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에는 가끔 아무도 빌린 적 없는 것처럼 보이는 책이 있다. 책등은 누렇게 바랬고 종이는 손끝만 대도 부스러질 것 같은데, 이상하게 먼지가 없고 누군가 방금 전까지 읽다 꽂아놓은 것처럼 반듯한 책들이다. 유지인은 그런 책을 좋아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을 준비하던 스물다섯 살의 유지인에게는 생각보다 빈 시간이 많았다. 취업 준비라고 해도 하루 종일 이력서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험과 면접 사이에는 며칠씩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 생겼고, 처음에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커피값도 만만치 않은 데다 사람들 틈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취업 사이트만 들여다보는 일이 점점 견디기 싫어졌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쯤 떨어진 구립도서관에 자주 가게 되었다.
도서관에는 에어컨이 나왔고 물도 무료였으며,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오전에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자기소개서를 조금 고치다가 지겨워지면 책을 읽었다. 특히 서점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오래된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작은 낙이었다. 유명해지기 전 작가의 초기작, 초판 이후 다시 출간되지 않은 단편집, 작가 자신도 훗날 모른 척했을 법한 서툰 작품들. 완성된 작품에는 없는, 훗날 그 작가가 평생 반복하게 될 욕망이나 공포가 아직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꿈틀거리는 순간이 그런 책에는 있었다.
그리고 그날, 란포의 책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미로 속의 파수꾼』
표지는 누렇게 바랬고 출판사 이름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란포의 작품을 제법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제목은 기억에 없었다. 판권면에는 오래된 일본 연호와 숫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었으나 잉크가 번져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책은 낡다 못해 종이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삭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책등에는 먼지가 거의 없었다. 누군가 최근까지 읽었다는 뜻일까 싶었지만 대출표도 바코드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몇 장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어느 외딴 마을에서 한 남자가 사라지고, 그 사건을 조사하러 온 탐정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스무 장쯤 지나자 유지인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처음 읽는 소설인데 자꾸만 알고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목 뒤에 검은 점이 있는 여자, 거울을 이용한 속임수, 벽 뒤에 난 통로, 얼굴을 바꾸고 살아가는 남자, 창문 없는 방과 밤마다 위치가 달라지는 계단. 모두 란포의 훗날 작품들에서 형태를 바꿔 다시 나타나는 것들이었다. 한두 개라면 우연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너무 많았다. 어떤 등장인물은 이름만 다를 뿐 훗날의 유명한 탐정과 성격이 같았고, 어느 살인의 장치는 몇 년 뒤 발표된 작품의 핵심 반전과 거의 같았다. 심지어 여기서는 이름조차 없는 조연이 다른 소설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성장한 흔적까지 보였다.
유지인은 점점 책에 빨려들었다. 이것은 실패해서 잊힌 초기작이 아니라 이후 란포가 쓴 모든 기괴한 이야기의 씨앗처럼 보였다. 한 작품에서 피해자였던 사람이 다른 작품에서는 살인자가 되고, 여기에서 죽은 사람이 훗날 다른 책에서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었다. 각각의 작품이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세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닐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유지인은 묘하게 들떴다. 아무도 모르는 작가의 비밀을 자신만 발견한 기분이었다. 취업이니 자격증이니 하는 것들은 잠시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집에 돌아가면 란포의 작품들을 발표 순서대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서관이라는 곳은 늘 가장 재미있는 순간에 문을 닫는다.
“이용자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도서관 운영이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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