래 해왔습니다. 겉으로 보면 디자이너는 멋진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로고를 만들고, 포스터를 만들고, 패키지를 만들고, 브랜드의 얼굴을 만드는 사람.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오래 일해보면 디자이너의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목소리 사이에 서는 일입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 시장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 브랜드가 지켜야 할 체면, 그리고 내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감각. 그 사이에서 계속 조율해야 합니다.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번역하고, 때로는 포기하며, 때로는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디자이너는 단순히 예쁜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욕망들이 싸우지 않도록, 혹은 싸우더라도 그 싸움이 하나의 결과물로 정리되도록 만드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남의 욕망을 조율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하나의 브랜드처럼 관리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계속 새로워야 하는 사람, 계속 감각 있어야 하는 사람, 계속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사람.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매번 “나 아직 여기 있습니다”를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말하는 일에 가까울 때도 있습니다. 브랜드를 다루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도 브랜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디자인을 했고, 글을 썼고, 타로를 가르쳤고, 문화와 상징에 대해 말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제 이름보다 Jake라는 이름으로 저를 먼저 아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제 생각을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내 말을 듣고, 내 작업을 자기 삶과 연결해준다는 건 쉽게 얻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 관심은 실제 기회로도 이어졌습니다. 세바시 무대에 섰고, TEDx 무대에도 섰으며,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대단한 성공담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사람들 앞에서 말해본 사람은 그 시선의 힘을 압니다.
조명이 있고, 객석이 있고, 내 말을 기다리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은 이상하게 또렷해집니다.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은 정말 사람을 살립니다. 평소에는 “내가 뭐 대단하다고” 하다가도,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이 바라보면 마음이 금방 달라집니다. 이쯤 되면 겸손도 꽤 상황을 탑니다.강연이 끝난 뒤, 사람들은 때때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넵니다.
“제이크님 글을 읽고 힘을 얻었습니다.”
“덕분에 디자인을 다르게 보게 됐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다시 쓰게 만들고, 더 잘하고 싶게 만들며, 더 깊이 말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마움 속에서 피로가 시작됩니다. 다음에도 그래야 하니까요. 다음 글도 좋아야 하고, 다음 강연도 흔들림 없이 해내야 하며, 다음 작업도 새로워야 하고, 다음 말도 사람들에게 닿아야 합니다.
한 번 관심을 받은 사람은 관심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한 번 박수를 받은 사람은 조용한 방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처음에는 표현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표현보다 반응을 더 오래 생각합니다. 글을 쓰기 전에 독자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고, 말을 하기 전에 오해의 가능성을 먼저 계산하며,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 작업이 나를 어떻게 보이게 할지부터 생각합니다.
기억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잊혀질까 봐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마음은 대체로 이 두 감정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면서도, 그 기억이 과거의 나만 붙잡고 있으면 또 조금 슬퍼집니다. 기억은 고마운데, 기억 속에만 사는 건 또 곤란합니다. 그리고 창작자에게 가장 잔인한 말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전이 좋았는데.”
가볍게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말한 사람은 별 뜻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전 글이 좋았다. 예전 작업이 좋았다. 예전 감각이 좋았다. 예전의 당신이 좋았다. 처음에는 칭찬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말은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그 말은 결국 이런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쩌라는 건가. 어쩌라고, 정말.
사람은 변합니다.
감각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생각도 변합니다.
그런데 대중은 자주 변한 사람보다 기억 속의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제가 요즘 SNS를 예전처럼 잘 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무엇이든 쓰고 싶었습니다. 일상도 쓰고, 생각도 쓰고, 영화 이야기도 쓰고, 디자인 이야기도 쓰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감정도 바로바로 적었습니다.
그때는 SNS가 제게 광장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연결되는 곳이었고, 생각을 꺼내놓는 작업실이었고, 때로는 작은 무대였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광장 한복판에서 혼자 마이크를 잡고 있었던 셈이니 조금 민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SNS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글을 쓰기도 전에 반응을 상상하게 되고, 올리기도 전에 피곤해지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나를 먼저 떠올리게 됐습니다. 많이 읽힐 글인가. 사람들이 좋아할 글인가. 내가 너무 진지해 보이지는 않을까. 반대로 너무 가벼워 보이지는 않을까. 이 말을 꺼내면 또 무슨 반응이 올까. 그런 생각들이 글보다 먼저 앞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쓰는 일이 조금씩 무거워졌습니다. SNS에 무언가를 올린다는 것이 단순히 생각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계속 나라는 사람을 업데이트하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아직 감각 있는 사람인가. 나는 아직 쓸 만한 말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아직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사람인가. 이 질문들이 피곤했습니다. 질문도 피곤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나도 피곤했습니다. 남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쁜데, 나는 내 이미지의 온도와 습도를 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글을 다 써놓고도 올리지 않은 채 조용히 저장해둔 글들이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글이라서가 아닙니다. 올린 뒤의 반응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글을 쓰는 피로보다, 글을 올린 뒤의 피로가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좋은 문장도 잠시 서랍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요즘은 굳이 글로 사람들에게 내 일상이나 생각을 계속 공유하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열심히 SNS를 하지도 않습니다.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 피곤해진 겁니다. 멋있게 말하면 침묵의 시간이고, 덜 멋있게 말하면 기력이 조금 달리는 중년의 SNS 휴식기입니다.
예전에는 “이 생각을 써야겠다”였다면
요즘은 “굳이 지금 안 써도 되겠다”에 더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관종의 삶을 조금 내려놓고,
삶을 관조하는 쪽으로 가보고 싶어진 겁니다.
이게 어쩌면 관종의 패러독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심받고 싶어서 말을 시작했는데, 관심이 커질수록 말하는 일이 더 어려워지는 상태. 보이고 싶어서 앞으로 나갔는데, 너무 오래 보이다 보니 다시 숨을 곳이 필요해지는 상태. 물론 이게 불경을 읽은 수행의 결과인지, 단순한 체력 저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쓰고 싶고, 여전히 말하고 싶고,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습니다. 다만 이제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정말 말하고 싶어서 쓰는 것인지, 아니면 잊히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인지. 내가 나누고 싶어서 올리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은 것인지. 그 차이를 예전보다 더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다 보면, 글을 올리기 전에 그냥 커피나 한 잔 더 마시게 됩니다. 이쪽이 훨씬 마음의 평화를 주니까요.
적어도 제게 창작은 꽤 피곤한 일입니다. 만드는 일보다 인정받는 일이 커질 때, 작업보다 반응이 먼저 떠오를 때,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더 크게 들릴 때, 그 순간 창작자는 자기 작업의 주인이 아니라 자기 이미지의 관리자가 됩니다.
작품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작품 밖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한때 유행했던 셀프 브랜딩은 필요합니다. 자기 일을 설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대이고, 자기 감각을 언어로 만들지 못하면 돈 벌 기회도 잘 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나를 알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나를 계속 증명하는 일이 되고, 내가 만든 것보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아무것도 올리지 않는 시간이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침묵이 회복이 아니라 퇴장처럼 느껴지고, 생각을 익히기 전에 보여줘야 할 것 같고, 실패할 권리보다 계속 보일 의무가 커집니다.
마약을 끊으면 금단증상이 오듯, 박수도 끝나면 금단증세가 옵니다. 채워지는 것 같지만 곧 더 큰 허기를 만들고, 한 번의 성공은 영원한 안정이 아니라 다음 성공을 요구하며, 한 번의 인정은 끝이 아니라 다음 인정을 기다리게 합니다.
아마도 제가 더 유명해지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유명한 사람들은 이 문제를 조금 더 우아하게 견디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적당히 알려진 사람에게 이 피로는 꽤 집요합니다. 너무 유명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명도 아닌 위치. 이 애매한 자리는 사람을 묘하게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잊히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보이자니 피곤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받은 사랑보다, 곧 사라질지 모르는 사랑에 더 예민해집니다. 사귀기 전에는 사랑받으려고 애쓰고, 사귀고 나면 헤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요. 참 신기합니다. 받은 건 빨리 익숙해지고, 사라질지 모르는 것은 오래 신경 쓰입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선택적으로 못됐습니다.
인정 욕망은 참 복잡합니다. 우리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박수치는 사람들보다, 팔짱 끼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의 표정이 더 신경 쓰입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야 비로소 내가 진짜가 되는 것 같은 기분. 이것은 너무 인간적이고, 그래서 너무 피곤합니다.
저도 별수 없습니다.
고상한 척 오래 해봐야 결국 마음속에는
“그래서 나 괜찮았어?” 하고 묻는
소심하고 작은 인간이 앉아 있습니다.
모든 창작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가끔 그렇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지금 진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는 중인가.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진짜 일을 하는 사람은 작업을 봅니다. 증명하려는 사람은 자기 이미지를 봅니다.
물론 완전히 나눌 수는 없습니다. 작업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좋은 것을 만들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습니다. 내면의 기준도 중요하지만, 바깥의 반응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남의 시선 신경 안 써”라고 말하는 사람도 대체로 그 말을 남이 봐주길 바라며 씁니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이렇게까지 피곤합니다.
결국 문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반응에 기준을 두면 작업은 자주 불안해집니다. 사람들의 눈을 먼저 생각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며, 안전한 새로움만 선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 기준만 믿으면 쉽게 오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조율해야 합니다. 이 조율이 창작의 윤리이자 피로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조율을 잘한다고 해서 늘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덜 망가지는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조금 조용히 있으려 합니다. 완전히 숨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내 말이 다시 내 안에서 충분히 익을 시간을 주고 싶습니다.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다가 정말 보여줄 것이 생겼을 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박수를 좋아했던 걸까요,
아니면 조용해지는 법을 잊고 살았던 걸까요.
좋아요 수가 줄어든다고 내 키가 같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댓글이 적다고 통장 속 숫자까지 적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잠시 나를 잊어도 내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이렇게 말해놓고 또 어느 날 갑자기 긴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이고, 저는 그중에서도 꽤 성실한 편입니다. 침묵하겠다고 장문으로 쓰는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요즘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날에도 하루는 지나가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은 날에는 젤리가 제 옆에서 같이 놀아줍니다. 예전의 내가 조금 멀어지고 생각과 삶이 달라졌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 구독자'님은 요즘 어떤 소리에 더 자주 흔들리고 계신가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저도 같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패러독스인간김광혁이었습니다
다음글도기대해주세요 🙇🏻
이 주제로 만든 팟케스트도 들어보세요~
인천 사람에게 짜장면이란 무엇인가 🍜
안녕하세요인천사람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 인천 사람을 만날 때면 어딘가 짜장면 냄새가 같이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비하하는 말도 아니고, 인천 사람이 전부 매일 짜장면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인천에도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